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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성의 남자.
션은 램프를 들고서 조심스럽게 동굴의 어둠속을 해쳐 나갔다. 금속 통로와 달리 돌로 만들어진 통로는 여기저기에 금이 가있거나, 부서진 파편들로 가득하다. 천장에도 금이 가있어 금세라도 무너질 것 만 같았다.
뚜벅뚜벅, 긴장이 서린 발걸음소리가 조용한 통로를 울린다. 미궁의 천장에선 희미하게 빛이 나오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램프가 없다면 옆의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을 것이다.
조용하고 음산한 분위기만을 따지자면 지금 당장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몬스터다.”
선두에 걷고 있던 션이 긴장감이 서린 목소리로 낮게 말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 있던 일행들의 발걸음도 동시에 멈춘다.
션이 조심스럽게 램프를 들어 앞을 비추자 거대한 검은색의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브라처럼 몸을 반 2M 정도 세우고 있는 그것은 황금색의 섬뜩한 눈동자로 조용히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 따윈 한 번에 삼켜버리고도 남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였다. 언뜻 보이는 몸의 길이만 해도 10M가 넘어가고 폭은 1M 정도다.
“……바실리스크다. 될 수 있으면 눈을 마주치지 마라!”
션이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브론이 앞으로 나서 션의 옆에 섰고, 카론이 중위를 맡았다. 사이나는 후위에 있는 테드의 옆에서 호위하듯 지키며 아공간주머니에서 새하얀 검, ‘나찰’을 꺼냈다.
이게 레드 헥사그램의 기본 전투 진형이다.
“리더, 어떻게 하지? 도망칠까?”
션이 물었다. 바실리스크는 눈이 마주치면 마비 효과를 거는 귀찮은 몬스터다. 비늘 가죽은 단단하고 이빨에서 흘러나오는 독은 10초 안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독이다.
“설마. 고작 이 정도의 몬스터한테서 도망치면 모험가라는 직업도 때려 쳐야지.”
테드의 정면에 불꽃의 창이 순식간에 만들어져 바실리스크를 향해 날아간다. 바실리스크는 가볍게 몸을 왼쪽으로 기울인다. 화염창은 그대로 바실리스크를 통과하고 허공에서 사라진다. 벽과 부딪힐 경우 통로가 무너질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기에 일부러 테드가 화염창을 허공중에서 소멸시킨 것이다.
바실리스크가 가소롭다는 듯이 테드를 바라봤다. 황금색의 눈과 테드의 검은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테드의 몸은 굳어지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사안(邪眼)은 정신을 자극해 본능적인 공포심을 일으켜 몸을 마비시키는 최면효과를 가지고 있다. 즉, 정신계 공격이라는 뜻으로 《평화의 가호 (The Blessing of peace)》스킬을 가지고 있는 테드에겐 정신 공격은 전혀 해가되지 않는다.
바실리스크가 달려드는 션과 브론을 향해 거대한 꼬리를 휘두른다. 약간 꼬리를 치켜드는 것으로 준비동작을 보이고 빠르게 허공을 가른다. 꼬리의 속도를 빨랐지만 준비동작이 느리다. 피하는 것은 쉬웠다.
션과 브론의 틈사이로 중위에 있던 카론이 앞으로 나서며 할버드를 휘둘렀다. 거대한 할버드가 바실리스크의 몸에 할버드의 날카로운 날이 닿기 직전, 바실리스크의 몸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땅을 기듯이 몸을 낮추며 재빠르게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다.
“이런 젠장!”
카론의 악다문 입에서 분통함이 담긴 목소리가 흘려 나왔다.
천장을 땅처럼 기어 움직여 후위에 있는 테드를 향해 떨어지며 입을 쩌억 벌린다.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초록색의 독물이 뚝뚝 흐르는 두 개의 송곳니가 테드를 노린다.
붉은색 코트 자락이 허공중에 살짝 흔들린다. 백색의 검이 은은한 푸른빛의 궤적을 그리며 검기를 내뿜는다.
검기는 바실리스크의 미간을 자르고 그대로 이어지듯 몸통을 일도양단한다. 반으로 나뉘어 바닥에 떨어진 바실리스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다. 그 황금색 눈동자는 색을 잃고 검은색으로 변한다.
“리더!!”
그르릉 거리는 무거운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린 순간, 션과 카론이 동시에 소리쳤다. 흠칫 놀란 사이나가 재빨리 자신의 옆을 보았다. 벽이 쿵하고 닫힌다.
테드가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벽으로 다가간 션과 카론은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쿵쿵 하고 울리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젠장! 벽이 열리고 양팔이 나와 리더를 끌고 갔다! 이런 비밀 통로가 있을 줄은 몰
랐는데!”
션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제서야 대충 상황을 파악한 사이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키십시오.”
