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44화 (4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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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성의 남자.

“제법 검술을 사용할 줄 아는 것 같군. 하지만 깊이가 없다.”

순간 천마의 검이 세 개로 변해 테드의 머리, 어깨, 가슴을 노리고 찔려 들어왔다. 그 갑작스런 공격에 숨을 삼킨 테드는 블링크를 이용해 황급히 천마의 앞에서 거리를 벌렸다.

“실용적인 검술인 것은 인정하지. 그러나 제대로 몸에 검술이 배어있지 않군.”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순식간에 테드의 앞으로 따라 붙은 천마가 오른손에 쥔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다. 다급히 양손으로 검을 잡아 에너지 블레이드를 가로로 눕혀 막아낸다.

천마는 비어있는 왼손을 짐승의 손톱을 모방하듯 다섯 손가락의 마디를 굽힌다. 그의 다섯 손가락에 검은색 연기가 맺혔다. 천마는 망설이지 않고 테드를 향해 검강을 막기 위해 무방비해진 몸통에 손톱을 휘둘렀다.

‘블링크…!’

최대한 천마의 곁에서 떨어진 테드가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 코를 타고 내려온다. 천마는 땀을 닦을 틈도 주지 않았다. 검은색의 검기가 테드를 향해 쇄도한다.

테드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두 개의 검기가 테드의 어깨를 스치며 회색 코트를 잘라내며 뒤로 날아간다.

테드는 곧장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검기가 검은색 머리카락의 일부를 자르고 뒤로 넘어갔다.

고개를 숙인 그 자세로 곧장 양발을 지면에서 떼어내 덤블링을 하듯 위로 올렸다. 발목을 노린 검기가 바닥을 쓸 듯이 지나가며 바로 위에, 무릎을 노린 검기가 이어서 지나간다. 재빠르게 바닥에 착지한 테드는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머리 위로 날카로운 검기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지나간다.

‘부스터.’

에너지 블레이드에 마법을 걸고서 앞을 향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두른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천마의 검강이 갉아진다.

“본좌가 공격해 올 것을 예상했나.”

천마가 에너지 블레이드를 뿌리치며 백스텝을 밟았다.

테드는 거친 숨을 내쉬며 굽힌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예상한 게 아니라 미래를 본 것이다. 아주 짧은 미래를 보고 검기를 피해낸 대가로 두통이 찾아왔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살짝 눈살을 찌푸린 테드가 천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십 개의 검은 쇠사슬이 천마를 향해 쇄도한다. 천마는 위로 점프해 그것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천마군림보를 밟지 않은 것은 발아래 지면에서도 검은 쇠사슬이 나왔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군.”

천마군림보의 유일한 약점이자, 규칙. 그것은 파장을 발생시키기 위해 지면에서 발을 떼고 다시 밟아야 한다는 점이다.

검은 쇠사슬은 궤도를 변경해 위로 올라간 천마를 노린다. 천마를 검으로 검은 사슬을 쳐내 방향을 비틀어 피해낸다. 문제는 아래쪽에서 솟아오는 사슬이다.

이 사슬을 밟아서 천마군림보를 발동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젓고 허공을 박찼다. 커다란 파공성이 울리고 천마의 몸이 허공에서 방향을 바꾼다. 방금 전에 검은 사슬에 발이 묶인 순간, 내력이 봉인 당했었다. 아마도 닿는 몸에 닿는 것으로 내력을 봉인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천마군림보가 먼저일지, 검은 사슬의 효과가 먼저일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확인할 필요는 없다.

사슬에서 벗어난 천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직경 1M의 새하얀 마법진이 허공에서 빛을 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플라즈마(Plasma).”

다크 체인은 어디까지나 천마의 시선을 가리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최대한 은밀하게 마법진을 그리고, 천마가 사슬을 회피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기감이 둔해지는 것을 노렸다.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천마가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마법이 발동하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그의 몸은 허공에 떠 있다. 천마군림보를 밟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버스터(Burster).”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하늘색의 빛이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테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만든 흔적을 보았다.

둥근 크레이터가 있었다. 지면을 일순간 소멸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의 마법이다. 호신강기를 펼쳤다고 해도 무사할 리가 없다. 천마는 재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했을 것이다.

테드의 눈이 일순간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앞으로 검은 기류를 몸으로 감싼 천마가 나타나 검은색 검을 휘두른다.

