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52화 (52/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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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루크에이스 페스티벌.

보물 상자의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텅 비어 먼지 한 톨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보물상자의 내부, 구석구석까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알릭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려 할 때였다.

“이런… 함정이군요.”

테드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명백한 자신감이 서려 있다.

방안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벽에서, 지면에서, 천장에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얀 털을 가지고 있는 인간형의 몬스터다. 무릎 부분이 굽어져 있고, 발이 넓다. 토끼를 인간 사이즈로 늘리고 날씬하게 만든 듯한 느낌의 몬스터, 배틀 래빗이다. 12층에 나오는 녀석들로 힘은 별로 없지만 민첩함으로 덤비는 까다로운 몬스터다.

배틀 래빗이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내며 붉은색의 눈을 빛낸다. 토끼귀가 쫑긋하고 서며 위협하듯 개처럼 으르렁거린다.

테드와 알릭을 중심으로 나타난 숫자만 해도 30이 넘는다. 배틀 래빗이 내뿜는 적의에 알릭의 몸이 살짝 떨렸다.

“……테드씨, 귀환부를 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걸 사용할 필요까진 없어요.”

테드가 자신의 오른손을 들었다. 검은색 장갑, 글로리아는 일전에 천마와 싸우면서 잃어버린 적이 있다. 마성에 빠진 테드는 오른손에 끼인 글로리아를 회수할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아니, 깜빡 잊고 있었다.

그걸 고대 유적을 탐사하는 모험가 길드가 발견하고 테드에게 오른팔을 전해주었다. 다 썩어가는 자신의 오른팔을 받았을 땐 묘한 기분이었다.

테드와 알릭을 중심으로 바닥에 녹색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배틀 래빗들이 몸을 흔들며 갑자기 나타난 마법진에 당혹감을 내보였다.

블레이드 스톰(Blade Storm).

보이지 않는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의 칼날은 허공을 찢어발기며 주변에 미쳐 날뛴다. 테드와 알릭에게는 산뜻한 바람이 느껴지는 정도였지만, 배틀 래빗들에겐 죽음의 바람이었다. 바람을 맞는 부위가 있다면 그 부위는 여지없이 잘려나간다.

10초도 되지 않아 방안에 있는 모든 배틀 래빗들은 마석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알릭이 식은땀을 흘리며 테드를 바라봤다.

“어, 엄청나군요. 마법은 많이 봤습니다만, 이 정도의 마법은 처음 봤습니다!”

“범위계 마법은 어려우니까요.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쓸 수 있을 거에요.”

테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테드처럼 순식간에 캐스팅은 완료해 마법을 발동시키지 못할 뿐이다. 보통의 마법사가 난이도가 높은 범위계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해선 적어도 몇 십초는 있어야 한다.

테드가 떨어진 마석을 줍고 있자, 천장에서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한다. 비밀방의 문은 몬스터를 전부 쓰러뜨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게 되어 있다.

그리고 천장은 전투에 제한시간이다. 제한 시간 내에 몬스터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비

밀방의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 천장에 깔려 죽게 될 것이다.

“빠, 빨리 나가죠!”

화들짝 놀란 알릭이 테드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테드는 여유롭게 마석을 줍고 있었다. 이 비밀방에 있던 몬스터를 단숨에 처리해서 시간은 충분했다.

방안에 있는 인물을 통째로 전이 시키거나, 보물상자를 여는 순간 들고 있는 자를 전이시키는 전이계 함정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이계 함정이 나올 가능성은 10%도 되지 않지만.

계속되는 알릭의 재촉에 테드는 마석을 모두 줍고서 곧장 비밀방을 나왔다. 그들이 나오자마자 입구인 나무문은 미궁의 단단한 벽이 되었다. 알릭이 신기한 듯 벽을 몇 번 두드려보았다. 완전한 벽이었다.

그 후로 테드와 알릭은 빠르게 미궁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몬스터와 맞닥뜨려도 테드의 순식간에 생성되는 파이어 스피어를 맞고 마석이 될 뿐이었다.

“테드씨는 취미가 뭔가요?”

“……취미 말인가요.”

갑작스런 물음에 테드가 작게 되물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 제 취미는 독서에요. 혼자서 여행하다보면 심심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책을 읽지요. 요즘에는 약초와 관련된 책을 읽고 있습니다. 혹시 길을 가다가 약초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가 밝게 웃으며 말하자, 테드가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테드의 이상함을 눈치 챈것인지 알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 아뇨. 단지 전 취미라는 게 없어서요.”

