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4화 (1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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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이나 루키페르.

제녹이 손에 든 램프의 빛을 의지하며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갔다. 먼저 야크가 내려가고 그 등 뒤를 따라 제녹이고 맨 뒤가 마루마다. 그들의 기본 진열이다. 보통은 레인저인 제녹이 앞에 가지만 이런 좁은 계단에선 갑자기 튀어나올 몬스터를 대비해 전투력이 가장 높은 야크가 앞장을 선다.

계단은 길지 않았고, 그들은 곧이어 넓은 공동에 도착했다.

“따로 관리하는 녀석이 있는 건가? 이상하게 바닥이 깨끗한데.”

“벽 쪽에 붙어 있는 낡아 빠진 가구를 보자면 그건 아닌 것 같아.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우리뿐인 것 같은데?”

“계단 옆에도 방이 있군. 마광등이 켜져 있는 거로 보아, 뭔가 중요한 곳인 것 같기도 한데… 문이 없군.”

야크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대감을 가졌다. 공동의 벽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낡은 기구나 유리조각, 종이 등을 보자면 마법사의 공동으로 보인다. 운이 좋으면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왼쪽 방. 제녹은 오른쪽 방. 마루마가 계단 옆방.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 나눠서 살펴보자고.”

그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마루마는 계단의 옆의 방에 들어선 순간 흠칫하고 놀랐다. 책상 뒤에 옷을 입고 있는 해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입고 있는 옷의 디자인은 옛날 것이었지만 굉장히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마루마는 방을 두리번거렸다. 군데군데 책이 빠져있는 책장하나와 해골의 앞에 있는 책상이 전부인 삭막한 방이다. 책상 위에는 음식 접시로 보이는 것들이 놓여 있다. 이곳에 해골이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음식이 목에 걸려 사망했나.’

마루마는 거의 본능적으로 책장 쪽으로 이동했다. 혹시나 마법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적중했다. 군데군데 몇 개의 책이 빠져 있지만, 빠진 책은 기껏해야 4~5권이 전부다. 그 외에 책 중에는 마법서가 있었다. 소설책도 있었지만 마법서가 훨씬 많은 비율을 가지고 있다.

“알고 있는 마법서도 있지만 모르는 마법서가 더 많군.”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빨라진다. 시야가 조금이지만 좁아지고 책장으로 뻗는 손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다. 처음 보는 마법서를 읽는, 마법사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가 하나의 마법서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마루마. 여긴 뭐 특별한 거 없냐?”

즐거운 시간을 방해 받은 마루마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마루마는 귀찮다는 듯이 검지로 책상에 있는 해골을 가리켰다.

“해골이 있고, 마법서가 있는 것 말곤 없다만.”

“차가운 식량 창고보단 낫네. 내가 갔던 방에는 썩은 음식밖에 없었어.”

“그것참 안 됐군.”

다시 마법서를 뽑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마치 노렸다는 듯이 제녹이 들어와 방해한다.

“열려 있는 상자가 있었는데 모두 비어 있더라고. 바닥에 떨어진 포션병 3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어.”

“그런데 그건 왜 들고 있냐?”

제녹의 손에는 부서진 램프가 있었다. 제녹의 램프와는 모델이 다르다.

“박살난 램프에 마나석이 있었거든. 그리고 이거 레드 크로니클의 물건이라 제작 날짜와 모델 넘버가 있으니까.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호오.”

야크가 씩 웃었다. 머리 나쁜 그지만 제녹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요컨대, 램프의 모델 넘버로 구입한 사람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메스 대륙의 거대한 상단인 레드 크로니클은 물품마다 모델 넘버와 제작날짜를 새긴다. 그리고 물품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덕분에 정보길드에 의뢰하면 역으로 추적 할 수도 있다. 이 램프가 어디서 판매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마루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책을 읽는 것을 포기한다.

“마법서는 제대로 판매하면 제법 돈을 만질 수 있을 거다. 다만, 거기서 내 몫을 받지 않는 대신 마법서 몇 권을 얻고 싶군.”

“좋아. 같은 파티의 마법사가 강해지면 좋은 일이니까. 제녹, 너는?”

“같은 의견.”

