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40화 (40/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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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성의 남자.

사파이어 드레스라는 명품 의류점에서 몇 개의 의류를 더 구입하고 밖으로 나왔다. 사이나는 코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메이드복 위에 걸치고 있다. 테드는 괜히 뿌듯해졌다.

가게를 나왔을 땐,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사이나가 만족하는 옷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둘러본 결과였다. 워낙 옷걸이가 훌륭하니 전부가 어울렸으나, 그녀는 꼼꼼히 옷을 살피며 구입했다. 직원의 설명과 추천을 듣고 있자니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했다.

점심은 가까운 식당에서 외식으로 해결했다. 사이나가 좋아하는 매운 닭갈비로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왔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그녀는 테드를 확인하자마자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몸과 반대로 골반쯤에서 삐죽 솟아나온 하얀색 늑대 꼬리는 경계하듯 쭈뼛거리며 곤두서있다.

피나 키틴, 실버 울프 클랜의 간부인 그녀는 과거 클랜 워에서 테드에게 처참하게 당한 적 있다. 그날 이후 마주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피나는 긴장한 얼굴로 테드를 보고 있었다. 테드가 손을 살짝 움직인다. 피나의 몸이 크게 움찔하고 떨렸다.

‘두려워하고 있나.’

테드가 쓰게 웃었다.

그건 결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행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경기였다. 피나가 경계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오랜만이네.”

테드가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피나는 잠시 눈치를 보듯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랑은 할 말 없으니까. 비켜.”

클랜은 정기적인 미궁 공략을 제외하곤 파티 단위로 활동하는 게 많다. 고층의 공략은 돈이 되지만 그만큼 모험가의 체력과 정신을 갉아 먹는다. 매일 할 정도의 짓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클랜 내에서 파티를 나누어 미궁에서 활동한다. 피나가 미궁이 아닌 번화가에 있는 이유는 그녀가 속한 파티의 휴일이 오늘이기 때문이다. 피나의 입장에선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그거 참 서운할 정도로 차가운 반응이네.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어?”

피나는 테드가 말하는 ‘그 녀석’이 자신의 오빠, 키노 키틴임을 알았다. 어떤 의도로 그걸 묻는 것일까? 그녀의 의문과 관계없이 테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애초에 그의 근황 따윈 궁금하지도 않다.

“잘 지내고 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의 오빠는 클랜 워가 일어나기 전처럼 지내고 있다. 변한 것은 틈만 나면 수련에 몰두한다는 점이 전부다. 최근에는 마법사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는 책을 읽는 것을 봤다.

“미궁의 80층대를 공략할 예정이라며? 엄청 바쁘겠네.”

“……예정일뿐이야.”

실버 울프 클랜은 1년전 이맘때쯤에 미궁 80층대를 공략한 적이 있다. 피나는 참가하지 않은 공략이다. 총 83층까지 공략하는 기록을 세웠지만, 그에 비례하듯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간부도 몇 명 죽었고 그 이상으로 일반 클랜원들이 죽었다. 그리고 한 달 전쯤 천랑은 80층대를 공략할 것이라고 선언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날짜는 잡혀 있지 않다. 예정일뿐이다.

피나는 요 근래 사사건건 참견하는 마스터를 떠올렸다. 수련시간을 대폭 늘려버린 것도, 클랜원의 상태를 직접 파악하는 것도 전부 80층대 공략을 위해서 일 것이다.

“그리고 너랑은 상관없잖아? 우리 클랜도 아니면서.”

“그 말대로야. 뭐, 루크에이스의 모험가로서 응원하고 있으니 힘내라고.”

입구를 막고 있으면 다른 손님들에게도 민폐인지라 재빠르게 비켜주면서 말했다. 솔직히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다. 피나는 눈에 띌 정도의 경계를 보이고 있다. 이대로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봤자 서로 피곤할 뿐이다.

인사도 하지 않고 식당의 안으로 홱 들어가는 피나를 보며 테드는 볼을 살짝 긁적였다.

그 후로, 테드와 사이나는 적당히 번화가를 어슬렁거렸다. 도중에 당구장을 발견해 사이나와 당구를 조금 치고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갔다. 육체적 스펙의 차이 때문인지 당구는 완패 당했다. 강성운의 당구 경험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 ⁂ ⁂

운이 나쁘게도 루크에이스의 하늘에선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당장 집에 돌아가 이불속에서 농성을 치르고 싶을 정도의 날씨였다.