반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팔뚝아래부분이 베어진 테드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아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몸에서 떨어져 고깃덩어리로 변한 오른 손은 부러진 검의 자루를 쥐고 있다. 에너지 블레이드는 마력의 공급이 끊기는 순간 사라졌다.

테드는 비명대신 이를 악물고 블링크를 사용해 거리를 벌린다. 그러나 이형환위의 방법으로 순식간에 쫓아온 천마가 발을 내질렀다. 발은 정확하게 테드의 복부에 꽂힌다. 위장 속에 있던 고기와 피를 토해내며 뒤로 날아간 테드가 볼품없이 바닥을 굴렸다.

“……놀랐다. 설마 호신강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이 있을 줄이야……. 천마신공이 아니었다면 확실하게 죽었을 것이다. 비장의 한 수가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너에겐 안타깝게 되었군.”

천마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류가 사라진다. 그의 왼쪽 어깻죽지엔 있어야할 팔이 없었다.

천마신공의 최후의 비기인 ‘천마령(天魔靈)’이다. 천마가 플라즈마 버스터에 산화하기 직전, 주인의 위험을 한발 앞서 감지한 천마신공이 무리하게 발동시켰다. 그 결과, 약간의 내상을 입고 완벽하게 피하지 못해 왼쪽 팔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한 가지. 물어보자.”

부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테드가 말했다. 마력은 바닥이고 오른팔은 날아갔다. 천마의 발차기 한 방에 내장이 파손되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천마. 네 목적은 뭐지…? 왜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사탄교에 있는 거야…?!”

“……사탄교와는 거래 관계다. 사탄의 피를 얻는 것을 대가로 사탄교의 목적을 돕게 되었다. 본좌의 목표는 이 네메스 대륙에 천마신교를 세우는 것이다. 사탄교는 목적을 이룬 뒤 천마신교의 건설을 도와줄 것을 맹세했다.”

“사탄교의 목적… 그건…….”

비틀 거리는 다리를 되잡고 똑바로 서서 천마를 바라본다.

“사탄의 부활 말인가? 허무맹랑한 소리다만, 본좌로선 계약이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천마가 테드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테드의 눈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베어진 오른팔을 통해 피를 너무 흘린 것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천마의 검의 앞에 검은색의 기류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천마강기(天魔罡氣)를 작은 구슬로 압축한다.

“본래라면 너에게 사탄의 피를 주입했을 것이다만…. 너는 너무 위험하다. 괜한 변수를 만드는 것보다 여기서 처리하는 것이 더 낫겠지. 천마환이라는 기술이다. 너의 마법정도의 위력은 아니지만, 강력한 위력으로 유골을 남기지 않는 면은 똑같지.”

테드는 바닥에 흩어진 먼지를 쓸어담듯이 남은 마력을 쥐어짜내 배리어를 발동한다. 배리어를 중첩시키고, 또 중첩시킨다.

천마환이라는 기술은 발동의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천마는 그대로 천마환을 쏘아냈다. 검은색 구슬이 테드를 향해 날아가 부딪혀 폭발했다.

순간 그곳에 어둠이 찾아왔다. 천마환이 폭발하며 빛을 삼킨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그곳엔 폭발의 흔적으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치웠나.”

천마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약간이지만,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뮤렌이 탐내는 인간에 궁금증이 생겨 초반에 너무 시간을 끌었다. 그 동안 마법사를 얕보고 있었는데, 설마 그런 무지막지한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천마신공이 아니었다면 소멸한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뮤렌에게 갈 생각이었다만. 우선 이 왼팔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천마가 뚜벅뚜벅 걸으며 그곳에서 사라졌다.

⁂ ⁂ ⁂

파티, 황금 들소는 통로의 중간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여기서 선택지가 두 개로 나뉘었다. 계속해서 이어진 통로를 탐색하던가. 지하로 내려가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방금 전 갈림길에서처럼 파티를 나뉘어 탐색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합니까? 지하로 내려갑니까?”

“내려가도록 하죠.”

니클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메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코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보면 꺼리침한 느낌이 목의 뒷덜미를 간질이는 느낌이다.

메리코가 램프를 들고 있는 레인저를 바라보았다. 레인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서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 뒤를 따라 메리코와 니클, 파티원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조금 긴 계단을 내려가자 다시 통로가 나왔다. 위의 쾌적한 통로와 달리 폭이 좁았고 기분 나쁜 습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통로를 조금 걷자 철문이 나왔다. 검은색의 두꺼운 철문을 보며 메리코가 인상을 좁혔다. 고대 유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어쩌면 고대 유적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메리코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니클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여 공감하더니 손으로 철문을 가리켰다.

