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99장 운명(運命)! 운명(運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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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보다 지루한 일은 없다.
특히 어떤 일이 잘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에게 있어 기다림이란 더
욱 지루할 수밖에 없다.
허나 사흘이 흐르는 동안 혁련소천은 조금도 지루하다거나 초조한
느낌을 가져보지 않았다.
붕대를 풀고 나면 자신의 고쳐진 얼굴이 어떠할까 하는 궁금증을
품어볼 만도 하건만 그는 도대체 그런 궁금증조차 느껴본 적이 없
었다.
지금 혁련소천의 손이 얼굴의 붕대를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조금
답답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소천, 자는가?"
문 밖에서 돌연 담대우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혁련소천은 흠칫 얼굴에서 손을 뗐다.
"아닙니다. 헌데......?"
"급한 일이 생겼으니 잠시 나와 주어야 되겠네."
"급한 일이라면?"
"어서 나오기나 하게."
"......?"
혁련소천은 침상에서 내려와 산뜻한 백삼을 걸쳐 입었다.
옷은 악소채가 만들어 준 것으로 그의 몸에 꼭 맞았다.
달빛을 밟으며 담대우리는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었
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혁련소천이 밖으로 나섰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순간 담대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걸음을 떼놓았다.
"따라오게."
"......?"
"한 가지 충고하건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흥분해서는 안되네."
"......?"
혁련소천은 갈수록 궁금증을 더해갔다.
허나 담대우리는 그 순간 이미 저만큼 앞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 분이 저토록 긴장한단 말인가?'
어느 전각의 지하에 있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담대우리를 따라 막 석실에 들어서는 순간 혁련소천은 흠칫 놀랐다.
석실 중앙에 놓여 있는 침상을 중심으로 악군초와 적천룡, 독심광
의 등 삼 인이 둥그렇게 둘러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표정 역시 담대우리 못지않게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
혁련소천은 의혹 어린 눈길을 그들의 얼굴에서 침상으로 옮겼다.
"......!"
순간 혁련소천의 눈과 몸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침상 위에는 온통 피투성이인 혈인(血人) 하나가 죽은 듯 누워 있
었는데, 그는 성한 곳이라곤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두 눈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눈알은 온데간데없고 시커먼 구
멍 두 개만이 휑하니 뚫려 있을 뿐이었다.
실로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혁련소천은 한 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사...... 사문!"
놀랍게도 침상 위의 혈인은 바로 적용사문이었던 것이다.
"이...... 이게 웬일이냐?"
혁련소천은 침상을 향해 퉁기듯 몸을 날렸다.
순간 담대우리가 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소천! 흥분하면 안 된다!"
그러나 혁련소천은 담대우리를 밀쳐내며 순식간에 침상가로 다가
섰다.
"사문!"
"......."
적용사문은 이미 숨이 끊어진 듯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어찌 되었소?"
독심광의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탄식하듯 말했다.
"잘해야 반 시진을 넘길 지 모르겠네."
"반 시진!"
순간 혁련소천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곤두섰다.
"살리시오!"
"소천......?"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리시오! 반드시......!"
"글쎄 손을 쓰기엔 이미 너무......."
"살리라고 말했소!"
혁련소천은 으스스한 혈광(血光)을 뿜어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
다.
이때 담대우리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조용히 얹혀졌다.
"소천, 마음을 가라앉히게. 흥분한다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수는 없지 않은가?"
"......!"
혁련소천은 어금니를 으스러지도록 짓깨물었다.
안다!
어찌 모르겠는가?
허나 그렇게 해서라도 살리고 싶은 것이 이 혁련소천의 마음이란
말이다!
그때 독심광의의 한숨 섞인 음성이 혁련소천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소천, 이 친구의 정신을 잠시 되찾게 할 수는 있네. 허나 그렇게
하면 채 일 각을 넘어 살지 못할 것이네."
"......!"
"결정은 자네가 하게."
"......!"
혁련소천의 눈에서 순간 고뇌스러운 빛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기를 얼마간, 혁련소천의 두 눈을 스르르 감으며 한 마디 묵
직한 음성을 내뱉았다.
"깨우시오."
"그렇게 하지."
독심광의는 대답과 함께 품에서 하나의 옥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옥병 속에서 검은 환약 한 알을 꺼내더니 곧이어 적용사문의
입 속으로 사정없이 쑤셔넣었다.
타타탁!
그리고는 적용사문의 가슴 몇 군데 혈도를 빠르게 두드리더니 선
뜻 한 걸음 물러섰다.
"곧 깨어날 것이네, 소천."
"......!"
혁련소천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때 적천룡이 나직한 어조로 그에게 말을 꺼냈다.
"이 친구가...... 군마천 적용사문이오?"
"그렇소."
"으음...... 누군지 지독한 살수를 쓴 모양이오. 저런 모습으로
근처의 산중에 쓰러져 있는 것을 수하들이 데려온 것이오."
"......!"
혁련소천은 깊숙한 눈빛으로 적용사문만을 응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으...... 음......."
이때 미약한 신음과 더불어 적용사문의 몸이 꿈틀 움직였다.
그가 깨어난 것이다.
헌데 그는 깨어나자마자 허우적거리며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천주...... 찾아...... 주오...... 천주를...... 찾아 주오......."
부르짖음이라곤 하나 그것은 주위 사람이나 간신히 알아들을 만큼
미약한 음성이었다.
허나 그렇듯 미약한 부르짖음도 혁련소천의 고막에는 우레 소리
이상의 충격으로 와닿았다.
"......!"
혁련소천은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문, 나 여기에 있다."
적용사문의 허우적거리던 동작이 돌연 뚝 멎었다.
"누...... 누구...... 시오?"