말할 수 있는 취미가 없었다. 매일하는 검술 훈련은 자기 단련이고 가장 자신있는 마법은 특기다. 취미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겐 취미 하나 정도는 있었다. 사이나의 경우엔 요리다. 휴일에 부엌에서 요리 레시피가 적힌 책을 보고 있는 그녀를 본적이 있다. 실제로 요리를 개발할 정도고.

시온은 독서다. 마법서 뿐만이 아니라, 온갖 책을 읽는다. 소설은 물론이고 동물도

감 같은 것을 읽는다.

가장 취미가 없을 것 같은 션에게도 봉사활동이라는 취미는 있었다. 테모험가 길드에서 주관하는 봉사 활동에 시간이 날 때마다 참석하고 있다. 션의 평판은 루크에이스에서 나쁘지 않았다.

카론은 대장장이 일을 한다. 근처 친구가 운영하는 대장간에서 취미로 무구나 도구를 만들고 있다.

무뚝뚝한 브론은 술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다. 돈과 강함에 대한 것밖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 티탄족의 그는 의외로 희귀한 술을 따로 모아두고 혼자서 마시며 즐긴다.

“그럼 테드 씨는 휴일엔 주로 뭐하면서 시간을 보내나요?”

“어, 음. 수련을 하거나… 낮잠을 자는데요.”

휴일에는 거의 대부분을 낮잠으로 시간을 보낸다. 따뜻한 집안의 소파에 누워 있으면 저도 모르게 낮잠을 자고 만다.

낮잠을 자는 시간은 주로 수련을 끝낸 뒤라서 쌓인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2~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좋았다.

“낮잠이라… 좋은 취미네요.”

알릭이 웃으며 말했다. 가식 없는 그 모습에 테드가 눈을 크게 떴다.

“의미 없는 낮잠일 뿐인데요?”

“수인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대부분의 수인족은 낮잠을 즐기는 편이죠. 수

인족 중에선 낮잠이 취미인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낮잠을 좋아하고요.”

“헤에… 수인족들이.”

처음 들어보는 정보였다. 보통 수인족들을 생각하면 동물들이 떠오르기 때문에 활기찬 이미지를 떠올리는 편이다. 테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테드가 알고 있는 대다수의 수인족들은 낮잠보다는 사냥이 취미라는 점이 더 울렸다.

테드와 알릭은 짧은 대화를 끝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제법 흘려 마지막 층인 19층을 둘러보고 있었다. 원래는 20층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20층은 게이트 키퍼가 있는 층으로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테드의 말에 계획은 수정되어 19층으로 정해졌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오랜만이군. 테드.”

테드를 부른 것은 고운 미성의 목소리였다. 테드가 시선을 돌리자 거기엔 수 십 명이 모여 있는 무리가 보였다. 무리의 앞에는 은색 늑대의 수인족인 천랑 캐미솔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감이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테드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테드가 천랑을 향해 거침없이 반말 했다. 몇 달 전에 우연히 중층에서 레드 헥사그램과 실버 울프 클랜이 마주친 적이 있다. 그리고 서로의 목표가 비슷했기에 협력을 하고 미궁을 공략했다. 그 과정에서 테드는 천랑에게 말을 놓게 되었다.

친해진 것은 아니었다. 천랑이 일방적으로 친분을 쌓기 위해 다가온 것뿐이었다. 테드 또한 그녀와의 최소한의 친분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녀는 거대 클랜의 마스터다. 친분이 있으면 나쁠 것 없었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네. 원래는 어제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있어서 말이지. 페스티벌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오고 싶었는데… 조금 늦어버렸군.”

테드가 그들의 복장을 살폈다. 실버 울프 클랜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떡진 머리는 기본이고 휑한 눈에 다크 서클이 땅끝까지 내려앉은 사람도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때가타서 본래의 색깔을 알 수 없을 정도다. 더구나 각각 등에 메고 있는 짐의 양이 엄청났다. 저 가방에는 미궁의 고층에서 얻은 전리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미궁을 내려오는 거야…? 귀환부가 있잖아.”

루크에이스에서 가장 잘나가는 클랜이다. 굳이 귀환부를 아끼며 미궁을 내려올 필요는 없다.

“이것도 수련이라네. 자네도 우리의 목표를 알고 있지 않나?”

“루크에이스의 완전 공략… 인가.”

테드의 말에 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더 없이 진지하게 변한다.

“그리고 조만간… 대규모 원정을 시작할 생각이네. 그러긴 위해선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하지.”

테드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미궁에 집착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흥미도 없었다. 테드의 목표는 루크에이스가 아니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군가. 새로운 파티원인가? 레드 헥사그램은 6명이 정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자네의 파티원들이 없군.”

“의뢰인이야. 간단한 의뢰이기도 하니, 나혼자 의뢰를 하고 있지. 파티원들은 미궁

에 없어.”

