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56화 (5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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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루크에이스 페스티벌.

“제가 이곳 네메스 대륙에 환생하기 전, 지구에 있을 적의 이야기에요. 전 미국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죠.”

사도에게 환생 전의 이야기를 묻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로 금지되어 있다. 어차피 돌아가지 못할 세계고, 생각해봤자 그립기만 한 세계다. 누군가가 환생 전에 뭐했냐고 노골적으로 묻는 다면 결투 신청을 해도 괜찮을 정도다.

알릭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밝히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는 기억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눈이 아련하게 변했다.

“기계 같은 삶이었어요. 마땅한 특기도 없었고, 시간이 부족해 취미도 갖지 못했죠. 기껏해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였죠.”

그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주머니에는 항상 스마트폰이 있었고, 약간의 시간이 있으면 그것을 만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독 수준이었다.

이 네메스 대륙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잠잘 곳, 먹을 것, 일터를 찾는 것이었다. 알릭은 운이 좋아 괜찮은 일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힘들었던 것이 전자기기가 없는 지루한 세계였다. 인터넷이 없고, 스마트폰이 없고, TV도 없었다.

“스마트폰… 그리운 단어네요.”

테드가 중얼거렸다. 그는 대한민국의 학생이었다. 알릭 이상으로 스마트폰을 끼고 살

았다. 길을 갈 때도 만지작거리다가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혼났을 정도다.

“네메스 대륙의 아쉬운 점은 시스템의 관리로 전자기기를 만들 수 없는 점이죠.”

그때는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어떻게든 살게 된다.

“제 삶은 기계 같았지만, 순조로웠지요. 평탄했어요. 기계처럼 사는 대신 평안을 약속 받았죠.”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사로 간다. 일은 많은데 처리는 잘 되지 않아 야근은 물론이고 휴일까지 반납해야 할 때도 있었다. 힘들어서 그만 둘 생가까지 했었다. 옆자리 동료의 말버릇은 ‘이 회사를 빨리 때려 치든가 해야지.’였다. 3년 동안 꾸준히 듣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부도가 났습니다. 회사 내의 심각한 분위기는 진즉에 눈치 챘습니다만,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암시하고 평소처럼 출근했죠. 그리고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직 30대였었다. 젊음이 있으니 크게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휴일을 즐기려고 했었다.

“불행은 겹쳐서 발생한다더니…… 부모님에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부모님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급히 일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

모아 두었던 돈과 보험금이 있어 당분간은 괜찮았다. 그러나 혼수상태가 부모님의 혼수상태는 몇 달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회사에 있던 경력이라면 충분히 취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면접에 나온 사람들은 저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스펙과 경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더 좋은 회사에 구직활동을 하기에는 제겐 시간과 돈이 없었지요. 급한 대로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단순한 일의 반복이었지만, 3조 2교대로 일하는 곳이라 몸이 힘들었지요. 그

래도 돈은 제법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매달 빠지는 간병비를 볼 때마다 심장을 압박하는 기분을 느꼈다. 부모님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고, 돈은 날이 갈수록 사라진다. 전부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1년 정도 공장을 다녔을까, 공장의 사정이 나빠져 정리해고를 당했지요. 그때 깨달았죠. 나는 기계가 아니라 그 언제든지 교환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했다는 걸.”

대학생인 테드가 모르는 이야기다. 환생 전 테드는 돈을 받고 일해본적이 없다. 테드는 대학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하고 교통사고로 죽었으니까. 사회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래도 부모님이 깨어나면 사람처럼 살수 있다고 믿고 어떻게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여행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구절을 보았지요. 삭막한 생활 속에 희망이 되었습니다. 휴일에 부랴부랴 준비하고 근처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갔지요.”

여행의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의 여행이었다. 그때 그의 손에는 지갑과 스마트폰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도 즐길 수 없었어요. 유명하고 굉장한 풍경을 보아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요. 오히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시기했습니다. 왜 나는 저들처럼 될 수 없을까.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이 오는 것인지… 누군지 모를 이에게 분노하고 증오했습니다.”

기대했던 여행은 최악으로 끝났다.

여행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더 우울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깨어났습니다. 기적처럼 두 분 모두 혼수상태에서 일어나셨죠. 그런데 세상은… 제가 행복해하는걸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이번엔 제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트럭을 운전하고 있었는데 코너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트럭과 맞부딪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하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그 말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대답했었다. 당연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호자도 없이 네메스 대륙에 환생하게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자살까지 생각했었다. 아니, 도와주는 이들이 없었다면 분명히 자살했을 것이다.

“저는 전생의 삶을 손에서 놓기로 결심했어요. 과거를 집착하지 않기로 했지요. 전생의 기억과 경험은 유용하지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지구가 아닌 네메스 대륙이니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포기했다. 그렇다고 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부모님의 얼굴을 떠오른다. 단지, 환생한 세상에선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계약신은 이 세계에 대해서 설명할 때, 게임으로 비유했었다. 그러나 게임이 아니었다. 확실히 게임과 닮은 부분은 있었으나,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제가 있던 마을에는 커다란 분수가 있었지요. 과거의 대마도사가 만든 마법분수죠. 저는 순수하게 감탄했고,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이런 신비한 것들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왕 온 판타지 세계. 즐기지 않으면 손해잖아요?”