“일단은 들어가 보죠. 어쩌면 이곳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메리코는 앞에 있는 레인저를 향해 물었다.

“안에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열수 있겠냐?”

“일단은 한번 살펴보죠.”

레인저는 철문의 안에 몬스터나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최대한 인기척을 죽여 철문에 다가간다. 철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문에 귀를 대어 안에 있는 인기척을 확인한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는 적어도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 철문은 잠겨있지 않아 당기면 열려요. 열까요?”

메리코는 대답을 아끼며 니클을 바라봤다. 니클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가 있을지 모르니 준비하고 열어.”

메리코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며 레인저의 뒤로 움직였다. 파티원들이 각자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레인저는 조심스럽게 철문을 당기기 시작했다. 요령이 좋은 것인지 무거운 철문을 당김에도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건.”

철문의 내부를 본 메리코의 입에서 당혹성이 담긴 말이 튀어나왔다. 레인저 또한 표정을 굳히고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그곳은 낡은 조각상들이 가득하리라 상상했던 고대 유적 따위가 아니었다. 3M는 되는 높은 천장에 굉장히 넓은 방이었다. 방의 곳곳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유리관이 있다. 유리관의 내부에는 검은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메리코가 천천히 유리관의 곁으로 다가갔다. 검은색의 액체 속에는 몸을 웅크린 인간이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양 무릎을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피부는 머리카락 같은 체모가 하나도 없고 진한 검은색이다. 골반 부근에는 화살표 모양의 꼬리가 달려 있다. 흡사 악마의 꼬리를 연상시킨다.

메리코가 시선을 옆의 유리관을 향해 돌렸다. 검은색의 액체 안에는 마찬가지로 웅크린 자세의 수인족이 있었다.

“……인체 실험인가. 이건… 우리의 일을 벗어났다.”

메리코가 몸을 돌려 철수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뒤에 있던 니클이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나이프로 메리코의 복부를 찔렀다.

푸욱, 날카로운 나이프는 가죽옷을 뚫고 살가죽이 찢었다. 상황을 파악한 메리코가 재빠르게 검의 손잡이부분, 뭉툭한 품멜로 니클의 머리를 강하게 때려 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니클이 나자빠졌다. 메리코는 나이프를 뽑아내고서 곧바로 니클의 몸을 제압하는 파티원들 사이에 있는 시온을 불렀다.

“……시온! 힐 마법!!”

“알았어!!”

시온이 대답하며 메리코에게 힐을 걸었다. 초록색의 마법진이 나타나 메리코의 복부를 치료한다.

“내장까지 상했어. 치료에 시간이 제법 소모될 거야.”

“그래. 고맙다.”

메리코는 시선을 돌려 파티원에게 제압당해 밧줄로 두 팔과 다리를 묶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니클을 바라봤다. 니클은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메리코를 올려다보고 있다. 입가에는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다.

“……죽여야 돼. 죽여야…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죽여야…. 죽여야 돼…….”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었나. 이 의뢰는 뭔가 잘못 됐군.”

메리코는 천천히 니클을 향해 다가갔다. 검을 들어 단숨에 니클의 목에 검을 박아 넣는다. 니클이 두 눈을 부릅뜨고 메리코를 올려다본다. 입을 벌리며 무언가 말하지

만, 소리대신에 피가 꿀렁이며 튀어나온다.

정신지배를 받고 있는 니클은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검을 빼내 묻은 피를 털어낸다.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난다. 이 의뢰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누군가의 함정일지도 모르지. 길드에 가서 단단히 따져야겠다.”

말을 마친 메리코는 파티원들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가있다는 깨닫고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검은 액체 속에 있는 놈이 붉은 눈을 뜨고서 메리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이 자세를 풀고 양손을 뻗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관이 작게 진동한다.

놈은 유리관을 다시 한 번 두들겼다. 내구성이 그리 높지 않은 유리관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다시 손으로 유리관을 두드리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유리관이 깨

지며 그안의 액체와 놈을 풀어낸다.

“이런 제길! 전부 정신 차리고 왔던 길로 돌아가!”

메리코는 곧장 검을 들고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랫동안 유리관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인지 곧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메리코의 검이 놈의 목을 가른다. 놈의 목에서 검붉은색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더니 검은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목이 잘렸다. 분명히 죽어야 하는 치명상이다. 그러나 놈의 몸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더듬으며 양팔과 양다리가 움직인다.

