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4. 사이나 루키페르.
“처음 뵙겠습니다. 주인님. 사이나 루키페르입니다.”
“…….”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테드는 한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분명히 악마를 소환했다. 중간까지 계약도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눈앞에는 악마는 어디가고 웬 미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악마?”
“예. 주인님. 악마입니다.”
“…뿔이 없잖아?”
“천사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악마는 상징인 뿔을 잃어버린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처럼 보이시겠지만, 전 주인님과 계약한 악마입니다.”
악마와 천사의 전쟁이라면 알고 있다. 역사책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실화이다. 네메스 세계에 시스템이 관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또 그걸 대성전(大聖戰)이라 부르면서 오늘날의 연도인 성전력의 시작점이 된다.
오늘 날짜는 성전력(聖戰曆) 1372년 10월 4일이다. 대성전은 1372년 10월 4일 전에 일어난 전쟁이다.
“왜 메이드 차림인 거지?”
“노예처럼 일한다는, 제 의지의 표현입니다.”
“…….”
사이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차가운 냉기가 풀풀 흐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노예처럼 일하는 게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 내가 궁금한 건 왜 굳이 노예로…?”
“그게 시스템이 인정한 정당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의 영혼은 제가 보아온 그 어떠한 것보다 아름답고 고결합니다. 주인님의 영혼을 얻기 위해선 저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죠. 무엇보다 주인님의 영혼엔 미래라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인님이 죽은 뒤의 성장한 영혼을 생각하면…… 제가 더욱 이득인 계약입니다.”
“…….”
테드의 영혼에 대해 설명할 때,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지고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는 얼굴이다.
‘내 영혼이 그렇게 특별한가?’
영혼이 고결하다는 계약신 크루시안의 말이 떠오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 뜻이 무엇인지 테드는 알 수 없다. 사령술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영혼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이 없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의문이 떠오려고 할 때, 테드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지웠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사이나라고 했던가. 너는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지?”
“마계에 있을 때와 비교하자면… 약 1할 정도입니다.”
그 1할이 어느 정도냐가 관건이다. 마계에서 100순위 안에 들 정도의 힘이 있다고 했다. 상당한 힘이겠지만 1할밖에 사용할 수 없다면 불안해진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사이나의 무력을 시험해 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야 한 편에 반짝이는 알림창을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계약을 완료했을 무렵에 시스템 메시지 창이 떴다. 사이나의 등장에 정신이 팔렸고, 시스템 알림창을 최소화로 설정해 놓았기에 늦게 눈치 챘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 칭호, ‘악마 계약자’를 획득합니다. ]
[ 업적 점수 12,000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악마 계약(The Saina Lucifer)≫을 획득합니다. ]
《 악마 계약(The Saina Lucifer) - F Rank, 0%
계약한 악마는 힘의 1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랭크가 상승할수록 악마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양이 증가합니다. 하루에 한 번, 자신의 곁으로 계약한 악마를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
칭호, 악마 계약자의 경우 마력을 5 상승 시켜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테드에게 굉장히 좋은 칭호 효과다.
새로 생긴 스킬의 경우엔 테드로선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악마 계약이란 스킬의 숙련도를 어떻게 올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악마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건 상당히 유용하다. 전투 상황을 뒤엎는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테드가 스킬을 보며 이런저런 활용법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의 곁으로 사이나가 다가왔다.
“주인님. 저는 무엇을 하면 되는지요?”
사이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테드는 흠칫 놀랐다. 사이나의 풍만한 흉부가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키 차이 때문이다.
“어, 그. 네 힘을 알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말을 더듬었다. 정신이 팔려 있었다곤 하나,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제 힘이 궁금하신 거군요. 저는 일반 마법사 정도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알며, 검을 주로 다룹니다. 지배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배의 권능… 이라고?!”
정확히 어떤 권능인지는 모르나 밴시처럼 중하위의 언데드를 소환하는 허접한 권능은 아닐 것이다.
“악마와 천사는 제각각 태어날 때부터 권능을 가집니다. 1할의 힘밖에 사용할 수 없는 현재의 제가 권능으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현재 너는 어느 정도의 힘이지?”
그녀의 힘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테드의 질문에 사이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군요. 1할의 힘이라 하지만 경험해보지 않아 구체적인 힘의 정도는 알 수 없습니다. 직접 전투를 경험해 측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측정이라. 밖에 나가서 몬스터라도 몇 마리 잡아야 하나.”
스스로 전투를 벌여 사이나의 힘을 알아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싸우고 싶지 않다. 질 것 같은 느낌이고 현재의 몸으로 제대로 그녀의 힘을 측정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정 궁금하시다면 여기서 힘을 사용해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것보다 어째서 악마인데 정당하게 계약을 하는 거지?”
이 공동은 튼튼하다고 생각되지만 만일의 경우가 있다. 전투력을 시험하다가 공동이 무너져 사망한다는 어이없는 사고는 사양하고 싶다.
그것보다 궁금한 것은 계약에 관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악마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다. 괜히 악마 같은 놈이라는 욕이 있겠는가.
그런 악마가 정당한 계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나중에 뒤통수라도 때리는 것일 아닐지 걱정이 된다.
“저도 들었던 이야기지만 옛날의 악마는 배신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계약 또한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시스템이 나타난 후부터 악마와 천사는 부당한 계약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시스템이 인정하는 정당한 계약, 정당한 힘, 정당한 대가가 아니면 악마와 천사는 중간계의 주민과 계약이 불가능합니다.”
“악마와 천사도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건가…….”
“중간계, 네메스 대륙에선 시스템이 곧 신입니다. 거스를 수 없습니다.”
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은 이 세계의 신이나 다름없다. 감정 따윈 없는, 공평하기 짝이 없는 신이다.
