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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35화 (3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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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레드 헥사그램.

키노의 몸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관객들의 시야 속에서 그의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의문을 표현하기도 전에 세 명의 키노가 각각 테드의 앞과 좌우에서 덮쳐든다.

‘……눈이 속았다.’

일반적인 움직임 이였다면 이미 예측까지 완벽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공으로 인한 착시 효과는 테드의 뛰어난 눈이라도 속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테드의 눈은 재빠르게 키노의 세 분신 중에서 진짜를 찾아낸다.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게 진짜.’

테드의 오른쪽에 2M의 장벽(Stone Wall)이 느닷없이 솟아올라 키노의 앞길을 막아선다. 키노는 상관치 않고 벽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상단에서 아래로, 깔끔한 은빛의 궤적을 남기며 검이 떨어진다.

벽은 두부라도 된 듯 부드럽게 베어졌지만, 정작 노리고 있던 장벽 뒤의 살을 베는 감촉은 전혀 없다. 빠르게 검을 뽑아 회수하고서 장벽의 옆으로 돌아간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빠르게 장벽에서 뒤로 물러서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어디냐.”

양손에 힘을 주자 검의 그립에서 뿌득이는 마찰음이 귓가를 때린다. 쫑긋하고 키노의 늑대귀가 움직인다. 뒤와 좌우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자신이 했던 것처럼 세 명의 테드가 동시에 달려들고 있다. 발소리는 세 곳 전부에서 들려와 귀로는 판단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기만이다.

키노는 오른쪽을 향해 보법을 밟았다. 놀란 표정의 테드를 보며 약간의 고소함을 느낀 키노가 검을 휘둘렀다. 테드의 앞에 투명한 유리벽이 쨍그랑 부서지면서 키노의 검이 아주 잠시 멈칫한다. 테드는 그 틈을 노려 몸을 비틀어 검을 피해낸다.

“……어떻게 알았지?”

“네놈의 몸에서 고기냄새가 풀풀 나더군.”

분명 이곳에 오기 전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먹었다. 소량이기도 하고, 냄새가 밸 정도로 오랫동안 식당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냄새로 따지자면 굉장히 미약할 것이다.

늑대 수인족으로서 후각이 발달한 키노이기에 찾아낼 수 있었다.

검이 다시 휘둘러지지만 테드는 곧바로 눈으로 보고 피한다. 월랑검식의 특징은 거센 바람처럼 끊임없이 몰아붙이듯이 이어지는 초식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테드에겐 팔의 움직임, 보법의 방향까지 전부 보인다. 조심해야할 것은 눈을 속이는 환검(幻劍)이다.

‘대강 검의 규칙이 보이는 걸.’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무언가에는 대부분 규칙이라는 게 있다. 특히나 무공의 보법이나, 검의 초식은 일정한 규칙의 반복이다.

테드가 규칙을 알아차린 것은 고성능의 눈과 마법으로 단련된 두뇌 덕분이다. 무공 속에 있는 규칙을 파악하면 대략적이나마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물론 변수는 언제나 유의하며 상대방의 움직임을 파악한다.

‘미래라도 예측하는 거냐!?’

키노의 경우에는 미칠 지경이었다. 월랑검식을 펼치고 있지만 맞지는 않는다. 요리조리 피해내며 경기장을 돌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다 검이 닿으려 하면 실드 마법을 이용해 막아내는 것의 반복이다.

‘이래선 끝이 없다!’

테드의 발아래에 희미하게 그려지고 있는 마법진의 선을 보며 얼굴이 굳는다. 테드는 공격을 피하면서 발로 경기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미약한 마력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초조함이 검을 휘두르는 키노를 덮치고 하나의 결심을 하게 만든다.

‘……사용할 수밖에 없군.’

되도록 이런 시선이 많은 곳에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클랜원들이나 마스터에게도 숨기고 있던 기술이다. 완벽하지도 않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만 결투를 질질

끄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다.

키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자 테드가 조소를 머금었다.

“뭐야, 벌써 지친거야?”

“네놈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귀찮아졌을 뿐이다.”

키노는 경기장의 바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기는 가볍게 경기장을 베어낸다. 정확하게는 테드가 발로 은밀하게 그리고 있던 마법진을 끊어낸 것이다.

“아, 들켰나. 널 위한 특대 마법을 준비 중이었는데….”

