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권 제98장 (98/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98장 과거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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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회마지에서의 세월(歲月)은 너무도 평온히 흘러갔다.

  허나 태풍이 오기 전의 그  기이한 정적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깊

  은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혁련소천은 악소채의 헌신적인 사랑에 깊이 빠져 들어갔고, 그 사

  이에 계절은 한 껍질을 벗어내 어느새 초여름(初夏)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무 침상 위에 혁련소천은 누워 있었다.

  그는 지금 눈부신  햇살 아래 끔찍한 전신의  흉터를 짙게 드러낸

  채 중요한 곳만 살짝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옆에는 독심광의가 신중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순서대로 챙기

  고 있었고, 독심광의 옆에는 만상노군 우문창이 화선지를 펼친 채

  누워 있는 혁련소천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슥...... 스슥......

  광야를 질주하는 한 마리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화선지 위를 미끄

  러지는 모류세필(毛柳細筆).......

  화선지 위에 새로이 드러나는  혁련소천의 모습은 실로 정교의 극

  치를 초월한 것이었다.

  우문창의 이마엔 어느덧 조그만  여러 개의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

  혀 있었다.

  만상노군 우문창은 이 순간  모류세필의끝에 혼신의 힘을 다 기울

  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혁련소천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담담한

  기색으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때 우문창이 붓을 놓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야 됐군."

  "됐나?"

  "그래. 워낙 상처가 깊고 심해서  그것을 모두 그리는 데 너무 많

  은 시간이 걸렸군......!"

  우문창은 독심광의에게 화선지를 내밀었다.

  과연 화선지 위에는 혁련소천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크고 작은  또한 깊고 얕은 상처가 하나도 빠짐없이

  실물과 똑같이 정확한 위치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독심광의는 감탄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림 솜씨는 조금도 줄지 않았군."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독심광의의  눈썹이 돌연 짙게

  찌푸러졌다.

  "......?"

  독심광의의 찌푸림을 본 우문창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지그시 그림을  응시하고 있던 독심광의가  조용히 탄식을 터뜨렸

  다.

  "으음......! 어려울지도 모르겠는 걸......?"

  "어렵다니......?"

  "흠!  원래   노부는  이번  시술이   간단하리라  생각했네.  허나......."

  "......!"

  "실상은 간단하지가 않구만......  상처가 워낙 깊고 험해서 완벽

  히 해낼 수 있을지......."

  그때 혁련소천이 누운 채 담담한 음성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완벽한 옛모습을  찾지 못한다 해도...... 애초부터

  저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니까요."

  잔잔한 물이 흐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순간 독심광의가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소천, 확률은 반반일세. 너무 신경쓰지 말게."

  그는 성큼 시술 상자를 집어 들었다.

  혁련소천은 조용한  미소를 지은 채  독심광의를 바라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신경쓰는 건 소천이 아니라 바로 나로군.......'

  독심광의는 혁련소천의 태연한 모습에 문득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 우문창이 독심광의에게 은은히 초조한 음성을 던졌다.

  "독심 늙은이, 부탁한다......!"

  그 음성 속에서 흔들리는 무한한 격동의 정(情)이 가득 스며 있었다.

  독심광의의 얼굴빛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걱정 말게.  내 평생의 혼을 불어넣을  테니......! 생명을 걸고

  해보겠네."

  우문창은 돌연 독심광의의 어깨를 툭 치며 싱긋 웃었다.

  "바보같은 의원이로군. 생명까지 걸 필요가 있겠나?"

  독심광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렇지! 긴장을 해선 안 된다. 쯧! 내가 왜 이렇게.......'

  독심광의는 독심을 지닌 광의였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성수(聖手)를 지닌  독심(毒心)의 미친 의

  원.......

  허나, 시술받는 인물은 그가 목숨보다 더 아끼는 혁련소천이 아닌

  가.

  또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혁련소천의 전신 수백수

  천 군데의  참혹한 상처, 그것은 실로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다.

  독심광의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혁련소천을 잠시 지그시 바라

  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평생 단 한 번의 그 말을 되뇌었다.

  '신이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그리고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시술상자를 열었다.

  번쩍!

  순간 예리한 빛를 뿜어내는 각종 크기의 십여 개 소도(小刀)가 눈

  부신 햇살 아래로 드러났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소천을 망칠 수도 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의 생명과

  행복이 내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독심광의는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토록 음산하고 매서워 보이던  독심광의의 얼굴엔 지금 이 순간

  일말의 성스러움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기나긴 혼돈(混沌) 속을 헤매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억겁의 암흑 속, 마치  육신을 떠난 혼이 부랑

  (浮浪)하는 천애(天涯)의 끝을  헤매듯 떠돌며 밝음과 어두움조차

  없는 그 기이한 천지간에 그는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토록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가?

