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권 제96장 (96/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96장 비사(秘事)는 밝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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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밀실(密室).

  담대우리는 침중한 표정으로 맞은편 인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쩍 마른 몸집의  황의노인(黃衣老人)는 전신에 강인함과 더불어

  강퍅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백검무회마 적천룡!

  무회마지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문득 담대우리가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말해  주시오.  적형께서  노부를  긴히 보자한  이유가  무엇인지......?"

  적천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진중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담대형께서도 이미 노부가 보낸 서찰을 통해 약간은 짐작하고 있

  을 것이오."

  담대우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렇다면......  설마  칠십  년  전  장강(長江)에서의  그  일

  을......?"

  "바로 그 때문이오."

  순간 담대우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 그것에 관해 알아냈소?"

  "약간."

  담대우리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누구요? 그날의 흉수(凶手)가......?"

  적천룡은 차분히 말했다.

  "담대형. 우선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시오."

  그 말에 담대우리의 눈살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어찌...... 진정할 수 있겠소?  노부...... 칠십 년 동안이나 한

  (恨)이 맺혀 있는 그 일을......."

  그때였다.

  "담대형만 그 일에 연관된  것이 아니오. 나, 악군초 역시 담대형

  못지않게 한 맺힌 칠십 년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오."

  침통한 음성과 더불어 한쪽 벽의 휘장이 돌연 걷히면서 위맹한 모

  습의 노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십지 중 하나인 천룡보의 보주 천룡제신마 악군초였다.

  그를 보는 순간  담대우리의 눈 깊숙한 곳에  반색의 빛이 스쳐갔

  다.

  "악형......."

  악군초는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우선 앉읍시다, 담대형."

  "음...... ."

  담대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어 그는 한 차례 심한 기침을 터뜨리며 적천룡을 응시했다.

  "쿨록...... 쿨록...... 적형...... 노부가 실망하지 않도록 충분

  한 설명이 있기를 바라오."

  적천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이어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십칠 년 전에 있었던 장강대혈겁의 흉

  수는 모두 세 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

  "그 중 한명은 생사천주 만후천리."

  담대우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두 명은?"

  "자소천주 빙허잠...... 그리고 신마루주 황보강이오."

  "......!"

  담대우리는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뜩이나 병색 짙은  그의 얼굴이 이 순간  밀납처럼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아들과  단우비  전주의  아들을 죽인  놈

  이...... 바로 그 세 명이란 말이오?"

  다짐 받듯 되묻는 그의 두 눈이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적천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돌연 그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솟아났다.

  "어떤 놈이냐?"

  동시에 그는 앉은  채로 빙글 몸을 돌리더니  연속 삼 지(三指)를

  퉁겨냈다.

  파파팍!

  벽에 세 개의 구멍이 뚫리는 순간.

  스스......!

  마치 벽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오듯 한  인영이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혁련소천이었다.

  적천룡의 눈에 짧은 순간 희미한 경악이 스쳐갔다.

  '무서운 놈이다! 나의 지풍을 몸 그대로 받아내다니.......'

  적천룡은 약간 거무스름한  전신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키며 느릿하

  게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온 놈이냐?"

  혁련소천은 조용히 손을 들어 담대우리를 가리켰다.

  "저 분과 함께 온 사람이오."

  "음?"

  적천룡은 담대우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담대우리는 약간 난처한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외다."

  "음......."

  적천룡은 다시 혁련소천을 응시하며 말했다.

  "조금 전...... 노부가 했던 말을 모두 들었느냐?"

  "들었소."

  순간 적천룡의 눈에 신광이 번뜩였다.

  "들었다면 할 수 없지. 허나...... 워낙 중요한 일인 만큼 당분간

  만 그대를 제압해야겠다."

  슈슉―!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갈고리처럼  오므려진 적천룡의 양 손이 벼락

  같이 혁련소천의 가슴을 찍어갔다.

  그때였다.

  "흐흐...... 애송이 놈, 감히 누구를 어쩌겠다는 것이냐?"

  스산한 음성이 울려 퍼지는가 하더니.

  꽝―!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이 일며 적천룡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 나갔다.

  '욱......!'

  비명이 가슴 속에서 터졌고 양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에 적

  천룡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이...... 이럴 수가......  천하에 누가 이렇듯 어마어마한 내공을.......'

  경악이 일렁이는  그의 시선 속으로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괴노인 하나가  혁련소천과 나란히 서 있는 광경이 쏘

  아져 들어왔다.