마루마는 해골의 곁으로 다가갔다. 3개의 책상서랍이 보여 열어 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텅텅 비어있다.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군. 원래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가져갔거나. 둘 중 하나겠군.”

군데군데 책이 없는 책장도 의심스럽다. 보통은 군데군데 비어두지 않는다. 책이 부족하다면 한쪽에 밀어 두는 게 정상이다. 마치 누가 책을 빌려간 도서관처럼 자리가 비어 있다.

“이 책상위에 놓인 접시도 봐. 음식이 눌어붙어 있지만 음식이 상해 있진 않아.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그리고 접시의 크기나 개수로 보자면 대충 2인분 정도야.”

제녹이 책상 위를 살펴보며 말했다. 야크는 해골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스켈레톤은 아닌 것 같은데 옷 상태가 무지 좋네. 해골에게 옷을 입힌 건가?”

야크는 해골에게 옷을 벗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직접 입기에는 영 꺼림칙하지만 팔

면 상당한 돈이 될 것 같다.

“어? 이 문양 분명 어디서…….”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야크가 빈약한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소매에 있는 붉은색 매가 그려진 문양, 본 기억이 확실하다. 다만 정확하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옆에 있던 마루마가 문양을 힐끗 바라 보더니 문양의 정체를 말했다.

“우크사이어가의 문장이군. 아마도 이 해골이 우크사이어가 출신의 귀족이겠지.”

“아니, 여자와 애가 입히고 간 걸지도 모르지.”

제녹이 끼어들며 말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추리지만 마루마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와 애가 우크사이어의 문장이 들어간 옷을 입혔다면 해골이 우크사이어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겠지만, 애초에 여자와 애가 우크사이어였다면 해골에게 옷을 입힐 리가 없지. 조상이라면 데리고 가서 화장시켰을 거고 아니라면, 미치지 않은 이상 해골이 추워 보여 옷을 입혔을 리는 없겠지. 아마도 이 해골은 처음부터 이 옷을 입고 있었을 거다.”

“과연. 그럼 여긴 이 해골의 공방이었다는 말이네. 여자와 애가 이곳에 있는 마법 물품같은 중요한 건 전부 가져갔다는 소리고.”

“책장에도 책이 몇 권씩 빠져 있다. 아마도 짐의 무게를 생각해 귀중한 것만 챙겨서 가져갔을 테지.”

“몇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지만… 결론은 우리가 늦었다는 거네.”

제녹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얻은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책장에 있는 마법서나 해골이 입고 있는 옷을 보자면 기분 좋은 수입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빼앗으면 되잖아.”

가만히 제녹과 마루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야크가 말했다. 너무 자연스럽고 자신만만하게 말했기에 제녹은 순간 말을 잃었다.

“……도적이 되자고?”

“뭘 순진한 척 되묻는 거냐. 너도 그럴 생각이었잖아?”

야크가 제녹이 들고 있는 램프를 가리켰다. 마나석이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마나석만 빼서 가져가면 될 일이다. 굳이 모델 넘버가 적힌 부서진 램프까지 가져 올 필요는 없었다. 제녹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마루마도 아닌 야크가 그렇게 말할 줄이야.

“여자와 애가 우리랑 목적지가 같다면 미궁 도시 루크에이스에서 알 수 있겠지. 여자

와 애라는 특징은 흔하지 않으니까. 소문만 들어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야크가 조심스럽게 해골의 옷을 벗겨내며 말을 잇는다. 뒤탈 없이 팔기 위해선 우크사이어의 문양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 정도의 수고는 웃으면서 해줄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봐. 마루마가 풀지 못할 정도의 결계가 쳐져 있는 공방이라고? 분명 엄청나게 값나가는 물건이었을 거야. 여기까지 와서 조금 늦었다고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제녹은 피식하고 웃었다. 야크의 말대로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자와 애가 보물을 가져갔다는 생각이 들자 배가 아려왔다. 이대로 물러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잠깐. 잠시 생각해보면 여자와 애는 이 결계를 열었다는 것이 된다. 아마, 여자 쪽이 상급이상의 마법사일 가능성이 있다. 유명한 파티나 클랜의 일원이거나 하면 당하는 건 우리다.”

“그건 그 때가서 알아보자고. 위험한 녀석이면 깔끔하게 포기하면 그만이야. 그리고 애도 있잖아? 만일의 경우엔 납치라도 하면 돼.”

