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54화 (5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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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루크에이스 페스티벌.

정원은 사이나의 관리를 받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루크에이스의 날씨가 날씨다보니 꽃이나 풀 등의 식물을 가꾸는 것은 불가능해도 눈이 쌓이지 않게 정리하는 것은 가능했다.

정원의 앞에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초콜릿 피부위에 파란색 경장갑을 걸친 그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사이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꼬불거리는 검은색 곱슬머리를 눈에 거슬리지 않게 뒤로 쓸어 넘겼다.

“오랜만이군. 사이나 루키페르.”

사이나가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의 이름을 찾는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가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보통의 인물이 아니었다.

“……애시온. 당신도 중간계에 있었습니까.”

애시온 아가레. 94위의 악마.

사이나와는 마계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그와는 형식적인 대화를 몇 번 나누고 헤어진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집으로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잠시 이야기를 하러왔다. 살기를 거둬라.”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이나의 몸에선 살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적의에 애시온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야기를 할 정도로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 굳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사이나의 살기가 한층 더 짙어진다. 애시온은 몸을 긴장시켰다. 그는 사이나의 권능을 알고 있다. 이곳이 마계였다면 애시온은 호전적으로 그녀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긴 마계가 아니다. 중간계에 소환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다. 정식 계약자인 그녀는 아주 조금이겠지만, 자신보다는 제약이 적을 것이다.

“네가 죽인 뮤렌과 관련된 이야기다.”

“……당신도 사탄교였습니까?”

“미리 말해두겠는데, 뮤렌의 복수를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니다. 보고도 없이 멋대로 행동하다 죽은 그녀다. 나는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고 있다.”

애시온은 뮤렌이 사이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곧잘 사이나에 대해 험담했었다. 그래서 우연히 사이나를 발견하고 보고도 없이 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덕분에 루크에이스 지점은 물론이고 대륙에 있는 모든 사탄교가 알려지게 되었다.

“뮤렌을 없앴다는 것은 천마 또한 네가 없앴다는 거겠지. 우리는 너에게 걸린 제약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천마는 마계에서라면 몰라도 제한이 걸려 있는 중간계에서는 애시온도 장담할 수 없는 강자다. 지금 사이나와 전투를 한다면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확률도 얼마 없다. 준비를 해둔 것이 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본론이 무엇입니까?”

“사탄교에 들어와라. 그 또한 너를 기다리고 있다.”

“거절하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과 동시에 사이나의 몸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애시온의 앞에 당도해 허리를 벨 작정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횡으로 베어낸다.

그러나 하얀색의 검은 애시온의 손에 턱하고 붙잡히고 만다.

“생각외로 느리군. 파워도 낮고…. 이 정도론 천마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앞에서 전력을 숨기는 건가?”

천마에겐 오만한 기색이 있다지만, 지금의 사이나와 비교하자면 실력차가 너무 많이 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천마라면 방심했다고 해도 이 정도의 공격이라면 손쉽게 막아낼 것이다.

“…….”

사이나는 대답하지 않고 검을 잡아 당겼다. 쇠와 쇠의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애시온의 손에서 하얀색 검이 빠져나갔다. 전력은 아니지만, 마력을 휘두른 검이었다. 손쉽게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아다만티움.”

“내 권능을 기억하고 있군 그래.”

애시온은 몸을 아다만티움으로 바꾸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다만티움은 금속 중에서도 단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 마계에 있는 때는 온몸을 아다만티움을 바꿀 수 있었으나, 중간계에선 손이나 발같은 한정된 부위밖에 바꾸지 못한다. 거기에 시간까지 제한되었다.

“검을 부술 생각으로 쥐었다만… 그 검도 보통 검은 아니군.”

사이나의 마력이 담겨 있었고, 검의 강도도 레이피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사이나는 애시온의 검은 금속으로 변한 손을 보며 검에 마력을 흘렀다. 푸른빛의 아지랑이가 사이나의 검, 나찰에서 흘러나온다.

이 정도의 출력으로도 아다만티움에 흠 정도는 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애시온의 권능인 아다만티움은 보통의 아다만티움보다 강도가 높았다. 중간계에 있을 때는 아다만티움보다 단단하게 변해 압도적인 방어력을 자랑했다. 단점이라면 그에겐 높은 방어력과 달리 공격 수단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그에겐 아다만티움으로 변할 수 있는 몸의 부위는 한정되어 있다. 아다만티움으로 변하지 않은 몸을 베어내면 그만이다.

사이나가 다시 한 번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그가 양손바닥을 사이나를 향해 내밀었

다.

“잠깐, 잠깐!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나?”

“관심…….”

무심코 대답하던 사이나가 말을 멈췄다. 당연히 흥미 따위는 없다. 그러나 사탄교에 대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테드가 도중에 떠올랐다. 어쩌면 사탄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테드에게 정보를 주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사이나가 검을 살짝 내렸다. 푸른빛 아지랑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만일을 대비해 검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있는 정보군요. 그가 누구죠?”

“너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레온 그레모리.”

그레온 그레모리 32위의 악마다.

애시온은 눈앞의 여인의 무표정이 깨지는 것을 기대했다. 허나 사이나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여전히 재미 없는 여자군. 그레온은 이런 여자의 어디가 좋다고…….”

애시온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미녀를 좋아하는 그레온은 마계에 있을 적에 사이나에게 2번 청혼을 한적 있다. 결과는 모두 사이나의 거절이었다. 애시온이 듣기로

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고 한다.

애시온은 갑자기 머리를 노리고 내려오는 사이나의 검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움직였다. 푸른 아지랑이가 담긴 백색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미친! 정보를 얻자마자 바로 공격이냐!”