알릭이 앞으로 살짝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릭 세르숀이라 합니다. 당신이 그 유명한 실버 울프 클랜의 마스터인 천랑 씨군요.”

“알릭 세르숀… 아! ‘대륙 곳곳’의 저자인가! 이거 반갑군! 그 책은 재미있게 읽고 있네!”

천랑이 호들갑을 떨면서 알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마주 잡은 알릭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 책의 독자셨군요. 이건 비밀인데 3개월 후 쯤에 새로 신간이 나옵니다.”

“그거 참 고마운 정보로군! 꼭 사서 보도록 하지.”

테드가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알릭은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명한 작가 일지도 모른다.

그 후, 천랑은 실버 울프 클랜을 이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테드와 알릭은 19층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넓은 동굴 같은 19층의 미궁은 볼 것이 없었다. 저층의 대부분은 볼 것이 없지만, 중층부터는 늪이나 호수, 사막, 빙하 등이 있는 신기한 미궁이 있다.

“미궁의 몬스터는 신기하군요. 미궁에서 만들어 진다니… 생물로서의 자각은 있는 걸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생각은 할 수 있어요. 미궁의 몬스터는 자신보다 강대하다고 생각되거나 수가 많으면 도망치기도 하지요.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어요.”

미궁의 몬스터 중에선 언어가 통하는 몬스터도 있다. 80층에 있는 게이트 키퍼인 데스 나이트 마스터가 그랬다. 그러나 모험가들을 침입자로서 생각하고 다짜고짜 모험가에게 덤벼든다.

“그리고 몇 번 골려주면 화를 내기도 하죠. 다만, 미궁의 몬스터는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어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먹는 몬스터는 있지만… 대부분의 몬스터에게 식욕은 없어요.”

“생각해보면 미궁은 게임 같군요. 시스템으로 찍어 낸듯한 몬스터와 함정과 보물방까지. 게임에 빠져 있던 제가 네메스 대륙에 환생했다면 십중팔구는 모험가가 되었을 거에요.”

게임 같다는 말에는 테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네메스 대륙은 게임 같은 점이 있었다. 대륙을 관리하는 시스템과 사도들의 스킬창과 능력창 등을 보면 영락없는 게임이다. 괜히 이름 없는 신의 사도들을 플레이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미궁은 지나치게 게임 같았다. 1층으로 전이 시켜주는 귀환부만 보아도 그렇다. 몬스터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타나고, 미궁의 내부의 길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고 함정이 생긴다. 지구에서 환생한 인물들이라면 누구나가 생각할 것이다. 게임 같은 미궁이라고.

“그럼 볼 것도 봤고… 이제 돌아갈까요?”

“예. 미궁을 여행할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또 마법사의 전투를 바로 옆에서 본 것도 새로웠고요. 아, 내일은 절 루크에이스를 안내해주셔야 합니다. 잊어버

리면 안 됩니다.”

“그럼 내일 오후… 1시에 모험가 길드 앞에서 만나도록 하죠.”

당부하는 그를 향해 테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는 불임성 있는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 ⁂ ⁂

테드는 알릭을 데리고 루크에이스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축제 기간이라 사람이 붐벼 그를 도중에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는 모험가 길드에서 여유롭게 테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크에이스를 테드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넓었다. 평소 생각만 하고 있었던 곳도 이번 기회에 가보았다. 분명 1년 가까이를 루크에이스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벤트를 보고 싶다는 알릭을 이끌고, 때로는 알릭에게 이끌려 이벤트에 참가하며 축제를 즐기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없는 테드에겐 신선하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알릭과 함께하는 시간은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즐거워서 어느새 테드가 다음날을 기다릴 정도였다.

축제를 즐기면서 션과 그의 사촌동생을 도중에 만나고, 브론과 카론이 무투 대회에서 탈락한 것을 놀렸다. 그리고 여섯째 날, 오늘 테드는 루크에이스의 광장에 와있었다. 사이나가 출전하는 요리대회의 결승전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광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자가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서서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마법 스크린을 공중에 띄워서 경기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분이 테드 씨의 메이드군요.”

“예. 이번 경기에서 이기고 우승할거에요.”

“믿음이 대단하시군요.”

“사이나의 요리 실력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사이나의 상대는 귀족 출신의 마족 요리사였다. 젊은 그의 이마에는 매끈한 두 개의 뿔이 나있었다. 입고 있는 복장은 새하얀 요리사의 옷이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임시로 설치된 간이 부엌 앞에서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웃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최근 TV에서 요리 프로그램을 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요리 프로가 제법 많더군요. 요리 부분은 제가 잘 모르기에 간략하게만 쓰고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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