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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38화 (3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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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성의 남자.

잠에서 깬 테드는 무심코 상체를 일으키려다 오른쪽 팔에 무게가 느껴지자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작은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며 잠들어 있는 사이나가 보였다. 팔뚝과 팔목사이의 팔꿈치 부분에 머리를 대고 있어 빼내기도 뭣하다.

그녀는 얼굴을 테드를 향한 채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껴안지 않아서 다행이다.’

자신의 고약한 잠버릇을 떠올린 테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사이나가 먼저 깨어나 그를 깨워주는 식이였기에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민폐를 끼치는지 알 수 없었다. 테드는 뒤늦게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의  왼쪽 다리가 걸쳐져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슬그머니 발을 내렸다.

잠시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지나치게 좋은 테드의 눈은 방안의 어둠도 문제없이 투시해 사이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처럼 무방비한 사이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면 중에도 불구하고 은색의 머리카락은 비단결처럼 부드러워보였다. 머리색과 같은 백은색의 기다란 속눈썹은 인형 같았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콧날과 붉은 빛이 감도는 입술, 전부가 테드의 시선을 붙잡아 구속한다. 목 아래 부분까지 이불이 덮여 있어 밑은 보이지 않았다.

자장가 같은 그녀의 숨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문득 꿈속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사이나를 조심하라고? 웃기는 소리다.

사이나가 없었다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테드는 싸늘한 집안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가구도 없고, 여기저기 어질러져있는 돼지우리라 해도 믿을 정도로 더러운 집.

사이나와 만난 날이 지난 해 10월이고 지금이 4월이니 반년 간 사이나와 이 집에서 생활했다.

다시금 떠올리면 그녀를 부려먹은 기억밖에 없다. 만만치 않은 집안일은 전부 혼자서 하고 있다. 미궁을 공략하면서도 빠짐없이 하루 세끼를 준비한다. 완벽한 메이드다.

테드가 사이나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이나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더니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갔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멍해 보인다. 조금 풀려 있는 그녀의 붉은색 눈동자에 테드의 얼굴이 비친다.

“……오늘은 상당히 빠르게 기침하셨군요.”

그녀는 그대로 테드의 팔을 베고서 평소처럼 말했다. 무뚝뚝한 목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꿈에서 서큐버스를 만났어.”

“……그건 제 불찰이군요. 근처에 서큐버스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무섭게 굳어지는 표정에 테드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어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자신의 행동에 흠칫 놀랐을 땐, 사이나의 굳은 얼굴 표정이 풀어지고 난 뒤였다. 아무 말 않는 그녀를 보며 손을 빼려는 순간이었다.

“만지셔도 괜찮습니다.”

허공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왼손은 이윽고 다시 그녀의 머리를 향해 움직였다. 테드의 손은 조심스럽게 사이나의 앞머리를 만지며 서서히 정수리 쪽으로 움직였다.

루크에이스 특유의 차가운 기온 때문인지 시원한 물에 손을 넣은 기분이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이렇게 부드럽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서큐버스에게 무슨 짓을 당하진 않으셨나요?”

정신의 대부분을 왼손에 집중하며 대답한다.

“아무것도. 그저 대화를 조금 한 게 전부야. 이름이 뮤렌이였나. 너를 알고 있던 모양이던데.”

“……그녀는 저와 같은 악마입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마계에서 그녀의 대한 이야

기가 들려오지 않았었군요. 중간계에 소환되었을 줄이야. 전혀 몰랐습니다.”

“너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던데. 사이가 좋지 않아?”

“그녀의 욕망은 유희(遊戲)입니다. 한 번은 저를 유희대상으로 삼으려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만, 간단히 쫓아냈습니다. 힘으로 따지자면 마계 내에서도 약한 편에 속합니다. 가지고 있는 권능인 유혹을 이용해 여기저기 장난을 쳐서 마계에서 그녀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습니다.”

“유혹이라… 위험한 능력 아니야?”

“저의 권능, 지배의 하위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 대단할 정도의 권능은 아닙니다. 그녀는 주로 몸을 이용해 남성 악마를 유혹해 꾀어내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악마는 그녀의 유혹을 아무렇지 않게 뿌리쳤었고, 권능도 약해졌을 터니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없습니다.”

“……아.”

사이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왼손을 빼려는 찰나, 손가락에 걸린 머리카락에 살짝 놀라 손바닥이 사이나의 뺨에 툭하고 떨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만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몇 초 정도 의식 없이 사이나의 뺨을 쓰다듬던 테드가 화들짝 놀라 다급히 손을 뗐다.

“……싫다고 말했으면 바로 그만 뒀을 거야.”

그녀가 싫은 소리 따윈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민망해진 테드가 어물거리며 말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만지셔도 상관없습니다.”

사이나가 슬쩍 몸을 움직여 테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가 팔꿈치에서 팔뚝으로 이동해 얼굴 사이의 거리가 확 줄어 주먹하나가 겨우 들어갈 짧은 거리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이불속, 테드의 티셔츠 위로 사이나의 양손이 슬그머니 허리로 올라간다. 테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만.”

테드의 말과 함께 허리에 있던 손이 사라졌다. 테드는 무표정한 얼굴의 사이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육체적 관계를 바라고 있는 걸 오래전부터 깨달았다.

어린아이의 몸이지만 남자인 테드 또한 작은 성욕을 가지고 있다. 사이나의 무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도 이유 중 하나지만, 사이나의 의도를 완전히 모른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자신을 사랑해서? 아니, 사이나의 반응을 보자면 결코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테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노예이기 때문에? 사이나는 완벽하게 메이드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메이드 보다는 노예로서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성처리를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관계를 가지면 무언가 이득이 있나? 테드가 생각하기에 사이나가 얻는 이득은 없었다. 오히려 처녀인 순결을 잃는 것이니 손해면 손해다. 그녀가 가진 성욕 때문일까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사이나의 욕망은 영혼이다. 육체적인 욕구인 성욕과 관련될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또 나쁜 버릇이 생겼어.’

