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104장 혈육지정(血肉之情)의 막(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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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부(將軍府).>
금릉(金陵)에서 천궁만을 뒤에 두고 수백 채의 고루거각(高樓巨
閣)이 광대한 대지 위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으니.......
최고(最高)의 부(富)와 왕족 이상의 권세와 영화를 자랑하는 대명
최고(大明最高)의 명문(名門)이 바로 이곳이다.
우두두두......!
구월(九月) 초여드렛날의 석양 무렵, 웅대 화려한 마차 하나가 장
군부의 육중한 대문 안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군마천위(群魔天威) 만웅앙복(萬雄仰伏).>
마차의 깃발에는 그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승룡무후전(昇龍武候殿).>
장군부의 중심부에 십팔 층(十八層)의 고루거탑(高樓巨塔)은 오늘
도 금릉 전체를 도도히 굽어보며 그 육중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
다.
천위대장군 영호대인은 호피를 씌운 푹신한 태사의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앞에서 막 절을 마치고 몸을 세우는 청년의 얼굴을 물
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청년은 다름 아닌 혁련소천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혁련소천은 그 자리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호대인은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컸구나. 무척 많이......."
칠 년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의 음성 또한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칠 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으니까요."
"음, 전신에 흐르는 기도가 완연한 대종사의 위풍이다."
혁련소천은 싱긋 미소했다.
"아버님의 아들인데 어련하겠습니까?"
"......!"
극히 짧은 순간이었으나 영호대인의 두 눈에 기이한 빛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예의 물처럼 고요한 눈빛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칠 년 만에 장군부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냐?"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탁?"
혁련소천은 진지하게 말했다.
"현 사태로 보아...... 중원에 흩어져 있는 금위부와 신비각고수
들은 조만간에 구천십지만마전과 충돌할 것이 분명합니다."
"음?"
영호대인은 일순 흠칫했다.
허나 곧 깨닫는 바가 있어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군. 옥산랑이 이야기해 주었을 테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선 네가 그 일을 알 리가 없다."
"소자에게 그 말을 해준 사람은 제일신마 단우비입니다."
"......!"
영호대인의 얼굴에 경악이 솟았다.
"그렇다면...... 단우비는 이미 이쪽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일순 영호대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단우비의 의도는 무엇이라더냐?"
"그는 황궁과의 혈겁을 원치 않습니다."
영호대인은 태사의에서 등을 뗐다.
"혈겁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그는 황명이 철회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영호대인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렵다."
"......?"
"황제의 성격은 말 그대로 대쪽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단
내뱉은 말을 번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음......."
혁련소천은 잠시 묵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럼 전혀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없다."
혁련소천은 문득 눈빛을 이채롭게 번쩍였다.
"있을 것입니다."
"음?"
"이 세상에 절대 완벽한 일이나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황제께서도 반드시 빈틈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 아버님은 그 빈틈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영호대인은 문득 고소를 머금었다.
"너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구나."
혁련소천이 그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것은 그때였다.
영호대인은 흠칫 눈썹을 모았다.
"무슨 뜻이냐?"
바닥과 이마와의 간격을 두 치 가량 남겨둔 채 혁련소천의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버님, 이십사 년 만에 만난 아들의 부탁입니다."
"이십사 년......?"
영호대인의 눈에 미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
혁련소천은 허리를 꼿꼿이 편 뒤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이어 그는 영호대인에게 두루마리를 공손히 내밀었다.
"읽어 보십시오."
"......?"
영호대인은 두루마리를 받아 즉시 펼쳤다.
서너 줄이나 읽었을까.......
"......!"
돌연 영호대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한 차례의 격렬한 경련이 그의 전신을 휩
쓸고 지나갔다.
놀랍게도 두루마리에는 적용사문에게서 들었던 혁련소천의 출신내
력 등이 너무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루마리를 거칠게 움켜쥔 채 격정에 출렁이는 영호대인의 시선이
곧장 혁련소천의 얼굴로 옮겨졌다.
"너......."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가늘게 떨려 나오는 혁련
소천의 음성이었다.
"......!"
영호대인은 한동안 뚫어지게 혁련소천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돌연
탄식 어린 신음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래......."
다음 순간 영호대인의 시선이 감회의 빛을 담은 채 천장으로 옮겨졌다.
"이십사 년 전...... 나는 이미 나의 아들이 누군가에 의해 바꿔
치기 당했음을 알고 있었다."
"......!"
"왜냐하면...... 나의 아들...... 그 아이는 태어났을 당시 가슴
에 일곱 개의 붉은 점이 있었으나 나중의 아이는 그것이 없었어......."
"......!"
혁련소천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래...... 일곱 개의 붉은 점...... 내 가슴에는 확실히 그것이 있다!'