  "다...... 당신은?"

  적천룡의 당혹 어린 물음에 괴노인 군청위는 히죽 웃었다.

  "흐흐...... 나의  소형제를 보호하는  수호신 정도로만 알아두어라!"

  적천룡은 미간을 찌푸리며 담대우리를 응시했다.

  "저 자도 담대형을 따라온 사람이오?"

  담대우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무척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구료."

  조소 비슷한 적천룡의 말이 끝나는 바로 그때였다.

  "헤헤헤...... 우리도 나서야겠군."

  "클클...... 그럴까?"

  "아미타불......."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한 마디씩 터지는가 했더니.

  펑!

  우지끈―!

  천장이 뚫어지고 창문이  박살나는가 하면, 심지어 바닥까지 갈라

  지며 도합 여섯 명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광천오제와 상무군이었다.

  "......!"

  적천룡은 잠시 정신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회마지 내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밀실에

  이렇듯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방을 온통 박살내다시피 하면서.......

  한순간 적천룡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나니 돌연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이 놈들...... 감히 나  적천룡을 어떻게 보고 이 따위 수작들이냐?"

  그때 군청위의 눈썹이 징그럽게 움직였다.

  "이 놈들? 설마하니 그 속에 노부까지 포함된 것은 아닐 테지?"

  허나 적천룡의 눈에는 이 순간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

  군청위는 기가 막히는지 실소를 터뜨렸다.

  "으허허...... 이거 아주 웃기는  아이 놈이구나. 제놈의 아비 적

  호도 노부 앞에선 고개 한 번 똑바로 들어본 적이 없거늘 그 자식

  놈이 노부를 능멸하다니......."

  순간 적천룡은 찬물을 덮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 선친을 아시오?"

  그 말에 군청위는 두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알다뿐! 단천양 그 어린 놈과  싸우기 전만 해도 네놈 아비 적호

  는 일 년에 한 번씩 노부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헌데 너같은

  애송이 놈이 감히......!"

  적천룡의 안색이 졸지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럼...... 노인어른이...... 바로......."

  "주둥이 닥쳐라!"

  "......!"

  적천룡은 움찔 입을 다물었다.

  고양이 앞에 쥐! 당대를 주름 잡는 십지마황 중 한 명인 그였으나

  군청위에게만은 숙여야 했다.

  그의 그런 모습이 조금  측은했는지 군청위는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과거야 어찌됐든 지금의 노부는 그저 노마일 뿐이다. 네놈도 그

  렇게 노부를 부르면 된다."

  "어찌 감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아...... 알겠습니다."

  적천룡의 놀라움이란 이 순간 도무지 말로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오! 마교의 대마왕...... 이미 이백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

  진 저 대마왕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그때 담대우리의 음성이 불쑥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적형, 저들에 대해서는  노부가 보장하겠소. 그러니 안심해도 무방할 것이오."

  적천룡은 난감한 표정으로 담대우리를 돌아보았다.

  "허나...... 워낙 중요한 일인지라......."

  "흠......."

  담대우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득  이채 담은 눈길로 악군초를 바

  라보았다.

  이어 빠르게 입술이 달싹거리자 악군초의 얼굴이 순식간에 엄청난

  경악으로 뒤덮였다.

  허나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악군초는 빠르게 냉정을 회복하며 적천

  룡을 향해 한 마디 말을 건넸다.

  "적형, 노부 천룡보의 전부를 걸고 저들의 신분을 보장하겠소!"

  "......!"

  느닷없는 말에 적천룡의 눈이 커졌다.

  허나 일이 이쯤되고 보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적천룡은 무거운 한숨을 불어내며 탄식처럼 말했다.

  "좋소. 모두 앉으시오. 어쩌면  이 일은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

  을지도 모르니까......."

  "백 년 전...... 단천양 어른께서 제일신마의 자리를 현 담대우리

  전주께 물려준 이후에도......  제일신마의 보좌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소. 그들은 다름 아닌 구천과 십지의 전대주인들

  이었소."

  그렇게 시작된  적천룡의 이야기는 무척  장황하게 이어지고 있었

  다.

  "허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늙었고...... 단우비 전

  주의 무공이 오히려 단천양 어른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가 되자 결

  국 모든 암중인들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소."

  "......."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마지막 희망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

  소. 특히 생사천과 자소천,  신마루의 전대주인들이 품고 있는 야

  망은 너무나 큰 것이었소."

