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23화 (2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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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궁 도시 루크에이스.

미궁에서 탈출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뒤였다. 운이 좋게도 71층에서 공략하던 클랜을 만난 것이다.

여분의 귀환부를 집행관의 이름을 팔아 외상으로 구입한 레이나는 테드와 함께 미궁을 탈출했다.

“……팔자 좋으시군요. 주인님.”

미궁의 입구,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레이나의 등에 업혀 있는 테드는 눈을 크게 떴다. 은발의 메이드가 떡하니 서 있었다.

사이나의 입에는 드물게도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결코 따뜻한 미소가 아니었다. 차갑다 못해 시릴 정도의 미소다. 거기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테드 공의 메이드인가.”

“어, 어, 어….”

테드가 당황해 말을 더듬고 있을 때, 사이나는 시선을 돌려 하얀 갑옷을 입은 레이나를 바라봤다. 마치, 품평하듯이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본다.

“……주인님을 구해주신 분이시군요. 칠칠치 못한 주인님 때문에 고생 많으셨군요.”

“아니, 오히려 내가 테드 공에게 신세를 졌지. 목숨을 빚져서 어지간한 것으론 되갚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네.”

“지금부터는 제가 주인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음? 아니, 괜찮네. 별로 무겁지도 않…….”

레이나가 거부의 뜻을 내비쳤지만 사이나는 이미 그녀의 뒤에 와있었다.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한순간 그녀의 움직임에 뒤늦게 반응했다.

‘……테드 공의 메이드도 보통 인물이 아니군. 처음 보는 보법인데… 그녀도 환생자인가?’

사이나는 레이나의 등에 업힌 테드를 떼어내 공주님 안듯이 안아 들었다.

“상당히 많이 늦었군요. 주인님.”

“…어, 미안. 어쩌다 보니 늦었어. ……걱정했어?”

“걱정했습니다.”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원스런 대답이었다. 하지만 사이나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등에 업어주는 걸로 괜찮은데.”

“전 이쪽이 더 편합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레이나의 갑옷에 비한다면 천국이나 다름없었지만 신부처럼 안겨 있자니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사이나의 몸은 추운 루크에이스의 겨울 날씨와 달리 굉장히 따뜻했다. 거기에 부드럽다. 포근한 이불속에 있는 기분이다.

테드는 힐끗 사이나를 바라봤다. 사이나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이다. 풍만한 가슴이 테드의 몸에 닿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주종 간의 사이가 좋군.”

너무 사이가 좋아서 주변의 지나가는 모험가들의 시선이 주목될 정도다. 별다른 말은 없지만 신기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염치없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이만 가보도록 하겠네. 테드 공은 메이드양에게 맡기도록 하지.”

레이나는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 왕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머지 보물을 찾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것에 매달려 있을 순 없다.

“테드공.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에게 연락하게. 언제라도 힘닿는 대로 도와주겠네.”

“레이나님의 힘을 빌릴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기억해둘게요.”

“테드 공의 성장한 모습이 자못 기대되는군.”

레이나는 그렇게 미궁입구에서 이별을 선언하고 모험가 길드 쪽으로 떠났다. 테드는 사이나에게 안긴 채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미궁 첫날은 일주일을 쉬워야 할 정도로 하드 했다.

“……김치찌개를 준비해두었습니다만… 그 상태라면 먹지 못하시겠군요.”

사이나에게 안긴 테드는 조금의 미동도 느껴지지 않는 안정감과 그녀의 체온에 잠들 뻔했다. 미궁에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후유증이다.

“아니, 먹을 수는 있어. 입은 멀쩡하니까. 몸도 움직일 수는 있는데… 엄청 아프거든.”

“그럼 먹여드리면 되겠군요.”

“하하하……. 엄청 미안해지네, 이거.”

가사에 대해 재능이 전혀 없는 테드는 그 전부를 사이나에게 맡기고 있다. 자신을 돌봐야 하는 일까지 늘어나 버렸으니 면목이 없다.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종이니까요.”