등골이 오싹해지는 싸늘한 목소리에 션과 카론이 반사적으로 벽에서 떨어졌다.
사이나는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쾅! 도저히 검과 벽이 부딪혔다는 소리라고 할 수 없는 효과음이 울린다. 벽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떨어지고 그 내부에 있는 금속의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속의 벽은 사이나의 검을 정면으로 맞고서도 흠집하나 없다. 신경질을 부리듯 금속 벽을 몇 번 치고 난 뒤에 진정한 사이나가 션을 향해 물었다.
“……양팔이라고 하셨지요. 혹시 여성의 팔이었습니까?”
“…어? 음. 확실히 남자치고는 가늘고 매끈한 여성의 팔이었다.”
빠드득, 느닷없이 들린 이가는 소리에 깜짝 놀란 션이 주위를 살폈다. 브론과 카론이 휘둥그레 뜨고 사이나를 보는 것으로 그녀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음을 깨달았다. 사이나의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무표정이란 점이 무서웠다.
“우선 리더를 구해야 하는데…….”
션이 중얼거렸다. 문제는 어떻게 구해야하느냐는 점이다. 주위를 살폈다. 사이나는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알 수 없고 카론과 브론은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다.
미궁에선 이런 돌발 상황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또 전이 함정에 걸려 파티와 흩어지게 되었을 경우 무리하지 말고 귀환부를 이용해 돌아가는 게 정해져 있으나, 이곳은 미궁이 아니다. 귀환부를 사용할 수 없다.
션이 카론과 브론을 살폈다. 모험가 경험으론 그들이 가장 많다. 그 경험으로 리더 대리로서 행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상외의 상황에 굳어져 있는 몸을 보자면 믿음이 쉽게 가지 않았다.
션의 시선이 사이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테드 다음으로 강하다. 아니, 정확한 실력을 알 수 없다. 어쩌면 테드 보다 강할지도 모르는게 션의 생각이었다. 살벌한 기운을 풀풀 뿜어내고 있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리더 대리는 그녀에게 어울리지도 모른다.
션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에서 테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텔레파시 마법이다.
[우선 진정하고 들어.]
모두의 몸이 움찔하고 반응했다.
⁂⁂⁂
은밀하게 열린 벽에서 양손이 뻗어와 테드의 입과 몸을 감싸고 뒤로 끌려들었다. 반응하기도 전에 벽의 문은 자비 없이 닫혔다. 테드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자신의 등을 감싸는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다. 입을 가리고 있는 손은 거칠기보다는 부드러웠으며 그리 크지 않았다. 등 뒤의 인물이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떨어지는 와중에 몸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몸을 감싸고 있는 양팔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강화되지 않은 육체로는 벗어날 순 없다. 테드는 조용히 자신의 몸에 마법을 걸었다. 힘 강화(Strength), 내구 강화(Iron Skin), 신체 강화(Bless).
세 개의 버프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었을 무렵이었다. 지면을 밟는 소리가 들리며 떨어지는 몸이 멈춘다. 재빠르게 블링크를 사용해 알 수 없는 인물의 품에서 벗어난다.
“어머.”
약간 놀란 감정이 서린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본적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가슴의 유두 부분과 사타구니 부분을 은밀하게 가린 검은색 본디지 가죽옷을 입고 있다. 허벅지의 절반까지 가리는 착 달라붙는 검은색의 굽이 높은 부추를 신은 그녀는 요염하게 웃으며 테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전에 테드의 꿈에 침입한 적이 있는 몽마. 뮤렌이었다.
테드는 그녀를 노려보며 검지와 중지를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하얀색의 마법진이 관자놀이 앞에 생겨난다.
다행히도 사이나의 코트에 남겨둔 표식을 따라 발동한 텔레파시 마법은 정상적으로 발
동되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모양이다.
“우선 진정하고 들어.”
“나는 무시하는 거야? 너무 차가운 걸. 눈물 날 것 같아.”
뮤렌이 입으로 훌쩍훌쩍 소리를 내며 검지로 눈가를 문지른다. 테드는 싸늘한 눈으로 그 꼴을 지켜보았다.
[리더? 무사했나!? 지금 어디에 있지?]
션의 목소리가 들린다. 속사포처럼 물어보는 말을 보면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그냥 알아들어. 이 의뢰 자체가 함정이야.”
[……의뢰 자체가 함정이라고?]
테드는 눈앞의 여자, 뮤렌을 보며 확신했다.
고고학자인 니클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은 아마도 그녀에게 유혹당한 상태였다는 점일 것이다. 마계에 있을 때보다 약한 권능이라곤 하나 전투능력이 없는 평범한 고고학자 정도는 쉽게 유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이용해 모험가 길드에 던전을 알렸고, 테드와 메리코를 끌어들였다. 주된 목적은 자신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목적은 사이나 일지도 모른다.