목구멍까지 솟구쳐 오르는 그 말을 간신히 눌러 삼키며 그는 계속
해서 영호대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가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은......
사랑하는 아내...... 그녀가 그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아내에게 그 아이가 가짜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충격을 두려워했던 것이지......."
문득 별빛같은 광채가 영호대인의 눈 깊숙한 곳에서 흘러 나왔다.
"아이가 바뀐 것으로 미루어 나는 모종의 음모가 꾸며졌음을 느꼈
다. 자연히...... 나는 그 아이에게 정(情)을 느낄 수 없었다."
"......!"
"해서...... 아내가 죽은 이후 나는 그 아이에게 금제를 가해 선
천적으로 신체가 약한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그것을 빙자해
서...... 나는 그 아이를 천계선사에게 떠맡겼던 것이지."
혁련소천의 눈에 문득 기광(奇光)이 어렸다.
"그럼...... 소자가 영호풍, 그를 대신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미 내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
혁련소천은 경악과 의혹을 한꺼번에 느껴야 했다.
"알고 계셨으면...... 어째서 모른 척하셨습니까?"
영호대인의 얼굴에 언뜻 연민의 기색이 떠올랐다.
"너를 보는 순간...... 너의 얼굴에서 언뜻 아내의 얼굴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사실을 숨겨온 데 대한 죄책감같은 것이지......."
"......."
"허나...... 솔직히 말해서 너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하늘이라도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영호대인의 눈에서 따스한 빛이 흘러 나왔다.
"너는 모를 것이다. 그날......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정
(情)을 억누르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썼는가를......."
혁련소천은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가 가슴 속에 뭉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소자를...... 인정하시겠습니까?"
영호대인은 빙그레 웃었다.
"인정한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 영호풍이니까."
혁련소천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순간 그는 분명히 들었다.
응어리진 감정이 산산이 폭발하는 찬란한 소리를.......
아아...... 그것은 감동(感動)!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벅찬 감동!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한 마디뿐이었다.
"아버님......."
"네 말대로 황제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역시......."
"그것은 바로 황제의 천금인 자하공주이다."
"자하공주......!"
순간 혁련소천의 뇌리에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그래...... 기억난다.
봉황금시를 취하기 위해 만났던 그 귀여운 소녀.......
후후...... 지금쯤 무척 아름다운 처녀로 성숙해 있을 테지.......
혁련소천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거리면서 영호대인은 빙그레 웃었다.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운이 따라주는 녀석이니까......."
"별 말씀을......."
혁련소천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여기를 나가는 즉시 신비각주를 만나 보아라. 그는 무조
건 너를 도와줄 것이다."
순간 혁련소천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가 누구이길래......?"
영호대인은 의미 깊은 미소를 피어올렸다.
"그는...... 바로 너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예?"
혁련소천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옥산랑, 그녀가 바로 신비각주이다."
"그럴 수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
얼떨떨해 있는 혁련소천의 얼굴 위로 문득 햇살같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렇군요. 일이 그렇게 된 것이군요."
비로소 확연히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영호대인은 혁련소천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풍아......."
"......!"
혁련소천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너와 기나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조심해라. 그리고...... 네 뒤에는 항상 이 아비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혁련소천은 빙긋 웃었다.
"아버님은 소자의 가장 자랑스러운 자존심입니다. 이젠 어떤 일이 생겨도 자신있습니다."
"음!"
영호대인은 한 차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가볍게 손뼉을 두드렸다.
슷!
순간 돌연 한 인영이 영호대인의 오른쪽에 불쑥 나타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땅 속에서 불쑥 솟구쳤는지 도무지 종잡
을 수 없는 신법의 그 인영은 흡사 나무토막을 깎아 만든 듯 극히
무표정한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혁련소천의 기억 속에 무척 인상깊게 남아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피요궁!'
그는 칠 년 전 혁련소천을 막아선 적이 있는 바로 그 피요궁이었다.
영호대인은 피요궁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피요궁!"
"말씀하십시오."
"너는 이 순간부터 풍아의 종이다."
"알겠습니다."
"주인이 원한다면 너는 무엇이든 복종해야 한다. 설혹 너에게 죽음을 명령하더라도."
"명심하겠습니다."
세 번의 대답을 하는 동안 피요궁의 표정에는 티끌만큼의 동요도 없었다.
영호대인의 시선이 다시 혁련소천의 얼굴로 옮겨졌다.
"피요궁에게는 한 가지 특수한 능력이 있다. 장차 너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혁련소천은 밝게 미소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녀석......."
딱 벌어진 혁련소천의 어깨 위로 부정(父情)을 가득 담은 따스한
눈길이 아낌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