  분위기가 점차 무거운 것으로  침잠되어 가고 있는 반면 적천룡의

  음성은 조금씩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들 세  명이 모두 죽은 이후......  생사천, 자소천, 신마루의

  현 주인들은  암중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오면서 무서운 음모를

  획책했소."

  "......!"

  "그들의 의견은...... 구천십지제일신마의 보좌가 반드시 단씨 일

  맥으로 이어져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데에서 일차적인 합의점을

  찾았소."

  "......!"

  "그래서 내린 첫번째  결정이...... 바로 전주의 후예가 태어나면

  자라기 전 철저히 제거한다는 것이었소."

  "......!"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소.  그렇게 해

  서......."

  거대한  음모에 얽힌  비사(秘事)가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었으

  니...... 이어지는 적천룡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게 간추릴 수 있

  었다.

  칠십 년 전의 어느 날.

  단우비의 아들인 단표웅은  친구 세 명과 더불어  한 척의 범선에

  몸을 실은 채 장강을 유람하고 있었다.

  세 명의 친구라 함은 바로 담대우리의 아들 담대황과 적천룡의 딸

  이자 단표웅의 처(妻)였던  적문혜(赤門慧) 그리고 악군초의 아들

  악강휘(岳强輝)였다.

  그들 사 인(四人)은 장강의 풍광에 심취되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헌데 그들을 태운 배가 장강의 중류인 철파진에 이르렀을 때 돌연

  엄청난 사고가 터진 것이다.

  당시 그 배에는 하북성의 화약매매업자인 풍고적이란 인물이 동승

  하고 있었는데 그가 화약을 잘못 간수한 탓에 범선이 그대로 폭발

  해 버린 것이다.

  단표웅외 삼 인은 두말 할  것도 없거니와, 풍고적 등 그 배에 타

  고 있던 백십오 명은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났을 때, 단표웅의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

  진 모습으로 장강하류에서 발견되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 그나마 시신이라도 발견된 사람은 오

  직 단표웅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일 아니오?"

  담대우리의 말에 적천룡은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맞는 말이오. 허나...... 아무도 모르는 일이 하나 있소."

  "음......?"

  "당시의 참사가  그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오."

  "그 누구라면......?"

  "빙허잠과 만후천리, 그리고 황보강이오."

  담대우리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증거가 없지 않소?"

  "증거?"

  적천룡은 문득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흐흐......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당시 단표웅이 장강에

  간 것은 그의 처이자, 노부의 딸이기도 한 적문혜가 졸랐기 때문이오."

  "아......!"

  "그 때문에 노부는 지난 칠십 년 동안 단우비 전주를 볼 낯이 없

  어 여기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한 것이오."

  "음......."

  담대우리 등은 수긍이 간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적천룡은 문득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말했다.

  "헌데...... 그 사건이 있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노부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소."

  담대우리의 눈이 섬광을 뿌렸다.

  "이상한 점이라면?"

  적천룡은 의자 깊숙이 상체를 파묻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당시  그 배의 선주가 신마루주  황보강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냈소. 해서 그 즉시 모종의 조사작업을 착수했소."

  "음......!"

  "조사기간은 장장  육십 년이 걸렸으며,  무회마지의 전 제자들을

  강호인으로 변장시켜 중원에 풀어넣기로 했소."

  적천룡은 기이한 미소를 띠며 말을 계속 이었다.

  "외부인들은 노부가 소극적인 성격이라 무회마지를 떠나지 않는다

  고 말하나...... 실상 노부와 전 제자들은 중원을 모조리 훑고 있

  었던 것이오."

  말이 겉도는 감이 있자 담대우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허면 조사작업의 결과는 무엇이었소?"

  "십이 년 전의  어느 날이었소. 장강중류 철파진  근처를 이 잡듯

  탐색하던 노부의  수하들이 당시 폭발했던  선체의 잔해를 발견한

  것이었소."

  "오......!"

  "그 선체의 잔해는 귀신도 모르게 꺼내졌소...... 노부는 그 속에

  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소."

  "증거라면?"

  "바로...... 생사천과 자소천,  신마루의 고수들이 사용했던 독문무기들이었소."

  담대우리는 퉁기듯 벌떡 일어섰다.

  "그...... 그게 사실이오?"

  "그렇소. 비록  수많은 세월이 흘러  백골뿐인 시신들의 잔해였으

  나...... 그  뼛속에는 분명히  상처를 입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소."

  "그러니까......."

