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112장 탄생 - 제구대 구천십지제일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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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泰山) 천극봉(天極峯).
땅거미가 낮게 깔려드는 시각이었다.
휘― 이― 익!
유성(流星)이랄까?
비할데 없이 빠른 빛줄기 두 개가 천극봉 정상에 불쑥 솟구쳐 올
랐다.
혁련소천과 귀검사랑이었다.
푸르다 못해 검게까지 보이는 벽수(碧水)로 채워진 호수가 두 사
람의 시야에 들어 차 있었다.
귀검사랑은 혁련소천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곳이 천문이란 곳으로 통하는 입구요?"
혁련소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놈은 분명히 천문을 완전히 봉쇄했을 것이오."
"그렇다면......?"
"설혹 대라신선이라 해도 들어갈 수 없소."
자르듯 하는 말에 귀검사랑의 안색이 변했다.
혁련소천은 호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쩌면 혈왕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천문은 곧 천기
개천 사사무 노야의 최고 정화라 할 수 있으니까.......'
그때 귀검사랑이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던졌다.
"그렇다고 물러설 영호천주는 아니지 않소?"
혁련소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갑시다!"
이어 막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잠깐!"
"......?"
혁련소천은 느릿하게 귀검사랑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소?"
"무슨......."
귀검사랑은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영호천주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오?"
혁련소천은 흠칫 눈썹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귀검사랑의 두 눈에 문득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들은 나를 귀검사랑이라 부르오. 허나 그렇게 불리기까지에
는 수많은 사연이 있었소."
"......!"
귀검사랑은 어둠이 깔리는 허공을 응시하며 공허한 음성을 발했다.
"나의 이름 아니, 법명은 혜인...... 소림출신으로 자미성불의......."
"됐소. 그만 하시오."
말이 끊기자 귀검사랑은 의외롭다는 듯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은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그대가 혈궁천주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오."
귀검사랑은 혁련소천의 미소에서 언뜻 영감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혹시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오?"
혁련소천은 싱긋 미소했다.
"그대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그대의 뒷조사를 시작했었소."
귀검사랑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후후...... 어차피 나 또한 영호풍이란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었
으니 구태여 그대의 내력을 입에 담을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오."
"음......."
귀검사랑의 얼굴에 떠올랐던 놀라움은 금세 경탄의 빛으로 바뀌었
다.
혁련소천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귀검사랑,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부탁이라면......?"
"소림을 재건하더라도 영원히 내 곁에 남아 있어 주지 않겠소?"
"......!"
귀검사랑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허나 그는 곧 안색을 풀며 씁쓸한 고소를 떠올렸다.
"원래...... 나의 뜻은 만마전을 붕괴시키는 데 있었소. 허
나...... 영호천주가 제일신마가 된다면 뜻을 바꾸겠소."
귀검사랑의 눈에서 깊숙한 신광이 흘러 나왔다.
"중원의 평화와 제구대 제일신마를 위해 남은 내 인생 기꺼이 바치겠소."
순간 혁련소천의 얼굴에 햇살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귀검사랑의 손을 굳게 거머쥐었다.
"고맙소, 귀검사랑!"
귀검사랑은 빙그레 웃었다.
"자, 이제 천문으로 갑시다."
"그럴 필요없소."
바람결에 실려온 조용한 한 마디.
"......!"
"......?"
혁련소천과 귀검사랑은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저편에 후리후리한 키의 사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놀랍도록 준수한 절세의 미청년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준수한 얼굴에 긴 상처 하나가 나 있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쪽 옆구리에는 사람 하나가 전신을 축 늘어뜨린 채
들려져 있었다.
그 순간 다가오는 청년의 얼굴이 노을 밖으로 확연히 드러났다.
돌연 혁련소천의 전신에 한 차례 폭풍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일점홍!"
오오...... 일점홍!
비록 남장을 하고 있으나 그는 분명히 일점홍이었다.
"사...... 살아 있었구나."
외침과 더불어 혁련소천의 신형이 퉁기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오랜만이오, 천주!"
두 눈 가득 뿌연 물기를 머금은 채 일점홍은 씨익 웃었다.
"어떻게 된 거냐? 이 상처......."
혁련소천의 손이 일점홍의 얼굴에 난 상처를 더듬고 있었다.
"후후...... 이 상처로 인해 나는 사랑을 얻었고, 나의 인생을 찾
았소. 내게는 고마운 상처라오."
"......?"
혁련소천은 그의 말 속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으나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과 만났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음으로.......
"천주, 천문에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소."
"무엇 때문......."
혁련소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일점홍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인물을 땅에 툭 떨어뜨렸다.
비로소 혁련소천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인물로 향했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제갈천뇌!"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으나, 오오! 어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으랴!
제갈천뇌, 바로 그였다.
혁련소천은 경악 어린 눈길을 일점홍의 얼굴에 꽂았다.
"어떻게 잡았나?"
일점홍은 애매모호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후후후...... 살수(殺手)들의 비밀은 함부로 묻는 것이 아니오."
"죽었나?"
"죽지는 않았소. 그리고 조금 전 검천의 냉유성과 겁천독후 천예사를 만났었소."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그래서?"