“사이나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아? 모처럼 네메스 대륙에 소환되었고…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테니,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쉬는 게 어때?”

생각해보면 사이나에게 휴가는 물론이고 급료도 주지 않고 있었다. 노동청에 신고당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부려 먹고 있다.

“저에겐 휴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만, 굳이 보상을 주시겠다면……. 같이 자도 되겠습니까?”

“……같이 잔다니. 내 침대에서…?”

테드의 뺨에 홍조가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망상이 날뛰었으나, 사이나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있을 뿐이다. 테드는 그녀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이나 방의 침대가 안 좋아? 최고급으로 바꿀까?”

“아뇨. 침대 문제가 아니라. 주인님은 현재 움직이시지 못한 상태이지 않은가요. 제가 곁에 있는 편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 그런 뜻이었어? 그럼 일주일 정도는 부탁할게.”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니 잠버릇도 걱정되지 않는다. 근육통은 최대한 움직이면서 풀어주는 게 좋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근육통이 아니다. 일주일만 있으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통증이다.

“저는 평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평생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닌데.”

“싫으시다면 보상은 되었습니다. 몸의 피로도 1~2시간 정도 자는 것으로 모두 풀리

니 휴식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

테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이나는 평소처럼 말하지만 분위기를 보자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느낌이다.

“조, 좋아. 하지만 가끔씩 혼자 자고 싶을 때도 있으니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어때?”

“음. 일주일의 다섯 번 정도가 적당한 것 같군요.”

“세, 세 번 정도로….”

“다섯 번이 적당합니다.”

“아니, 그래도 세 번이면…….”

“제가 봤을 땐, 다섯 번이 최적입니다. 사실 저는 일주일에 일곱 번을 원합니다

만…… 효율적인 문제도 있기에 다섯 번 정도에 참기로 했습니다.”

“…….”

그녀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잠만 자는 것뿐이라면 문제없을지도 모른다. 성적으로 덮쳐질지도 모른다? 명령이 없는 이상 사이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좋아. 일주일에 다섯 번이면 되는 거지?”

“예. 그것으로 됩니다.”

테드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일주일은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라는 것이다. 억지로 움직인다면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걸 사이나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테드는 이후 일주일간 음식은 물론이고 옷을 갈아입는 것에서부터 생리적인 현상까지 사이나의 도움을 받게 되는 수치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 ⁂ ⁂

테드와 헤어지고서 곧장 모험가 길드를 찾은 레이나 델톤은 루크에이스 모험가 길드 지부장의 방에서 한 명의 남성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루크에이스 모험가 길드의 지부장, 지낙 알프론드는 중년 고양이 수인족 남성이다. 탈모증을 앓고 있기 때문인지, 정수리 부분에 털이 빠지고 있다. 둥글둥글한 인상 좋은 남성이지만 머리에 달린 삼각형의 고양이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모험가들 말이신가요?”

지낙은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의 집무실 가득 채워져 있는 압박감은 사무관 출신인 그에겐 견디기 힘들 정도다. 그나마 길드 지부장으로서의 경험이 있어 어떻게든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네. 자네들이 추천해준 모험가들 말일세. 그들은 모두 귀환했는가?”

“…그, 모두 무사히 귀환 했습니다…….”

지낙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녀의 실종 사실을 알고서도 조사대를 파견하지 않은 일이다. 미궁에서 실종은 흔한 일이지만 그녀는 모험가가 아닌 집행관이다. 펠리스 왕국의 왕이 모험가 길드에 정식으로 항의한다면, 대신할 인물이 많은 자신의 자리는 순식간에 다른 이의 차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전부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듣기론 레이나님께선 전이계 함정에 걸리셨다고…….”

‘빌어먹을 모험가 놈들.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거냐…!’

지낙이 그들을 추천했다.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 모험가 길드 지부장자리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처량한 모습이 떠올라 탁자 아래 보이지 않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음. 그때는 고생했네. 귀환부도 없어서 우연히 탑을 올라오는 모험가 클랜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지금도 미궁에 있었겠지.”