“사이나. 지금 당장 모두를 데리고 돌아가. 갈림길의 입구에 흔적을 남기고 이 던전
에서 벗어나.”
[……알겠습니다. 주인님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지?]
“나는 눈앞의 몬스터를 죽이고 따라 갈게.”
“몬스터라니… 너무 하다. 정말.”
또각, 하고 구두 소리가 울린다. 뮤렌의 다리가 움직인 동시에 테드의 앞에 붉은색의 마법진이 그려지며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당장 쇄도하겠다는 듯이 불을 일렁이며 위협한다.
뮤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알았어. 기다려 줄게. 얼른 통화 끝내.”
[잠깐. 리더! 황금 들소 일행은 어떡하고?]
션의 말이 들렸다. 그의 정의로운 성격이라면 위험에 처해 있는 황금 들소 파티를 도우러 움직일 것이 틀림없다. 테드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입구에 흔적을 남기고 던전을 벗어나. 구할 생각 따윈 하지 마. 이미 한참이나 늦었을 테니까.”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구하러 가서 전부 죽을 셈이냐?! 착각하지 마, 션! 우린 기사가 아니야! 일개 모험가 파티일 뿐이야! 운이 좋으면 메리코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있어! 확실하지 않은 일에 위험한 곳으로 너희들을 보낼 순 없어! 이건 파티 리더로서 명령이야!! 던전에서 벗어나!”
일순간 메리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테드는 주먹을 꽉 쥐고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낸다. 친구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잔정이 들었다. 테드 또한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은 파티리더다.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냉정하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의 어깨에는 네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한순간의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사라질 수 있는 가볍고도 무거운 책임이다.
[……알겠다.]
어쩌면 이것으로 인해 션과의 관계가 틀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션의 바람을 들어주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테드가 텔레파시 마법을 끊으려는 순간이었다. 사이나의 말이 들려왔다.
[주인님. 뒤의 통로가 무너져 막혔습니다. 치우기에는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통로가 무너졌다고?!”
와락 인상을 구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뮤렌을 노려봤다. 파이어볼을 지금 당장 날리고 싶은걸 필사적으로 참는다. 아직 전투를 벌일 때가 아니다.
[리더! 처음 보는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
션이 다급하게 말했다. 레인저 아카데미에선 몬스터에 대한 정보도 교육한다. 수석인 션의 머릿속에 없는 몬스터라면 보통 희귀한 몬스터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생겼는데?”
[생긴건 제각각이다. 인간, 엘프, 수인… 트롤이나 고블린 종류의 몬스터도 있다. 다만, 전부 피부가 새까맣고 눈이 빨갛다. 허리부근에는 악마 같은, 가느다란 벡터 모양의 꼬리가 있다.]
테드의 얼굴이 굳어진다. 기억에 있는 생물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 나오는 녀석들이 아니다. 테드의 기억으로는 지금부터 적어도 6년은 대륙에 나타나지 않을 놈들이다.
“데비크다. 머리를 잘라도 시간만 있으면 재생하는 언데드 같은 놈들이야. 심장을 노려. 그럼 움직이지 않을 거야.”
“데비크를 알고 있어? 우와, 정보는 확실하게 차단했는데. 어떻게 알았데?”
뮤렌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테드는 그녀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지시를 내린다.
“사이나. 놈들을 죽이고 일행을 지키면서 앞으로 나아가. 위치가 발각 됐어. 그대로 멈춰서 있는 건 더 위험해.”
[알겠습니다.]
사이나의 대답을 듣고 텔레파시를 끊는다. 그리고 곧장 뮤렌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그러나 파이어 볼이 그녀에게 닿기 직전 날카로운 바람이 날아와 화염구를 쪼갠다. 바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쪼개진 화염구를 계속해서 베어낸다. 그 조각까지 전부 베어내 화염구를 사라지게 만든다.
“뮤렌. 이 꼬마가 네가 소개시켜 주고 싶은 녀석이냐?”
기척없이 나타난 것은 중년 남성이었다. 인간인 그는 검은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다.
양손은 뒷짐을 지고 있다. 뒷짐 쥔 손에는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고 있는 검을 똑바로 세워 들고 있다.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단단히 묶어 고정시킨 그는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무협지 속에서 나온 무인 같은 사내였다. 테드는 힐끗 그의 가슴팍을 바라봤다. 십자가처럼 생긴 붉은색 낫이 역으로 서있다. 낫의 붉은 날은 아래쪽으로 향해 있고, 자루엔 악마의 꼬리가 빙글빙글 말려 위로 향하고 있다.
테드는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사탄교…….”
============================ 작품 후기 ============================
카프리안님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저도 주인공의 성격과 태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판단해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