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102장 영원한 신화(神話)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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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백변귀천는 극도의 경악지색을 감추기 위해 짧은 순간 젖먹던 힘
까지 모조리 짜내야만 했다.
"지금 그 말씀......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그토록 애를 썼건만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오는 것만은 억제할 수
가 없었다.
단우비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이다."
백변귀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나 역시 구천의 주인 중 한 명이거
늘 너무 지나친 모욕인 듯하오."
단우비는 천천히 팔짱을 끼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어리석은 놈,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다니......."
그때 어디선가 나직한 웃음이 흘러 나와 단우비의 말을 받았다.
"후후후...... 그것은 그 자가 스스로 자신을 과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백변귀천은 몸이 급히 빙글 돌았다.
한 사람......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그저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으로 느껴지는 그
사람...... 일신에는 타는 듯 붉은 홍의를 걸쳤고, 꽤 준수한 얼
굴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변장한 혁련소천이었다.
"너는...... 누구냐?"
백변귀천이 묻자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순간 백변귀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록 얼굴이 다르다고는 하나 그 음성은 너무도 귀에 익어 있었던 것이다.
"다...... 당신은......."
혁련소천은 대답없이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얼굴 속의 또 다른 얼굴!
순간 백변귀천은 흡사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눈 앞의 저 얼굴에는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고귀한 귀풍(貴風)과 천부적인 듯한 위엄이 서기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 대종사......."
백변귀천은 취한 듯 크게 비틀거렸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나를 대종사라 부르는구나, 백변귀천!"
"사...... 살아 있었구료!"
"잊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나는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
백변귀천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전신을 휘감아오는 극도의 공포(恐怖)! 그것이 체념과 절망으로
뒤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득 백변귀천의 눈빛이 흐려지며 절망 어린 탄식이 흘러 나왔다.
"후후...... 불안했었소. 무척이나...... 대종사의 시신을 직접 본 적이 없었기에......."
혁련소천은 기복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갈천뇌의 음모는 완벽했다. 다만 내가 그 음모에 휘말렸으나
죽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을 뿐이다."
백변귀천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만약 제갈천뇌가 이 일을 안다면......."
"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당했던 것처럼 그 역시 당하게 될 것이다."
백변귀천은 암울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졌소. 확실히 대종사는 무서운 사람이오. 허나......."
그는 문득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마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자신의 천령개를 번개같이 후려쳤다.
퍽!
순간 피와 뒤섞인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시체 하나가 그 자리에 그대로 거꾸러졌다.
"......."
혁련소천은 동요없는 눈빛으로 백변귀천의 시신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때 단우비의 음성이 그의 귓속에 잔잔히 파고들었다.
"자네는 어째서 저 자의 자결을 방관했는가?"
혁련소천은 느릿하게 단우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관용이었습니다."
"관용이라......."
"조금 전 제일신마께서 빙허잠을 놓아준 일과 같은 성질의 것이지요."
"흠......."
단우비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의 야망...... 노부는 자네를 처음 보던 그 날 자네의 전신에서 읽었다."
"......."
"자네는 제 구대 제일신마가 되고 싶은가?"
"......."
혁련소천은 말없이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단우비의 눈빛이 문득 깊숙이 가라앉았다.
"노부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제일신마가 될 수 있다."
"......."
"허나......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피(血)가 요구되고 있다."
"......!"
단우비는 문득 깊숙한 신광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다섯 가지 문제를 내겠다."
"......!"
혁련소천은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단우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단우비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헛수고다."
"......?"
"자네는 노부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
혁련소천은 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우비...... 과연 거목(巨木)은 거목이구나.......'
"어떡하겠는가? 다섯 가지 문제를 듣겠는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겠는가?"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른 방도라 하면...... 제일신마 당신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뿐이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저는 반드시 제 구대 제일신마의 자리에 오릅니다."
"제일신마의 보좌는 위대한 자리이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가 계속 승계되는 한 그 자리에 앉
은 사람은 영원히 무적이라야 합니다."
"음......."
"자리에 앉았을 때에도 무적이고, 자리를 떠나도 그 사람은 무적
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옳은 말이다."
단우비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차분히 말을 계속했다.
"만약 당신과 내가 싸운다면 그 어느 쪽이든 패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럴 테지."
혁련소천은 문득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나는 제일신마의 신화(神話)가 깨어지길 원치 않습니다."
결론이 내려졌다.
"좋다!"
밝은 미소가 단우비의 얼굴 전체로 번졌다.
일찍이 그의 얼굴에 이토록 시원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섯 가지 문제를 내겠다."
"듣겠습니다."
단우비는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첫째...... 한 달 이내에 빙허잠과 만후천리, 황보강의 수급을 노부에게 가져오너라."
"두 번째는?"
"구천과 십지의 현 주인들 중 과반수 이상을 자네의 동조자로 삼아라. 기간은 일 년."
혁련소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를 말씀하십시오."
"하토의 잔재 세력과 새북사사천을 만리장성 밖으로 영원히 추방시켜라."
"계속하십시오."
"네 번째...... 만마전에 대한 황궁의 간섭을 제거하고 황명(皇命)을 철회시켜라."
"......."
"다섯 번째...... 천붕군도를 만마전에 귀속시켜라. 만마전의 권
위는 해상까지도 장악해야 한다."
"......!"
혁련소천은 잠시 침묵했다.
단우비는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떡하겠는가?"
혁련소천은 문득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그 일을 모두 처리한다면 나는 자연스럽게 제일신마
의 보좌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나...... 허락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영원한 제일신마이기 때문입니다."
단우비는 혁련소천을 응시하며 의미 깊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 단우비...... 자네의 성공을 빌겠다."
"물론 성공할 것입니다. 일단 마음먹어 실패한 적은 없었으니까......."
순간 단우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좋다. 매우 좋다."
만약 단우비를 아는 그 누군가가 있었다면 수십 번 귓구멍을 후벼
파야 했으리라.
왜냐하면 백십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 단우비가 소리내어 웃은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단우비는 야릇하게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
"단옥교,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뜻밖의 물음에 혁련소천은 언뜻 의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는 곧 담담하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미인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그 아이가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가?"
혁련소천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녀가 아닌 이상 어찌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가?"
혁련소천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나 역시 남자 아니겠습니까?"
"혹...... 그 아이를 취할 생각은 없는가?"
혁련소천은 문득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사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는 언제든지 내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단우비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두 가지라면......?"
"첫째...... 나는 그녀를 이용해 환심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후후...... 어차피 내가 제일신마가 되면 그녀는 마땅히 나의 여
인이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으하하하......."
순간 우레같은 대소가 단우비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노부 백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자네처럼 패기 넘치는 친구는 처음이다."
또 한 차례의 대소를 터뜨린 후 단우비는 선뜻 엄지를 추켜세웠다.
"영호풍! 자네는 가장 위대한 제일신마가 될 것이다......!"
혁련소천은 싱긋 웃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만남......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진 두 하늘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