"사문, 내 음성을 잊었는가?"
순간 적용사문의 전신에 폭풍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천주...... 분명히...... 천주의 음성이다......!"
아아...... 죽음 직전에 만난 사람이 그렇게도 반가울까?
"여...... 역시 살아 있었군요...... 내...... 그럴 줄 알았
소...... 천주는...... 절대...... 죽을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오......."
멎었던 손이 다시 허우적거리며 무엇인가를 갈급히 잡으려 했다.
허우적거리는 그 손을 혁련소천의 손이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
잡으려 했던 것이 바로 혁련소천의 손이었던가?
순간 눈물도 아닌 핏물이 혁련소천의 눈두덩 밖으로 흘러 내렸다.
"바...... 반갑소...... 천주...... 못 보고 죽는 줄...... 알았더니......."
"......!"
혁련소천의 눈가에 순간 잔물결같은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문......."
"천주......."
"말해라. 누가 그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흘러 나오는 음성은 무섭도록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순간 적용사문은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한서린 음성을 내뱉았다.
"제...... 갈...... 천...... 뇌...... 바로 그 놈이...... 나를......."
"제갈천뇌!"
"홍포구마성이...... 죽고...... 공손무외도...... 죽었소......
현 천주가...... 가짜임을 ...... 안 사람...... 모두...... 그의 손에...... 죽었소......."
"......!"
혁련소천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결국 그 놈이......!"
이때 문득 피로 얼룩진 적용사문의 입가에 한 줄기 흐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주......."
혁련소천은 흠칫 정신을 가다듬었다.
"말해라, 사문!"
"나...... 무서운 비밀을 알아냈소......."
"비밀?"
"천주의...... 비밀...... 그 상상도 못할...... 비극의...... 운명......."
혁련소천은 눈썹을 모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사문?"
적용사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천주...... 나는...... 곧 죽게 되오...... 그러니 내 말을...... 막지 말아주오......."
"사문......."
"그러니까 이십삼 년 전...... 장군부에서 한 명의 아기가...... 태어났소...... 그 아기의 이름
은...... 영호풍...... 영호풍......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
"......?"
"무서운...... 마수가...... 그 아기에게 뻗쳤소...... 누군가 그
아기를 다른 아기와 바꿔치기 하고...... 영호풍...... 그 아기는
강호에...... 버려졌소......."
"......!"
적용사문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장군부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 영
호풍에 관한 것이었다.
헌데 혁련소천은 까닭없이 자신의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기는...... 강호의 세파 속에서...... 고아라는 운명으로 칠
년을 보냈으며...... 어린 나이로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소......."
"......!"
혁련소천의 눈이 커졌다.
"당시...... 혈뇌사야 혁련후의 수제자...... 제갈천뇌가 그 아이
를 발견...... 무서운 야망을 지닌...... 일곱 명의 기인에
게...... 그 아이를...... 데려갔소......."
"......!"
커진 혁련소천의 눈에 커다란 경악감이 솟구쳤다.
"일곱 기인은...... 그 아이를 대단히 흡족하게 받아들였고......
십 년간 그 아이를...... 키웠소......."
"......!"
혁련소천은 갑자기 숨이 꽉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적용사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혁련소천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이어지는 그 이야기는 분명히 혁련소천에 관한 것이었다.
"......제갈천뇌 등 일곱 기인은...... 천주...... 당신을 이
용...... 강호패업을 이루려 했고...... 결국 혈왕문에서...... 당신은...... 당했던 것이오......."
"......!"
"당신과 바뀌어진...... 그 아기...... 가짜 영호풍...... 그 자
야말로...... 제갈천뇌의 아들이오...... 당신은 진짜...... 영호풍이고......."
혁련소천은 갑자기 머리 속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는 충격을 받았다.
오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내가...... 내가 영호대인의 셋째 아들...... 진짜 영호풍이라니......
오오, 하늘이여.......
어찌 한 인간의 운명(運命)을 이렇듯 철저히 농락한단 말이오.......
운명이여...... 운명이여.......
"제갈천뇌...... 이 모든 음모와 흉계...... 바로 그가 꾸민...... 것이오......."
적용사문의 음성이 급격히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사문!"
"아직 한 가지...... 제갈천뇌...... 그의 진정한 신분은......
팔십 년 전...... 단우비에게 멸망한...... 신기문의...... 마지막 후예......."
가쁘게 헐떡거리는 숨결을 타고 또 하나의 가공할 비밀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는...... 신기문의 복수와...... 만마전의 패권을 쥐려
는...... 천주...... 당신은...... 그 야망에 휩쓸려...... 희생된...... 사람......."
"......!"
적용사문은 흐려지는 의식을 애써 가다듬으며 사력을 다해 입술을 움직였다.
"천주...... 나 사문......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 한 가지만...... 부탁......."
감싸쥔 적용사문의 손이 급격히 식어가고 있음을 그 순간 혁련소
천은 느끼고 있었다.
"말해라, 사문!"
"희산...... 그 아이를...... 그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겼
다 해도...... 불쌍한 그 아이만은...... 버리지...... 말아...... 주오......."
혁련소천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내 전부를 걸고 약속하겠다! 사문."
"천주...... 혈랑성(血狼星)의 기운이...... 쇠하고...... 천괴성
(天魁星)이 빛나고...... 있소......."
"......!"
"이제...... 천하는...... 곧...... 당신 손에...... 그리고......."
"......!"
"언젠가...... 생각...... 나면...... 무덤가에...... 한 송이...... 난...... 초...... 를......."
그 말을 끝으로 적용사문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사문―!"
그 순간 혁련소천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것이 난초를 좋아했고.......
학(鶴)처럼 고고히 살아가기를 원했던...... 한 위대한 의인(義人)의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