사이나는 검을 멈추지 않고서 휘둘렀다. 왼쪽상단을 향해 횡으로 휘둘러지는 검을 향해 애시온이 양팔목을 들어 올렸다. 아다만티움으로 변한 팔목과 사이나의 검이 부딪

혔다. 튕겨나간 것은 양쪽 모두였다.

“진정해라! 그의 전언이 있다.”

“…….”

그의 다급한 외침에 사이나의 검이 멈추었다. 빨리 말하라는 듯이 쳐다보자 애시온이 식은땀을 흘렸다.

“사이나, 그는 네가 계약을 잘못해서 하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와 함께 그에게 간다면 계약자를 죽이고서도 중간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3번째의 청혼은 받아주지 않겠나?’라고.”

“제 대답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이나가 검을 치켜들었다. 애시온이 입을 크게 벌렸다.

“잠깐!!! 그는 네가 거절하리란 것도 예상했다. 거절할 경우… 너의 계약자를 죽이

고 널 마계로 되돌려 보내라고 했지. 알겠나? 너의 계약자에겐 우리측의 우수한 암살자가 붙어 있다. 강제로 마계에 돌아가기 싫다면 우리에게 협조해라, 사이나!”

마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특수한 방법을 사용해야하는 소환 악마와 달리, 계약 악마의 경우엔 계약자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마계에 돌아가게 되어있다.

애시온은 사이나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녀 또한 재미없는 마계로는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님에게 암살자를 보냈습니까?”

“그래. 사탄교가 전력을 다해서 키운 암살자지. B급의 모험가에 불과한 네 계약자는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암살을 하게 지시해뒀다. 자, 계약자를 잃기 싫다면 협조하겠다고 약속해라.”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에 애시온의 두 눈에 당혹감에 물들였다. 눈앞의 사이나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 무표정을 지우고서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웃고 있었다.

명명백백한 비웃음이다.

“B급 모험가를 상대할 수 있는 암살자입니까. 주인님을 어떻게 하고 싶으셨다면… 암살 조직 전체를 보내셔야 했습니다.”

“그게 무슨….”

애시온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사이나의 검이 움직인다.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몸에 잔상이 남을 정도로 움직인다.

그녀는 고대유적 때보다 강해졌다. 정확하게는 테드가 가진 스킬의 랭크가 올라가면서 제약이 풀렸다. 1할에 불과했던 힘이 2할로 늘어났다. 반면에 애시온의 경우엔 제약으로 인해 1할을 조금 넘는 힘밖에 없다.

계약악마와 소환악마의 차이였다.

“……큭!”

애시온은 팔 전체를 아다만티움으로 바꿔 사이나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러나 팔을 타고 몸전체로 울리는 힘의 파동에 신음을 흘렸다.

사이나의 검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움직인다. 그 검은 휘둘러 질 때마다 속도가 빨라진다. 처음에는 애시온의 눈에 확실하게 보였던 검의 궤도가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포착할 수 없게 되었다. 고작해야 검의 궤도를 바꿀 때 속도가 낮아지는 그 틈을 보는 것이 전부다.

애시온은 이를 악물고 검을 막거나 피해냈다. 그레온은 그에게 사이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애시온 또한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다. 마계에서의 사이나는 결코 누군가의 아래에서 하녀 노릇을 할 악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고했고, 잔혹했으며 냉정했다.

“굳이 인간의 하녀 노릇을 하겠다는 거냐!”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검이 멈춘다. 애시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최대한 다음 수를 위해 두뇌를 회전시켰다.

“저는 지금 제 생활에 조금의 불만도 없습니다.”

두근! 커다란 고동음과 함께 심장이 옥죄여왔다. 갑작스런 고통에 바닥에 주저앉은 애시온이 양팔로 뛰지 않는 심장을 향해 양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러나 심장은 여전히 뛰지 않는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사이나의 권능을 떠올리고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마법주머니에 검을 넣고 있었다. 이미 전투는 끝났다는 듯이 약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매만져 깔끔하게 정리한다.

“당신의 능력은 몸을 아다만티움으로 바꾸는 것이죠. 그러나 고작해야 몸의 표면이 전부겠죠. 뇌나 내장을 아다만티움으로 바꾸면 죽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내 심장을…… 지배… 했나…!”

“제 권능은 마력과 정신력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당신은 권능을 제외한 마력의 양이나 정신력은 별 볼일 없습니다. 몸 전체라면 몰라도 한 부위로 한정한 제 지배를 뿌리칠 수는 없습니다.”

“크으… …젠장…!”

애시온의 상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이 뺨을 향해 느껴졌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사이나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한다. 실제로 조금이지만 심장은 움직이고 있다. 다만, 움직임과 동시에 고통을 동반한다.

어지간한 고통이었다면 무시하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가슴속 심장에서 발생된 고통은 몸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간다. 몸이 멋대로 경직해버려 행동을 취할 수가 없다.

상성이 좋지 못했다. 그리고 설마 그녀가 몸내부의 내장까지 지배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하지 못했다.

애시온의 동공이 눈앞에 보이는 검은 구두에 수축된다.

구두는 허공으로 올라가고 애시온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애시온의 머리가 박살난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치킨 커틀릿도 맛있는데… 돈까스 집에선 돈까스만 시키는 편입니다. 굳이 치킨 커틀릿을 먹고 싶을땐 순살 치킨을 자주 시키죠. 순살은 갈릭 소스가 짱입니다.

아미(蛾眉)는 예쁜 눈썹이라는 뜻입니다. 무협소설에 흔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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