“그런데 여기가 주인님의 집인가요? 취향이 상당히 특이하시군요.”
“누가 봐도 집이 아니잖아! 이런 집에선 아무리 나라도 살기 싫다고.”
꾸미면 어떻게든 집처럼 변할지 모르겠지만 지하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다가 지렁이 같은 벌레가 툭 하고 천장에서 떨어져 내릴 것 같다.
“이건 주인님의 짐인가요? 제가 들기로 하죠.”
바닥에 놓여 있는 배낭과 마법 주머니를 가볍게 들어 올린 사이나가 말했다. 배낭엔 이것저것 많이 들어 있으므로 제법 무겁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렸다.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갈까.”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테드는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테드는 계단의 앞에서 멈춰 서고 만다. 계단의 바로 옆, 오른쪽에 네모난 이음새가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음새가 아닌 벽으로 보일 만큼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크기는 딱 문의 크기다.
“왜 그러신지요?”
갑자기 멈춰선 테드의 행동에 사이나가 의아해 물었다.
“이건 문이지?”
“……제 마안(魔眼)에는 평범한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여기 네모난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다고?”
“예. 평범한 벽으로 보입니다.”
악마의 눈은 마력을 직접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가시의 마법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 악마의 눈을 가진 사이나가 보이지 않는다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건 마법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테드는 벽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직사각형의 모양을 보자면 딱 문 크기다. 그러나 어디에도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는 열 수 없는 문이다.
벽에 손을 짚고 매만지다. 차가운 벽의 거친 감촉뿐이다. 혹시나 싶어 힘을 주어 밀어 본다. 흔들, 벽이 움직인 느낌이 들었다. 테드는 그 반응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지잉.
문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허공중으로 사라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은 사라졌고,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방이 나타나다니… 주인님의 말대로 문이었군요.”
테드는 호기심이 생겼다. 손을 대자 갑자기 사라진 문, 왜 사라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특별한 무언가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접촉에 의해 자동으로 열렸거나. 추측을 해보지만 알 수 없다.
테드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긴 지저분했던 공동과 달리 방금 청소를 한 듯 매우 깔끔한 곳이었다. 천장에는 마광등이 빛을 내어 방을 밝히고 있으며, 대리석 바닥엔 먼지 하나 없다. 벽 한편에 있는 책장에는 빈틈없이 책이 메워져 있다. 책상 위엔 쇠사슬로 묶여 있는 검은색 책의 아래에 하얀 종이가 있다.
“……시체인가.”
해골밖에 남지 않은 시체가 꼿꼿이 앉아 있다. 입고 있는 검은색 로브와 그 안의 옷은 기이할 정도로 깔끔하다. 마치, 누군가 새 옷을 해골에게 입혀 놓은 모습이다.
“집무실… 같은 곳이군요.”
“난 서재로 보여.”
실제로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테드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먼저 쇠사슬로 감겨 있는 검은색 책을 들어 올린다. 마법으로 프로텍트가 걸려 있다. ‘고결한 눈’의 효과로 마법을 통찰하고 관찰한다.
결과적으로 혈액 인식 마법이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로텍트를 풀려면 혈액 한 방울을 책에 떨어뜨려야 한다. DNA 인식 마법이다. 강제로 마법을 해제하면 책이 불타게 되어 있는 이중 구조다. 다만, 이중으로 걸린 마법을 동시에 해체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테드의 실력이면 동시에 마법을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테드는 책을 옆에 내려다 두고 아래에 있던 하얀 종이를 꺼내 든다. 아마도 이 방의 주인이 작성했을 것이다.
[연자여!
본인의 이름은 테리온 우크사이어, 마도사라네. 또한 네메스 세계에 환생한 이름 없는 신의 사도이네]
첫마디만 봐도 알겠다. 분명 현대 지구 출신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에 누군가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몇백 년 혹은 몇천 년이 지나서야 발견했을 지도모르지.
아공간에 두었던 식량도 전부 떨어졌네. 분명 본인은 굶어 죽겠지.
본인은 우연히 고대 마법의 일부가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네. 은신처이자 공방인 이곳에서 고대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지. 그러다 사고가 일어났네. 본인 또한 뒤늦게 고대 마법이 발동되었음을 깨달았네.
문이 사라지고 벽이 되었네. 몸안의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리 벽을 쳐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지. 바로 이 방의 시간이 멈췄다는 점이네.
먼지가 쌓이지 않고, 마광등의 에너지원인 마나석의 마나는 줄어들지 않았네. 시간이 흐르는 것은 오로지 나의 육체뿐이었네.
시간을 다루는 고대 마법. 대단하지 않은가? 그대가 마법사라면 분명히 탐나겠지. 그러나 포기하게. 이 고대 마법의 일부가 적힌 종이는 내 배 속에서 사라졌을 터니.
연자여!
부탁하나만 할세.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줄 터이니, 책상 위의 놓여 있는 검은색 책을 본인의 가문, 우크사이어가에 가져다주게.
본인의 비전 마법서이네. 비전 마법서에는 프로텍트가 걸려 있어 우크사이어의 피를 흘려야지만 마법서를 볼 수 있네. 강제로 보려했다간 마법서가 날아갈 걸세.
비전 마법서에는 본인의 편지가 적혀 있네. 마법서를 가져다준 자에게 비전 마법서를 보여주라는 글을 적어 놨으니, 자네 또한 본인의 비전 마법서를 읽을 수 있을 걸세.
책상 서랍에는 자네에게 주는 보수가 있네. 책장에 있는 마법서를 가져가도 좋다네.
연자여. 부디, 본인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라네.]
============================ 작품 후기 ============================
끝나지 않은 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