"그들은 검천과 독형제신궁으로 돌아갔소. 그리고 천주의 부름이
없으면 영원히 강호를 밟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겼소."
"음......."
혁련소천은 무겁게 침음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후...... 그는 제갈천뇌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깨워라!"
기다렸다는 듯 곧장 한 줄기 지풍이 일점홍의 손끝에서 발출되었다.
슈욱―!
퍽!
제갈천뇌의 몸이 지풍에 격중되며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제갈천뇌의 눈까풀이 힘없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의 흐릿한 시선 속으로 가장 먼저 혁련소천의 얼굴이 쏘아져 들
어왔다.
허나 놀람 대신 씁쓸한 고소 한 줄기가 그의 입가로 번져 나왔다.
"역시...... 대종사는 나보다...... 위에 있었구료......."
혁련소천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후회하는가?"
"후회......?"
제갈천뇌는 메마른 웃음을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후회하지는 않소. 다만...... 천운이 나에게 따라주지 않았음을 원망할 뿐......."
그는 텅 빈 동공을 하늘로 향하며 거듭 중얼거렸다.
"나는 이 순간에도 대종사에게 두뇌면에서는 졌다고 생각하지 않
소. 다만 내가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종사가 가지고 있는 무공
이 절반만큼도 내게는 없었다는 것이오."
"......!"
혁련소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텅 빈 제갈천뇌의 시선이 혁련소천의 얼굴을 더듬었다.
"부탁이 있소, 대종사!"
혁련소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천뇌!"
"스스로...... 죽도록 해주시오."
혁련소천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런 말이 나올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락한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혁련소천은 자신의 몸에서 살점 한 덩어리가
베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아무리 배신자라 하나 그는 한때 가장 신뢰했던 심복이자 오른팔
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아픔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휘이이잉......!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으로 맞이하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놓았다.
대여섯 걸음 걸어갔을까?
"감사하오, 대종사!"
말, 그리고.......
퍽!
혁련소천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잘 가거라, 제갈천뇌......!'
휘이이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혁련소천의 입술이 떼어지며 조용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일점홍!"
"......!"
"그의 시체를 타인이 볼 수 없게끔 해라."
"......?"
"천문...... 제갈천뇌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이다."
"......!"
비로소 일점홍은 깨달았다.
힐끗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 속에 호수의 푸른 물이 한껏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풍덩 하는 소리와 더불어 새파란 물방울이 어지
럽게 튀어올랐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사망혈리(死亡血鯉)가 떼를 지어 한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존궁(尊宮).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 속에 두 사람이 마주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단우비,
말 그대로 하늘인 이 무림 최고의 인간(人間).
혁련소천,
더 이상 오를 수 없이 부상한 당대 최고의 효웅(梟雄)!
이것이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눈빛은 너무도 잔
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타오르는 불꽃 한 점 없이 그대로 대해(大海)의 심유함같
은 눈빛들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문득 단우비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영호풍!"
"......!"
"그대는 훌륭히 다섯 가지의 약속을 지켰다."
"......!"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약속을 지키겠다."
혁련소천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문득 단우비의 두 눈 어둑한 곳에서 유현한 광채 한 줄기가 흘러
나왔다.
"오늘을 넘기기 전...... 그대에게 제구대 제일신마의 자리를 승
계하겠다!"
― 제구대 제일신마의 자리를 승계하겠다!
오늘은 천하무림의 주인이 뒤바뀌기 하루 전날인 것이다.
"허나 약속해 다오. 단옥교를 너의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처음으로 혁련소천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물론입니다."
순간 날벼락 같은 광소가 단우비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와하하하하......!"
지난 세월 가슴 속에 간직해 왔던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쏟아 내
려는 듯 광소는 무척이나 오랫동안 이어지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마음껏 웃어 보았기 때문인가?
혁련소천을 응시하는 단우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소천이라 했었지?"
"그렇습니다."
"굳이 그 이름을 내세우려 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본명이 있으면서도 말일세."
"혁련소천이 아닌 영호풍으로서 성장했다면...... 아마 지금쯤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흠......."
단우비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 자네는 노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노부와 무공을 비교해 보고 싶다는 부탁이겠지?"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셨습니다."
문득 단우비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락하겠다. 천하를 통틀어 오직 자네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
"......!"
단우비는 오른손을 가슴 앞에 세우며 조용히 말했다.
"덤벼라, 소천!"
"이곳에서 말입니까?"
단우비는 싱긋 미소했다.
"위대한 강자(强者)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혁련소천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한 수 배우겠습니다."
순간 단우비는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헛헛헛...... 조심하게. 늙었다고 얕보았다간 큰일날 걸세."
"후후...... 어찌 감히......."
그리고 싸움은 시작되었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심지어는 두 사람이 그 날 비무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끝나지 않는 잔치 없듯, 결과 없는 싸움은 없다.
허나,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말라.
기억해야 할 것은 단 두 가지.
그 날의 그 두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시대 최고의 영웅(英
雄)과 기인(奇人)이었다는 것과 구천십지제일신마의 무적신화(無
敵神話)는 끝내 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난세(亂世)를 그려본 이 이야기는 이렇게 그 막(幕)을 드리우고 있었다.
waf - 대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