  어둠과 혼돈 속에서 혁련소천은 마구 외쳤다.

  그리고...... 오오!

  저기 아득한 곳에서 돌연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

  는 비로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그래! 나의 이름은 혁련소천, 기억이 난다.

  혈랑문 속에서 나는 처참하게 당했다.

  배덕자(背德者)!

  그의 이름은 제갈천뇌.......

  나는 그를 만나야 한다.

  복수 때문인가?

  아아...... 모르겠다.

  허나 왠지 그를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다.

  제갈천뇌......!   제갈......  천뇌......   제......  갈...... 천...... 뇌!

  혁련소천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으음......! 왜 이렇게 답답한가?'

  그것이 혁련소천이 느낀 최초의 생각이었다.

  전신을 조이는 듯한 압박감에 그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그때 흐릿한 가운데  점차 밝아지는 두 눈  속으로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듯 비쳐들고 있었다.

  서늘한 두 눈  가득히 한아름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정다운 그

  녀, 바로 악소채였다.

  "소채......!"

  혁련소천의 가슴 한쪽이 따뜻하게 젖어들었다.

  순간 악소채가 가만히 두 손으로 그의 양 볼을 감싸왔다.

  "소천! 깨어...... 나셨군요."

  흐느낌의 끝을 깨무는 기쁨의 음성이었다.

  혁련소천은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문득 입을 열었다.

  "소채...... 나를 좀 일으켜 주지 않겠소?"

  "예."

  거역할 줄 모르는 여인은 곧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답답하군......."

  악소채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러실 거예요.  지금...... 당신의 전신은  천으로 완전히 감겨 있으니까요."

  "천으로......?"

  "예. 수술한 상처가 완전히 아물려면 아직 보름은 더 있어야 한다

  더군요."

  "으...... 음!"

  혁련소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혁련소천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악소채가  수심어린 얼굴을 들어

  생긋 웃었다.

  "호호...... 지금 당신 모습은 무덤에서 나온 유령같아요."

  "유령이라......?"

  "한 번 보시겠어요?"

  "동경이 있소?"

  "예."

  악소채는 사뿐 걸어가 전신을 비출 수 있는 동경을 들고 왔다.

  혁련소천은 그녀가 들고 있는 동경 속을 바라보았다.

  '이런......! 한심하구나......!'

  동경 속의 그의 몸은 두 눈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비롯하여 전신이

  온통 하얀 천으로 칭칭 동여매 있지 않은가?

  그리고 군데군데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까지...... 그야말로 유

  령이라도 짐 싸들고 도망갈 정도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혁련소천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문득 입을 열었다.

  "독심광의와 만상노군 두 분은 어디 계시오?"

  "예. 그 두 분은 심하게  탈진하셔서 아마 며칠 간은 요양을 하셔

  야 할 것 같아요."

  "음......!"

  혁련소천의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말로는 형언 못할  그 따뜻한 정의 물결,  그는 천으로 감긴 얼굴

  속의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장인 어른은......?"

  혁련소천의 입에서 돌연 엉뚱한 말이 흘러 나왔다.

  '어머? 장인...... 어른...... 이라고?'

  악소채는 순간 자신의 몸이 새털과 같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는 기

  쁨을 맛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를 띠며 말했다.

  "아버님과 담대백부님, 그리고 적백부님은 무슨 일을 상의하고 계세요."

  "......."

  "아마...... 그 풍고적에 대한 일인 것 같아요."

  "음......!"

  유일하게 노출된 그의 두 눈에 침중한 빛이 가득 찼다.

  악소채는 이 순간 고즈넉한 자태로  서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

  의 나삼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두 눈 가득히 떠오른 기쁨의 잔물결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화련과 같은 붉은 입술이 살포시 열렸다.

  "소천......!"

  "......?"

  "기뻐요."

  "뭐가......?"

  "뭐든지요. 그냥...... 모든 것이 다 기뻐요."

  혁련소천은 명절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

  심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소채, 이제 보니 그대는 싱거운 여인이구료......."

  "그래도 좋아요. 당신만 제 곁에 있어 주신다면......."

  사르륵......

  악소채는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 위에 가만히 얼굴을 파묻었다.

  "소채......!"

  "소천......!"

  말이 길다고 해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리라.

  혁련소천은 가만히 칠흑과 같은 악소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여인...... 너는 완전한 나의 여인이다!'

  살...... 랑......!

  초하의 싱그러운 녹색바람이 그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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