키노가 기도 안찬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얼마나 나를 멍청이로 보는 거냐. 그렇게 눈에 띄게 움직이면서 눈치 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냐?”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중에는 반격의 기회까지 있었음에도 그저 피하기만 했다. 마법진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체력을 소모시키는 작전인줄 알았다.

테드는 키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공격에 대비해 언제든지 피할 수 있도록 몸을 낮춰 자세를 잡았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절반 정도가 그려져 있고, 마법진의 중심은 무사하다. 키노가 끊어 버린 부분은 간단하게 이어붙이면 되는 일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도 아무런 공격이 없자, 테드의 머릿속에 의문이 나타났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거야? 포기라도 했어?”

“……약간의 정신 집중이 필요했다. 기다려 주어서, 고맙군.”

“……아아?”

테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시간을 주어서 고맙다고? 마법사도 아닌 검사가? 무엇 때문에 그런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곧 테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진다.

빠지직 거리는 전기가 튀는 소리와 함께 키노의 몸이 변하기 시작한다. 눈에도 보일 정도의 백색의 전기가 키노의 몸 주위에 나타나고, 내려져 있던 머리카락이 위로 딱딱하게 굳어 고슴도치마냥 솟구쳤다.

갑작스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근육은 경갑이 팽창되어 안쓰러울 정도의 모습이었다. 백색의 전기가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키노가 손에 쥔 검이었다. 검날에 맺힌 검기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에 전기가 빠직거리며 머물고 있다.

마법과 성법은 당연히 아니며, 주술이나 종족 특징도 아니다.

“……스킬인가.”

테드의 지식 속에도 없는, 레어 스킬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것이라면 갑작스런 키노의 변화도 설명이 된다.

“《뇌랑(雷狼, Thunder Wolf)》라는 스킬이다. 이런 시선이 많은 곳에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만……, 괜히 아꼈다가 지는 것은 그 이상으로 싫다.”

키노가 검을 휘둘렀다. 대비하고 있던 테드가 재빠르게 움직였지만, 지금까지 휘둘렀던 검의 속도가 아니었다. 배 이상의 빠르기의 검은 테드의 왼손을 스쳐 벤다.

볼 수는 있다. 노블 라이칸 슬로프에 비하면 확실히 느리다. 그러나 지금의 테드의 반응속도로는 아슬아슬하다. 완벽하게 피해내려면 신체를 강화 버프를 걸어야 한다.

재빨리 블링크를 사용해 거리를 벌린 테드는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왼손을 바라봤

다. 식칼에 베인 것처럼 손등이 베였다. 치명상은 아닌데 왼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비 효과…?!”

전기 속성의 고유효과다. 마법 중에서도 전기 속성은 마비나 스턴 효과를 가진 것들이 많다. 아마도 제대로 공격당한다면 그대로 몸이 마비되어 결투는 끝날 것이다.

테드를 향해 키노가 달려들었다. 온몸에 흐르는 백색의 전기를 보면 번개처럼 이라는 말이 떠오르지만, 번개에 비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신체능력이 대폭 상승했다곤 하나 테드의 눈에는 그 움직임이 전부 보였다.

테드는 키노를 향해 씨익 웃었다.

“시간을 주어서 고마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어.”

그 이질적인 말에는 제아무리 키노라해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세라 하기엔 너무나 당당해서 저도 모르게 다리를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시선

을 돌린다. 테드가 몰래 그리고 있던 마법진은 사라져 있었다.

포기한 것일까? 아니, 그럼 테드의 말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종의 육감이라 할 수 있는 감각이 기묘한 위화감에 불려 몸을 지배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놈에게 여유를 줄 뿐이다.’

끈적끈적하고 찝찝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앞으로 나선다.

그러나 돌연 몸이 붕하고 떠오른다.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기울여지고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반사적으로 손을 젓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력이 사라졌다.

키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있는 테드가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키노를 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현상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중력 마법인가. 언제 준비 한 거지!?”

“네가 내 주먹을 맞고 날아갔을 때부터.”

테드의 몸이 사라지며, 경기장의 중심에 나타난다. 마법진의 중심, 유일하게 마법의 효과가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를 밟는다.

키노는 마나를 끌어 올려 땅에 내리 앉으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쉽지 않다. 오히려 그의 몸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무력하다.

