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8. 마성의 남자.
8. 마성의 남자.
테드는 멍한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나, 온도, 냄새 등의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주먹을 쥐어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꿈인가.’
꿈속에서 꿈을 인식하는 자각몽이라 불리는 현상이었다.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자각몽을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의 경험했던 자각몽은 자각하고 얼마 안 되어 곧바로 잠에서 깨어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깨어날 기색이 없다.
테드는 눈동자엔 황혼에 물든 주황빛 하늘 아래 언덕을 형성하고 있는 시체들이 비치고 있다.
꿈이라 인식하게 된 주원인은 시체에 있었다. 병사의 갑옷을 입은 시체는 얼굴 부분이 검어서 아예 보이지 않았다.
까마귀 떼가 날아와 각각 흩어져 시체를 파먹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본적 있는 광경이었지만, 어디의 전쟁터인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었다. 곧바로 장소를 떠올리기엔 짐작 가는 장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테드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내밀었다. 기분 탓일까. 없던 감각이 생겨난 기분이었다. 피로 질퍽한 대지의 감촉과 피비린내가 혼합된 찝찝한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는다.
테드는 무시하고 걸었다. 누군지 모를 병사의 시체를 밟으며, 언덕의 중심으로 걸어간다.
희미하게 병장기 소리가 들려 왔다. 언덕의 중심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병장기소리
는 더욱더 높아진다.
시체 언덕의 중심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로 검을 맞대고 있었다.
한 명은 근육이 우락부락한 거구의 사내였다. 머리카락이 벗겨져 반들거리는 머리를 투구도 쓰지 않은 채 내보이며 대검을 휘두른다. 얼굴 부분은 널리고 널린 시체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것처럼 검다. 전혀 알수 없다.
상대하고 있는 사내는 그와 대조적으로 호리호리한 체형의 사내였다. 볼품없는 둥근
투구를 대충 머리에 쓴 푸른 머리의 사내였다. 그만 유일하게 얼굴이 있었다.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의 사내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담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다. 서툰 검술 실력에 반해 검에 실린 힘과 움직임만큼은 굉장히 빨랐다.
‘저건 나잖아.’
첫 번째 회귀 후, 마법이 숙련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정확하게는 대범위 마법을 사용해 전장을 쓸어버리는 것보다 스스로의 몸에 강화마법을 걸어서 직접 검을 들고 싸우는 것을 좋아했던, 전쟁광 시절의 테드다.
그리고 그 상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출나게 강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갑옷과 질 좋은 대검을 보자면 제법 직위가 있는 적군의 병사였을 지도 모른다.
전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거구의 양팔을 잘라버린 푸른 머리칼의 테드가 그대로 적의 목을 잘랐다.
그는 죽어 버린 시체 따위엔 시선도 주지 않고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음 전쟁터로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테드는 그를 따라갈까 하다가 그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가서 뭐, 팔을 붙잡고 말리기라도 하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웃기는 생각이었다.
조금 걷자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날이 저문 어두운 숲속이 되었다. 뒤바뀐 풍경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여성의 비명이 고막에 파고들었다.
테드는 시선을 돌렸다. 숲속 한가운데서 여자를 왼손으로 안아들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복부에 검을 박아 넣은 금발의 미청년이 있었다. 사내는 푸른색 눈동자로 무감각하게 여자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흑갈색 단발머리에, 왼쪽 입술 아래에 점이 있는 여자가 비명과 함께 미청년을 향해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어깨나 옆구리를 가격하지만, 청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와 몸을 섞었던 여자네.’
몸을 섞은 것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얼마안가 배신을 한 여자였다. 이름이 뭐였
더라. 제시카였던가.
테드의 귓가에 추악한 본심을 숨기고서 사랑을 속삭인 여자다. 환생자라는 공통점을 이용해 접근했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몸으로 테드를 유혹했던 여자였다. 그녀는 테드가 딱히 사용할 곳을 찾지 못해 쌓인 돈을 목적으로 접근한, 흔히 말하는 꽃뱀이라 불리는 족속이었다.