“모두 모여 주셨군요.”

루크에이스의 북쪽 입구에 모인 파티, 레드 헥사그램과 황금 들소를 향해 한 중년인이 말했다. 그의 검은 머리 정수리 부분에 작지만 확실하게 솟은 뿔이 있었다. 마족이다. 검은색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는 사람 좋게 웃었지만, 테드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의 표정은 무언가 위조적인 느낌이 들었고 검은 눈동자는 초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

“모험가 길드 소속의 고고학자인 니클 제리자리입니다. 니클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자기소개를 한 그는 주위에 모인 인물들을 학인 했다. 레드 헥사그램의 5명과 황금 들소의 6명. 모두 있다. 빠진 사람은 없다.

“그럼 무언가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신 분 있습니까?”

갈색망토로 몸을 감싼 메리코가 앞으로 나섰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가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것은 색이 조금 바래서 낡은 느낌이 들었다. 적잖은 경력의 증거다.

“질문해도 괜찮으신지?”

“예. 부디.”

“던전의 위치를 보면 여러 가지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길은 정해져 있습니까?”

길이라고 불릴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 길도 던전이 있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 중간부터는 길도 없이 눈 쌓인 곳을 해치며 걸어야 한다. 빠르게 갈려면 길을 무시하고 곧장 일직선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빠르게 가고 싶습니다만…, 그건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저도 우연히 발견한 던전이라 길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모험에 관해선 전문가인 여러분들이 저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요.”

“그럼 중간까지는 길을 따라 이동하다가 던전으로 빠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기다렸다는 듯이 메리코가 말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준비해온 것이 틀림없다. 고고학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고고학자가 억지를 부렸다면 안전성을 위해서라는 뭐니 하는 말로 구워삶을 준비도 했을 것이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또 다른 질문자가 없는지 무언으로 물었다. 테드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 말하는데요. 던전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어요.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탐색이니까.”

괜히 던전에서 특이한 물건을 발견했다고 머물게 되면 곤란하다. 던전 탐색에 허락된 시간은 기껏해야 반나절뿐이다. 그 이상의 경우에는 손해가 된다.

“알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탐색일 뿐이죠. 고대 유적의 발굴은 제 일이 아닙니다.”

니클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별다른 질문은 없어요.”

시간을 많이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행은 곧바로 출발했다. 눈이 쌓인 길을 뿌득뿌득 걷는다. 길을 걷는 도중 대화는 없었다. 시끄러운 카론과 션도 체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걷고 있다.

가장 앞에 걷는 자는 황금 들소의 레인저인 사내다. 루크에이스는 극악한 환경 탓에 몬스터가 적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레인저인 그가 앞장서서 살피는 것이다. 내일은 레드 헥사그램의 레인저인 션이 저 자리를 대신

할 것이다.

테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걷고 있었다. 루크에이스의 북쪽은 하얀 사막과도 같았다.

모래 대신 눈이 쌓인 사막이다. 길의 옆에는 테드의 허리부근까지 오는 짙은 남색의 막대로 길을 표시하고 있다. 주변이 눈으로 새하얗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박혀 있다.

막대가 눈으로 덮이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길드에서 의뢰를 내어 모험가를 이용

해 눈을 치우게 만들어 길을 확보하는 경우가 있었다.

테드가 멍하니 우중충한 하늘과 새하얗게 눈 덮인 지면, 하늘에서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걷고 있자, 황금 들소가 있는 장소에서 작은 망토가 다가왔다. 그래봤자 테드보다 컸다.

“테드 크루시안.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답해주지 않을래?”

망토에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려 나왔다. 초면에 반말이었으나, 목소리에 담긴 기품이 무례함을 상쇄시켜 준다.

테드가 힐끗 망토 안을 살폈다. 금빛 머리카락과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무언가 졸린 듯한 눈매를 한 여자였다. 나이는 대략 10대 후반으로 보였으나, 이 세계에선 겉모습만으로 섣불리 판단하면 큰코다친다.

“말할 수 있는 거라면.”

“마법에 관한 이야기야. 민감한 이야기이니 대답하기 힘들다면 말해줘. 깊이 묻지 않을게.”

마법사에게 마법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검사에게 자신의 검술이 특별하듯, 마법사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시온 잔메이든, 뱀파이어 마법사야.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는지 가르쳐 줘.”

“…….”