해골의 구두까지 전부 벗겨낸 야크가 말했다. 제녹은 고개를 으쓱였다. 그들이 하는 것은 범죄지만 들키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다. 범죄자의 경험담이다. 여자와 애를 노리는 것은 처음이지만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마루마는 야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처리 등으로 고생하는 자신과 제녹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돈방석에 앉은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의는 없지?”

“없어.”

“없다.”

야크가 묻고 제녹과 마루마가 대답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이견을 조율했다. 사냥을 할 때나, 범죄를 저지를 때나.

“그럼 가자고. 작전명은 보물에 꼬여든 파리들!”

“너의 그 작명센스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걸.”

“동감이다. 차라리 심플하게 ‘세 강도들’이 어떤가?”

“우와~. 너희들 가차 없구나.”

그들이 낄낄거리며 밖으로 걸어갔다.

⁂ ⁂ ⁂

루크에이스.

중립지대에 있는 두 개의 미궁도시 중 하나다. 모험가가 모여드는 도시이고, 모험가 길드가 치안을 유지하는 도시다. 거친 일에 종사하는 모험가가 많고 중립지대에 있다 보니 치안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 온갖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테드와 사이나는 이 미궁도시 루크에이스로 향했다. 사이나의 경우 테드를 따라가는 것이고, 테드는 루크에이스에서 한동안 정착해 수련을 할 생각이다. 몬스터가 나오는 미궁이기에 수련에 적합하다. 실제로 수련을 목적으로 모험가가 되는 자들이 많다.

또 한 가지, 테드는 자유기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국가 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자유기사의 경우엔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공적이란 것이 필요하다. 테드는 미궁을 공략하면서 그 공적을 쌓을 생각이다.

4년, 전쟁을 막기 위해 남은 시간이다. 3년 동안은 이곳에서 실력을 쌓을 생각이다. 그리고 인간왕국 펠리스의 우크사이어 백작가로 찾아가 마법서를 돌려주며 우크사이어 백작에게 자유기사 직위를 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이 현재 테드가 그리고 있는 계획이다.

테드와 사이나의 루크에이스로의 여행은 순탄했다.

어쩌다 몬스터가 나타나도 나이프를 든 사이나의 칼질에 속수무책으로 썰려 나갔다. 과연 악마라고 해야 하나. 1할의 힘이었지만 현재의 테드로선 이길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해프닝도 있었다.

가령, 잠버릇이 고약한 테드가 옆에서 자고 있는 사이나를 끌어안고 잔다거나. 일어났더니 옷이 반쯤 풀어 해쳐있는 사이나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다거나.

테드가 고자인 것은 아니다. 사이나 같은 미인이 옆에서 자고 있다면 당연히 성욕도 일어난다. 여자와 성관계도 해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조루라는 것을 깨달았다. 2번째 삶일 때와 3번째 삶일 때 성관계를 가졌는데 모두 조루여서 지금도 굉장히 불안하다.

순식간에 끝나는 성관계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는 여자의 표정을 생각하면… 꼿꼿이 발기했던 그곳이 단숨에 가라앉는다. 트라우마다.

또 사이나와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 것이나, 사이나가 악마에게 어린아이 취급받는 200살밖에 되지 않는다거나. 그녀가 성경험이 없다거나. 의외로 악마는 곱게 미쳤다거나 하는 등의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테드가 가장 놀란 것은 악마들의 이해 못할 욕망이다. 대부분이 강함에 대한 욕망이고, 또 누군가는 농사에 대한 욕망, 또 누군가는 체조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거나 한다. 마계는 온갖 이상한 욕망을 가진 미친놈들이 모인 곳이 사이나의 의견이다.

테드는 그 말을 듣고 사이나에게 욕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독서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고 한다. 테드와 계약 후, 그 욕망이 영혼에 대한 욕망으로 바뀌었다는 말에 테드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혀로 입술을 핥았는데, 자신을 무슨 맛있는 요리처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해프닝을 뒤로하고 테드와 사이나는 일주일이 지나 마침내 루크에이스에 도착했다.

============================ 작품 후기 ============================

기연은 끝났습니다.

제 실수로 제녹이 지녹으로 적혀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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