그녀는 테드가 돈을 건네자마자 본색을 드러내 동료인 용병들을 끌어들였다. 인상이 험한 용병들로 테드를 협박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용병들은 테드의 손에 절명했다. 그녀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테드를 피해 숲속으로 도망쳤고, 테드는 끝까지 쫓아 지금처럼 복부에 검을 찔러 넣었다.
테드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은 틀림없는 배신이었지만, 애초부터 특별한 감정이 없었던 상대였다. 용병을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을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용병을 끌어들이고 위협한 것이 그녀의 최대 실수였다.
“조금쯤은 동요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잖아. 혹시 너의 기억이 아닌 거야?”
위에서 들린 여성의 목소리에 테드가 고개를 올렸다. 거기엔 공중에 떠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알몸에 검은색 속옷만을 걸쳐 풍만하고 요염한 몸매를 드러낸 여인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당당하게 허리춤에 팔을 올리고 있다.
“……누구?”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복장이나 생김새를 보자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의 여자였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이상형인가 싶지만, 그녀를 봐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녀가 천천히 테드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테드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제지한다. 테드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파고들어 투과된다. 감각이 없어 공기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서큐버스라고 하면 알려나?”
“……몽마.”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대부분이 모험가들에게서 듣거나 책으로 접한 정보가 전부다. 몽마는 남자를 홀려 그 정기를 취한다고 한다. 남자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꿈속에선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나 유혹한다.
“네가 내 이상형이라고?”
전혀 납득할 수 없었던 테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입가에 손을 대고서 묘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갈색의 단발머리가 찰랑였다.
“아니, 이건 내 본모습이야. 신기하게도 여기선 내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걸. 고작해야 지켜보는 것이 전부야.”
어떻게 된 건지 꿈속으로 침입하는 것도 힘들었다. 악의를 전부 버리고서야 겨우겨우 꿈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꿈속에선 보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꿈속의 세계가 그녀의 간섭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 찾아온 목적이 뭐야?”
“서큐버스가 꿈속에 찾아온 목적이야 뻔하잖아. ……좋은 거 할까?”
남자의 시선을 강탈하는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브래지어를 건들어 은근슬쩍 그 안의, 분홍빛의 유두를 노출시키며 색기담긴 끈적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나 테드에겐 눈에 띄는 반응은 없었다. 무감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의 반응에 뻘쭘해진 그녀가 서둘러 사실을 고했다.
“그냥 호기심이야. 그 사이나 루키페르의 주인님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는걸.”
덤으로 정기를 흡수할 생각이었지만, 영악한 그녀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악마냐?”
사이나는 처음으로 중간계, 네메스 대륙에 소환되었다고 말했다. 루크에이스 주민들을 제외하면 그녀를 알고 있는 인물은 없다.
눈앞의 몽마는 대답대신 미소를 흘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놀랐어. 고작 인간이 이런 방대한 정신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사이나는 버리고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그 목석녀 보단 여러 가지로 훨씬 즐거울 거야.”
“아니, 난 사이나가 좋아. 알지도 못하는 너랑은 계약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 이만 내 꿈에서 나가줘.”
“매정한걸.”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해도 테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단호박처럼 단호했다.
“난 너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 이름이 테드라고 했지? 나는 뮤렌이야.”
“슬슬 깨어나고 싶은데.”
“여자에게 그렇게 박정하면 인기 없어진다고?”
테드가 눈살을 찡그리며 무시하고 숲속을 바라본다. 금발의 미청년은 안고 있던 여자의 시체를 쓰레기 버리듯이 떨어뜨리고서 차분한 걸음으로 테드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저거 누구야? 형태가 뚜렷한 걸 보니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아는 사람.”