테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틈만 나면 상대의 의도를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상대가 선의를 베풀며 그 이유를 찾고, 악의를 저지르면 그 목적을 찾았다.

“잠도 오지 않고… 이르지만 슬슬 일어날까.”

“그럼 아침을 준비하겠습니다.”

상체를 일으켜 이불을 걷은 사이나가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테드가 잠에서 일어날 때마다 매번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사이나였기에 당연히 메이드 복을 입고 잠을 자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옷감이 얇은 검은색의 언더웨어 캐미솔이다. 브라 부분은 검은색이지만 그 아래의 복부를 가리는 천은 실크로 보인다. 천의 바로아래에 중요한 부위를 가리는 검은색의 팬티가 있다.

섹시한 그 모습에 시선과 정신 모두를 강탈당했다. 정신을 차린 것은 그녀가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았을 때였다.

테드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의 하반신에는 피가 쏠려 있었지만, 이불은 조금의 티도 나지 않고 평평했다.

테드는 솜이불이 두껍기 때문이라 믿고 싶었다.

⁂ ⁂ ⁂

사이나가 차린 아침식사를 끝낸 테드는 평소처럼 그녀가 건네는 신물을 펼쳐 읽었다.

루크에이스에서 사치품이라 불리는 신문이었다. 루크에이스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외부에 대한 정보도 실려 있어 가끔씩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신문에는 천랑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루크에이스의 인기인인 그녀는 사진은 찍지 않는 모양이지만 자주 기사에 실린다. 당연히 천랑에 대한 좋은 이야기 밖에 없다.

테드의 파티인 레드 헥사그램도 가끔씩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묻곤 한다. 다른 파티원은 인터뷰에 응하는 반면에 테드와 사이나는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다. 테드의 경우 자신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려서 알려지는 것은 무언가 거부감이 들었다. 사이나는 테드의 명령으로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또 천랑인가. 바쁘게 사시는구만.”

전에 실버 울프와 클랜 워를 치른 후, 다음날에 천랑이 그의 집으로 찾아왔었다. 결투에 끼어든 보상 건으로 찾아온 그녀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서 파티원 전원에게 스카웃을 제의했다.

다행히도 누구하나 제의를 받아들인 파티원은 없었다. 천랑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예의 보상을 건넸다. 500골드와 최상급 마력 포션이었다.

상상이상의 보상이었다. 500골드는 파티원과 나누려했지만 결투에서 패배했던 브론과 카론은 부담스럽다며 거절했고, 분위기에 휩쓸리고 애초부터 돈에 구애받지 않는 션 또한 거절해 결국 테드의 것이 되었다.

최상급 마력 포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테드와 사이나 밖에 되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그가 가지게 되었다.

최상급 마력 포션. 마시는 것으로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물건이다. 회복이라기보다는 액체 형태의 마력을 마시는 것으로 몸속에 밀어 넣어 사용하는 느낌이다.

1L의 양이지만 부작용이 없는 최상급 마력 포션의 가격은 루크에이스의 시세로 따지면 1000골드를 족히 넘어가는 고급품이다.

“오늘은 꽝이네.”

영양가 있는 정보를 발견하지 못한 테드는 신문을 아무렇게나 올려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할 시간이다.

레드 헥사그램의 파티 집합 장소는 모험가 소개소다. 괜찮은 퀘스트가 있으면 골라가려는 속셈으로 정한 집합소에는 언제나처럼 션이 와있다. 약속시간인 9시에 혹시 모를 사태에 늦지 않게 항상 1시간 전부터 나와 기다리는 션이다. 처음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있다.

20분 정도 전부터 브론과 카론이 온다. 대부분 카론과 션이 투닥거리고 브론이 가만히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

테드와 사이나는 일정하지 않다. 보통은 5분 정도 전에 도착하지만 어쩔 때는 약속시간을 한참을 넘기고서 도착할 때도 있다. 이유는 테드의 게으른 성격이다. 테드가 말하길. 추워서 밖으로 나가는데 결의가 필요하다. 파티원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변명이었으나 파티 리더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모험가 소개소의 입구에 도착한 테드는 바닥에 신발을 탁탁 두드려 묻은 눈을 털어주고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파티원들이 모여 앉는 익숙한 자리를 찾는다. 거기엔 예상대로 브론과 카론, 션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한 명, 레드 헥사그램의 일원이 아닌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다.

“5분 늦었군. 파티 리더라고 너무 늦장부리면 파티원들이 속으로 욕한다고?”

황금 들소의 파티장인 메리코였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테드의 뒤에 있는 사이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사이나 씨도 오랜만. 그동안 더 예뻐졌군 그래.”

“…….”

사이나는 묵묵부답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완벽히 무시했다.

메리코가 어색하게 웃었다.

“메리코냐. 또 무슨 일이야?”

테드가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메리코는 유용한 정보나 괜찮은 보수의 의뢰를 가지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우연히 만났을 때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다. 앉아서 테드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럭저럭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일 터다.

“기뻐하라고 테드.”

메리코는 품에서 돌돌말린 종이를 꺼낸다. 그걸 걸어오는 테드에게 잘 보이게 쫘악 펼치며 씩 웃었다.

“모험가 길드의 지명 의뢰다.”

슬쩍 훑어본 의뢰 내용은 던전 탐색과 호위.

지명 받은 파티는 황금 들소와 레드 헥사그램이었다.

============================ 작품 후기 ============================

테드는 거기에 털도 안났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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