“보이지 않는 마법이야. 정확하게는 보이지 않는 마법진이지만.”

“그건… 버프 마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버프 마법이 보이지 않는 마법에 포함되는 거야. 그리고 왜 보이는 마법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곤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

테드의 말에 키노가 이를 악물었다. 보이지 않는 마법. 무언가 장막 같은 것에 막혀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환상마법……. 내게 환상 마법을 걸었군.”

“좋은 생각이긴 한데. 아쉽지만 틀렸어.”

환상 마법에도 종류가 있다. 대상의 시각을 속이는 신기루 형의 마법과 정신을 직접 공략해 환상을 보여주는 마법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위력이 약하나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후자의 경우엔 위력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나 전부 고위마법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 또 마나를 사용하는 검사, 그것도 전투 상태의 검사가 정신계 환상 마법을 눈치 채지 못하게 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총 다섯 개의 마법진을 준비했어.”

“……다섯 개나 준비했다고?”

부유한 키노가 경악어린 말을 내뱉었다. 자신은 검을 휘둘러 상대를 베기 위해 아웅다웅 하고 있을 때, 상대는 다섯 개의 마법진은 준비했다고 한다. 분노를 넘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첫 번째는 네가 일찌감치 간파한거야. 바닥에 그리던 녀석이지.”

“하, 그건 미끼였나.”

“마법진만 큰 라이트 마법이었지. 네가 마법진에 대해서 알았다면 상황은 바뀌었을 지도 몰라.”

설명을 들으면서 키노는 몸에 힘을 주어 무중력에 저항한다. 괜히 발버둥 치면 오히려 위로 올라갈 뿐이고 천천히 힘을 주고 움직이면 약간이지만 내려간다. 대충 요령을 깨닫는다. 클랜 마스터에게 배운 천근추의 요령을 떠올리며 기습할 적당한 타이밍을 잰다.

“두 번째는…….”

테드와 키노의 시선이 마주친다. 키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눈치 챈것인가. 그러나 키노의 우려와 달리 테드는 싱긋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내가 가르쳐 줘야할 의무는 없잖아.”

“……뭐.”

키노가 당황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래에서부터 거대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위로 띄운다. 지면에서 약 20M를 곧바로 올라온 키노는 경기장 위의 테드나 주변의 관객들이 작은 개미처럼 보이는 주변 광경에 식은땀을 흘렸다.

없던 고소 공포증마저 생길 정도였다.

‘……기권해야 하나?’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천근추를 이용해 내려간다고 해도 제대로 착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부유하고 있는 지금 기권을 한다면 확실하게 구조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권을 생각하려는 찰나, 여동생 피나가 떠오른다. 버릇이 없는 녀석이지만, 눈앞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비참하게 맞는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열이 뻗쳤다.

파지직.

그의 몸 주위에 백색의 전깃불이 나타났다. 키노는 자신의 스킬 때문이라고 별 생각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전기가 꿈틀 거린 것은 그의 몸 주위뿐만이 아니었다.

파지지지지직!!

허공 전체에 전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댐이 무너진 강물처럼 막대한 전기가 허공에 나타난다. 그 속에서 부유하고 있던 키노의 몸에 전류가 흘러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온몸이 베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짜릿짜릿 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약 10초간 지속된 전류는 소리 없이 멈추었다. 《뇌랑》 덕분에 속성이 전기가 된 덕분에 온몸에 흐르는 전류를 맞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

키노는 멍한 정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력한 고통을 느낀 것은 처음뿐이다. 그 이후의 기억은 전혀 없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금의 멍한 상태로 이미 하얀 전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의 스킬, 뇌랑은 이미 풀렸다.

풀린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을 때, 키노는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뇌랑은 이미 풀렸고, 부풀었던 근육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 왔다.

처음은 천천히, 눈에 보이는 관객석이 변하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깨달을 정도로 천천히 몸이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을 지점으로 어떻게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떨어진다.

중력이 돌아왔다? 아니, 중력이 평소보다 늘어나 그의 몸을 떨어뜨리고 있다.

몸이 너무 무겁고 주변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어떻게 움직일 수가 없다.

현재의 키노로선 바닥에 떨어져 곤죽처럼 엉망진창으로 변한 자신의 시체를 상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때, 관객석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떨어지는 키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검은색 누더기 망토 아래 꽃잎처럼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키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 …스터.”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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