자기 자신이니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까지 전부 잘 알고 있지만, 그녀에게 말해줄 의리는 없다.
테드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볼 것은 보았다.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다.
뮤렌이 다급히 허공을 날아 테드의 뒤를 따랐다.
“어딜 가는 거야? 여긴 꿈속이라 벗어날 순 없어. 걸어봈자 또 다른 광경을 볼 뿐이야.”
“기왕 여기에 왔으니 구경해보지 않으면 손해잖아.”
어쩌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테드의 걸음에 따라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도시, 산, 해변, 늪지 등등 온갖 장소로 바뀌었지만 내용은 전부 비슷했다. 시체가 즐비해있을 뿐이었다.
“이런 꿈은 나도 처음이네. 무슨 경험을 한 거야?”
“…….”
보이는 대로의 경험이다. 대답할 가치는 느끼지 못한 테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전쟁터가 아닌 곳도 나왔으나 시체는 어디에도 있었다.
“뭔 시체만 잔뜩. 시체 애호가라도 되는 거야?”
“그런 변태는 아니야.”
사랑하지도 않고, 모으는 취미도 없다.
“그래도 신기하네.”
뮤렌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가 눈살을 찡그리게 만들며 고개를 돌리게 할 정도로 비참할 정도로 처참한 시체들이 넘쳐났다. 하나같이 얼굴 부분이 없다.
담담한 테드의 행동을 보자면 죄의식같은 걸 느끼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밖에 없다.
“이 시체들의 얼굴, 전부 잊어 버렸구나?”
테드의 몸이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뮤렌은 테드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고의로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정신 깊은 곳으로 봉인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가능성은 낮지만 정말로 시체들의 얼굴을 잊어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봐온 방대한 시체에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시체가 전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뮤렌은 개인적으로 전자이기를 바랬다. 정말로 무심코 시체의 얼굴을 잊어버렸다면 그건 악마보다 더한 괴물이다.
악마도 자신이 죽인 자의 얼굴 정도는 기억한다.
“그들이라면 지금은 살아 있을 거야. 굳이 무리하게 얼굴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
테드가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뮤렌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테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꿈속 탐험은 끝이 났다. 얻을 것이라곤 전혀 없는 막장 탐험이었다.
꿈의 끝에는 우주 공간이 있었다. 어둠을 바탕으로 반짝이는 별이 박혀 있는 공간이었다. 테드는 이곳을 알고 있다. 창조주를 만났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창조주를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창조주의 이름이 제울이라고 했던가.
“밤하늘?”
우주를 본적 없는 뮤렌이 주변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꿈속에서 자각하게 된 것, 네 짓이지?”
“……음, 아마도?”
정신력이 뛰어난 자들 중에 가끔씩 있다. 꿈속에 침입한 적을 감지하고 자각하는 자들이.
그래봤자 꿈속은 서큐버스의 힘이 강하게 미치는 곳인지라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정기가 빨릴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상을 서큐버스인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상했다.
꿈속인데도 불구하고 서큐버스로서 힘을 사용할 수 없다. 꿈에서 영향을 펼칠 수도 없으며, 최소한의 감각도 느낄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꿈의 주인인 테드와 대화하는 것과 꿈의 풍경을 보는 것뿐이다.
“충분히 구경했잖아. 이제 내 꿈에서 나가.”
뮤렌의 몸이 일그러진 영상처럼 흔들렸다. 꿈의 주인인 테드가 강하게 염원하자 꿈이 배척하기 시작한다.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주인은 테드였다.
“그러네. 이제 슬슬 나가야겠어. 하지만 나가기 전에 약간의 충고를 해줄게.”
뮤렌은 사라지는 자신의 몸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부드럽게 눈웃음 지었다.
“사이나 루키페르, 그녀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악마계에서도 그녀는 잔혹하기로 유명했거든.”
“쓸데없는 소리.”
테드가 질 나쁜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