푸른색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을 품고서 다짜고짜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테드가 대답하기 애매한 말이었다.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 자신처럼 전장에라도 나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질문이 뭔가 잘못 됐네. 나는 현재 정체되어 있어. 내가 본 마법사중 가장 강한…… 당신의 조언이 필요해.”

마법사는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고 어떤 유명한 마도사가 말했다. 시온이 불안한 것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실력이다. 언제부터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최근에는 마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초조하게 된다. 이대로 자신의 실력은 영원히 멈춰버리는 것이 아닐까.

“몰라.”

테드는 잠깐의 생각 끝에 툭 내뱉듯이 대답했다. 강해지는 법? 마법사의 정체기에서 벗어나는 법? 전혀 모른다.

테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졌다.

그리고 이후엔 죽이기 위해서 강해졌다.

평범한 방법으로 강해지는 법이라곤 수련을 하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로 그녀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수련이라도 하지 그래?”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테드의 말속에는 흐릿한 불쾌감이 실려 있었다.

시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는 이름도 모르는 타인이다. 이 정도의 대답은 예

상하고 있었다.

“……그럼 마법사로서 정보를 교환하지 않겠니?”

“네가 손해 일 텐데?”

테드의 말에 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로서 실력이 뛰어난 것은 그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이 손해야.”

“난 마법 연구 따윈 하지 않으니까. 마법에 대한 역사도 잘 몰라.”

스승에게 배웠던 것은 조금 더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비전 마법정도다. 마법의 발전 역사는 물론이고 연구에 대한 정보도 거의 모른다. 솔직히 다른 마법사가 어떻게 연구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마법을 만들어낸 종족은?”

“마법이니까. 악마 아니야? 악마의 후예라 하는 마족이 선천적으로 마력이 높잖아.”

시온이 입을 살짝 벌렸다. 혹시 몰라 시험삼아한 질문에는 예상 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자신을 놀리는가 싶어 얼굴을 살폈다. 놀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진지했다.

“마법의 시초는 레칸이라는 종족입니다. 본래 중간계의 주인이었던 종족이죠. 창조주의 기적을 모방해 만든 것이 마법이다. 그들의 마법을 고대 마법이라고 하죠.”

테드의 뒤에 있던 사이나가 대답했다. 그녀는 테드와 만나기 전에 독서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 실력은 테드의 발끝도 미치지 못하나, 지식 면에선 반대로 압도하고 있다.

“레칸?”

“레안족의 선조입니다. 그들이 가진 ‘세번째 눈’은 레칸족의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레안 족이 유일하게 레칸에게서 물러 받은 특징이죠. 레칸은 마력과 성력과는 다른 특별한 힘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시온이 재빠르게 끼어들어 말을 이었다. 사이나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레칸의 그 힘은 마력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어. 그렇기에 고대 마법 중의 일부는 마력으로도 발동되기도 했어. 그러나 대부분의 고대 마법은 마력으론 발동 되지 않아.”

“악마는 그들의 마법을 모방한 것입니다. 그래도 완벽하게 모방하지 못했기에 고대 마법에 비한다면 위력도 현저히 떨어집니다.”

“천사는 그런 악마의 마법을 대항해 성법을 만들어 냈어.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쉽게도 마족과 천족, 인간과 수인족 등이 나타 나기전의 일이라 자세한 기록은 없어.”

“제가 본 책에 의하면 그 시절 중간계에는 신이란 것들이 존재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레칸의 적이 되었고, 고대 마법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신이 멸망하자 분노한 창조주 제울이 레칸을 멸종시켰어. 레안족은 창조주의 아주 약간의 자비로 레칸족의 흔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종족이야. 그리고 창조주는 또 다른

종족, 천족과 마족들을 창조했지.”

“중간계의 주인인 레칸이 없어지자 악마와 천사는 중간계를 차지하기 위해 나타나 전쟁을 치렀습니다.”

“악마와 천사의 오랜 전쟁의 결과가 대성전. 현재 네메스 대륙의 절대자인 시스템의 출현이야.”

테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서로 경쟁을 하듯 앞 다투어 말하고 있다. 묘한 기백에 밀려 설명의 대부분은 전혀 귓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워,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라고.”

테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중재에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소환에 실패하였습니다. ……농담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비축분이 아슬아슬합니다. 제가 작문을 하는데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리는 편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퀄리티를 유지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게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결론은 언젠간 연참을 할 것이나 지금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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