“무, 물론 레이나님은 혼자서도 미궁을 내려오셨을 겁니다.”

지낙은 그저 실력이 뛰어난 모험가를 추천해주었을 뿐인데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아니, 아마 힘들었을 것일세. 미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더군. 겪어보니 알겠어. 그런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느냐는 말에 지낙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의 위치를 묻는다는 것은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을 추천한 자신에게도 화가 닥칠 것이다.

부디 그녀의 화가 자신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라며 지낙이 입을 열었다.

“……모험가들은 모두 도시에 있을 겁니다. 그중 레인저, 드리븐이 책임을 느끼고

길드를 탈퇴하고 도시를 떠났습니다..”

“그가… 탈퇴했다고?”

레이나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그 황금색의 눈동자 때문일까. 지낙의 머릿속에는 으르렁거리는 호랑이가 떠올렸다.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다.

“…예, 예. 레이나님이 함정에 빠진 건 전부 자신 탓이라며… 그만두었습니다.”

“……그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아, 아뇨. 그저 루크에이스를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알았네.”

레이나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자가 정말로 책임감을 느끼고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레이나는 그자가 딥크스가 보낸 인물로서 생각된다. 생각해보면 전이계 함정에 걸렸을 때 자신의 바로 옆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그였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겨우 그것만 물어보고 떠난다고? 지낙의 입장에선 좋지만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뒷일이 걱정된다.

“루크에이스 과실도 찾지 못했고. 빨리 돌아오라는 폐하의 명도 있었으니 말일세. 이만 루크에이스를 떠나야겠네.”

“루크에이스 과실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해서 그거라도 구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은 없지만 모험가 길드 지부장의 권력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폐하께서도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고 말이야.”

“그, 그럼 제가 입구까지 모시겠습니다.”

지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발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이얼 클랜을 학살한 범인은 찾았나?”

모험가 길드의 1층으로 내려가는 중 문득 떠오른 라이얼 클랜에 레이나가 지낙에게 물었다.

“저희 길드가 조사 중입니다만…, 범인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사대의 의견은 이미 루크에이스에 없을 수도 있다 하더군요.”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노블 라이칸 슬로프가 범인일 것이다. 범인을 가르쳐 준다면 해방의 팔찌에 관해서도 말해야 하므로 이 사건은 묻어둘 수밖에 없다.

“미궁의 게이트키퍼에 대해선 알고 있나?

“미궁에 들어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만, 일단은 모험가 길드의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모험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충은 알고 있지요.”

“그럼 말일세. 고층의 게이트키퍼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모험가가 있나?”

“호, 혼자서 말입니까?”

갑자기 그건 또 왜 묻는 것일까. 지낙인 곤혹스러워하며 머리를 돌렸다. 일단은 대답해야한다.

“그…, A급의 모험가 중에 실버울프 클랜의 로드인 천랑이라면 65층의 게이트키퍼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상인 75층의 게이트 키퍼는 혼자서 사냥하는 건 불가능한가?”

“75층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루크에이스의 모험가 중에선 혼자서 75층의 게이트키퍼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 유명한 모험왕 정도면 몰라도….”

모험왕이라면 레이나 또한 알고 있다. 아니, 대륙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3명의 모험왕은 수인국 네미슈에 있는 미궁을 완전 공략에 성공했으니까. 그 명성은 모험가들 사이에선 전설적이라고 한다.

“과연 모험왕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건가.”

레이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옆에서 걸어가는 지낙은 흠칫하고 놀랐다. 항상 무표정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그녀가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행관이라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가.’

그는 이해하지 못할 자들이라며 속으로 한탄했다.

============================ 작품 후기 ============================

아마 여러분이 생가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작품 설정과 뜰에 지도를 올리겠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도로 소설 전개에 맞춰 수정할 예정입니다만, 그림판으로 대충 끄적인 것이라 굳이 꼭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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