여행을 할수록 이 세계가 좋아졌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제가 보기에는 테드 씨는 열심히 살고 있어요. 자유 기사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잖아요?”

자유 기사는 수단에 불과했다. 진짜 목적은 전쟁을 막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테드의 목표였다.

“……목표를 이루고 난 뒤에는… 뭘 해야 할까요?”

“그건 테드 씨, 스스로가 생각해야 하는 주제네요. 그렇지만 역시 제가 추천하는 것은 여행이죠. 한 번 보시겠어요.”

그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네모난 종이를 꺼냈다. 마법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다. 테드는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 들였다.

테드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한다.

“이건 루크에이스…….”

첫 번째 사진은 루크에이스였다. 제법 멀리서 찍었는지 도시위에 있는 커다란 하얀색 나무가 사진 안에 들어 있었다. 눈이 내린 직후에 찍은 새하얀 풍경을 닮은 사진이었다. 테드가 멍하니 사진을 바라봤다. 이 사진 속에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말로는 뭐라할 수 없는, 낯간지럽기도 한 생소한 기분이 느껴졌다.

두 번째 사진은 테드의 기억 속에 있는 곳이었다. 회귀 전에 가본 적이 있는 곳이다. 네메스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 네메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호수. ‘네메스의 눈’이다.

사진 속에는 반짝이는 푸른 호수가 있었다. 바다처럼 넓은 이 호수의 중심에는 동화속에 나올 정도로 커다란 성이 하나 있다. 호수위에 지어진 이 마법의 성은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스템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침입도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시스템이 있는 곳이라 했고, 누군가는 신이 있는 곳이라 했다.

“……이렇게 보니 엄청나네요.”

다음 사진에는 수인족들의 마을이 찍혀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나뭇가지 위에서 낮잠을 취하는 고양이 수인족들이 있었다. 보기에도 평화로운 분위기라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테드가 사진을 넘겼다. 대부분이 테드가 모르는 곳의 사진이었다. 압도될 정도로 굉장한 저택도 있었고, 동그란 구슬같이 신기한 저택도 있었다. 신비롭고 작은 요정이 뛰노는 광경이 담긴 사진이 있었고, 사진으로 보는 것임에도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찍힌 사진도 있었다. 전부다 테드가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사진에는 간간히 알릭이 찍혀 있었다. 혼자 찍혀 있는 사진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 찍혀 있는 사진도 있었다. 사진속의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보다 즐거워 보였다.

테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무심코 사이나와 함께 네메스 대륙을 여행하는 자신을 상상해버렸다.

사진을 모두 봤을 때는 이미 도착하고 난 뒤였다. 마법 폭죽이 어두운 하늘위로 올라가 터진다. 형형색색 빛나며 꽃을 그린다. 폭죽소리는 경쾌했고, 빛은 아름다웠다.

“테드 씨. 같이 사진 찍어도 될까요?”

마법 사진기로 폭죽의 사진을 몇 번 찍던 테드가 물었다. 테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터지는 폭죽을 배경삼아 알릭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내일 떠나신다고 했지요? 저도 알릭 씨의 사진을 봤으니… 하나 정도는 보여드리고

싶네요.”

“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알릭의 만류를 무시하고서 테드가 밤하늘의 한 곳을 가리켰다. 마법 폭죽이 터지는 쪽과 제법 떨어져 있는 곳이다. 알릭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그 순간, 테드의 몸속에 있던 대량의 마력이 단숨에 빠져나갔다.

보라색의 선명한 번개였다 수 백, 수 천 이나 되는 번개줄기가 하늘을 밝힐 정도로 퍼져나가더니 다시 한 점으로 뭉치기 시작한다. 뭉치고 뭉쳐서 준비를 하고 폭음과 함께 다시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루크에이스의 밤하늘 전체를 장식하듯 퍼져나간 그 모습을 루크에이스에 있던 모든이들이 한순간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보라색의 번개는 얼마안가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엄청…… 나네요.”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알릭 씨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시선이 팔린 알릭을 향해 테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알릭이 테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저야말로.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알릭은 다음 여행을 위해 루크에이스를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

에 자신이 쓴 책과 함께 전날에 찍은 사진을 테드에게 선물했다. 사진에는 찍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테드가 한 눈에 보기에도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그 옆에는 테드와 달리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알릭이 있었다.

집안에서 사진을 가만히 보던 테드가 옆에서 식후 간식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나를 바라봤다.

“사이나.”

“예. 주인님.”

“나중에 여행을 하자. 네메스 대륙의 곳곳을 여행하는 거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비한 광경을 보고, 여러 사람과 만나고. 사진을 찍는 거야.”

전쟁을 막은 뒤의 목적이 생겼다. 훗날에 올 그날을 기대하며 테드가 즐겁게 웃었다. 사이나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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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습니다. 순위쟁탈전은 마계에서만 인정됩니다. 테드의 업적은 테드의 것이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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