‘언데드인가? 아니, 언데드라 하기엔 지나치게 생기 있는…….’

생각하면서도 메리코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팔과 양다리를 절단하고 파티원들을 찾았다. 철문을 향해 다가가는 레인저와 파티원들이 보였다. 메리코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철문이 열리며 검이 튀어나와 레인저의 심장을 찔렀다.

“커어엇…!”

레인저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몸이 바닥에 쓰러진다. 열린 철문에서 검은색 장포를 입은 괴한들이 나타나 기습에 당황한 파티원들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메리코는 이를 악물고 파티원들의 가장 뒤에 있던 시온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자신들이 들어 왔던 철문과는 정 반대에 위치한 초록색의 철문이다.

“시온! 적이 너무 많아! 여기서 물러난다!”

“하, 하지만 파티원들이……!”

메리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피한방울이 턱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미 늦었어.”

살짝 고개를 돌려 확인한 뒤에는 파티원들을 모두 학살하고 쫓아오는 검은 옷의 괴한들이 있었다. 인간, 엘프, 수인족할 것 없이 섞여 있는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는 것뿐이다. 아니, 한 가지 더 있다. 그들의 검은 옷의 오른쪽 어깨부위에 날 부분이 아래로 향한 붉은 낫이 그러져 있다. 낫의 자루에는 악마의 꼬리같은 것이 돌돌 말려 위로 향하고 있다.

초록색 문을 당겨 열어 안으로 들어간 메리코는 문이 닫히는 순간 쫓아오지 않고 멈춰서 있는 괴한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꺼림칙한 느낌을 애써 털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책상하나와 의자하나가 있을 뿐인 삭막하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그것도 구석에 존재하고 벽에는 장롱같이 커다란 사물함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공간의 중앙에는 한 명의 사내가 서있었다.

왼쪽 어깻죽지에서부터 팔이 완전히 사라진 사내는 상의가 완전히 날아가 하의밖에 남지 않은 검은색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발치에는 검이 떨어져 있었다.

오른손에는 왼팔로 추정되는 것을 들고 있다. 새하얀 피부색으로 사내의 왼팔이 아님을 눈치 챘다.

천마가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을 향해 붉은색 눈동자를 움직였다.

“…여기까지 왔나. 수고 많았다. 그리고 죽어라.”

천마가 검의 손잡이를 발로 찼다. 미약하게 강기를 머금은 검은 메리코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허공을 날아가 목을 뚫고 벽에 꽂힌다. 검은색의 연기에 감싸인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검은색 강기가 허공에 녹듯이 사라졌다.

두 눈을 부릅뜬 메리코는 양손으로 검신을 잡았다.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생각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이 베어져 피를 흘린다.

메리코는 검을 뽑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시온을 바라봤다. 당혹감과 공포가 섞인 푸른색의 눈동자를 보며 피를 흘리는 입을 열었다. 성대가 파손 되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입을 놀린다.

시온은 처량하게 움직이는 입모양으로 메리코의 뜻을 파악했다.

도망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뒤에는 수많은 괴한들이 있고, 앞에는 왼팔을 잃었지만, 기세가 평범하지 않은 사내가 있다.

시온이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싸우다 죽겠다.

시온의 정면에 붉은색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동그란 원하나 밖에 그려지지 않은 마법진이지만, 빠르게 빛이 새겨지며 마법진을 완성해나간다.

“또 마법사인가….”

천마는 질린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오른 발을 살짝 올려 진각을 밟았다. 천마군림보의 파장이 퍼지며 마법진이 깨지고 시온의 몸속 마력을 뒤흔든다. 시온의 몸이 휘청이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력을 진정시키며 의문을 담은 눈으로 천마를 바라봤다.

천마가 끝장을 내기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순간이었다. 문 너머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니, 비명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유리관이 깨지는 소리도 있었다.

천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밖에 있는 녀석들은 자신에 비한다면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지만, 일반 모험가들 상대로 비명을 내지를 녀석들은 아니다.

‘……누구지? 그 꼬마에 필적하는 실력자가 또 있었나?’

비명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십 몇 초만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 뒤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메리코가 천마의 검에 의해 박혀 있는 초록색의 철문이 천천히 뒤로 밀리며 열렸다.

============================ 작품 후기 ============================

악마 계약에 대한 설정은 뜰에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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