  "화약폭발이 아니었소. 화약폭발은 모든 것을 은폐하기 위한 하나

  의 위장이었을 뿐......  사실 그 전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던 것이오."

  "......!"

  모두의 안색이 핏기를 잃고 말았다.

  실로 치밀하고도 무서운 음모가 그 탈을 벗은 것이다.

  이때 시종 듣고만 있던 악군초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나 폭발 전에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다는 것은 단지 적형의 추측일지도 모르지 않소?"

  적천룡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추측이 아니오. 노부 역시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오."

  "들었다니...... 누구에게서?"

  "풍고적."

  "뭣이?"

  "당시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인물, 그는 아직 살아 있소."

  그때였다.

  광천오제의 눈빛이 일제히 야릇하게 변하는가 했더니 돌연 우문창

  이 황망한 어조로 물었다.

  "그...... 그가 어디 있소?"

  "......."

  적천룡은 순간 말없이 가볍게 손뼉만 두드렸다.

  짝! 짝!

  스르릉―!

  순간 동쪽의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의 두 장한은 중앙의 노인을 부축하고 있었는데 그 노인의 얼

  굴은 불에 덴 듯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게다가 장님인 듯 두 눈은 허연 흰자위만 드러내놓고 있었다.

  이때 독심광의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틀림없다! 저 얼굴의 흉터...... 과거 내가 치료했던 그 얼굴이 분명하다!"

  "풍고적! 아직 살아 있었구나!"

  "찢어 죽일 놈의 늙은이!"

  그러자 우문창과 헌원패 등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노인  풍고적은 흰눈을 뒤룩거리며  무기력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누...... 누구시오?"

  우문창의 입술 사이로 비릿한 살소가 흘러 나왔다.

  "흐흐...... 칠십 년 전 장강에서 만났던 광천오제를 기억할지 모르겠군."

  "광...... 천!"

  풍고적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세차게 떨었다.

  "다...... 당신들...... 죽령도에서...... 나왔소?"

  "물론이다. 융사, 그 놈이 이야기한 죽령도의 붕괴가 이루어졌으니까......."

  "오오......!"

  풍고적은 탄성도 신음도 아닌 괴성을 토하며 연신 몸을 떨었다.

  그런 광경에 모두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적천룡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문창을 응시하며 물었다.

  "아는 사이이오?"

  "흐흐...... 알다마다. 저 놈이  칠십 년 전 장강변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니까......."

  "......!"

  "그로부터 한 달 후...... 우리는 뜻하지 않게 융사로부터 하토궁

  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융사가?"

  "우리는 의아했으나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의 가족들이 모두 융사에게 인질로 잡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문창의 눈에 문득 소름끼치는 광기(狂氣)가 떠올랐다.

  "흐흐흐...... 융사, 그 찢어  죽일 놈은 무서운 음모로써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은 다음 죽령도로  보내 육십 년이나 그곳에서 썩게

  했다."

  "당시 우리는 융사 그 놈만 증오했었지. 허나 요즘에 와서는 그것

  이 잘못된  생각이며 보다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아냈

  다."

  우문창은 문득 풍고적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풍고적."

  "......!"

  풍고적은 애처로울만큼 심하게 몸을 떨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문창은 징그러운 괴소를 흘렸다.

  "흐흐흣...... 당시 네놈은  우리가 구해 주었다는 사실을 빙허잠

  에게 알렸다. 그리고...... 비밀이 새어 나갈 것을 두려워한 빙허

  잠은 은밀히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융사에게 연락을 취했고......

  융사는 음모로써 우리를 죽령도에서 썩게 했다."

  "......!"

  "그래 놓고 어째......? 광천오제는 세상이 싫어 은거에 들어갔다고?"

  "아...... 아......."

  공포에 찌들 대로 찌든  쇳소리같은 비명이 풍고적의 목구멍 밖으로 새어 나왔다.

  "흐흐...... 이 놈 풍고적! 네놈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아내와 가

  족을 잃었고...... 육십 년 세월까지 잃었다......."

  우문창은 풍고적의 멱살을 천천히, 허나 완강한 힘으로 옭아 쥐었다.

  "커억......."

  풍고적의 흰 눈이 순간 튀어 나올 듯 불거졌다.

  "흐흐흐...... 어떻게 죽여주랴.  난도질을 해줄까? 아니면......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 주랴?"

  우문창의 손에  슬그머니 힘이 가해지려는  그때 적천룡의 침중한 음성이 퍼졌다.

  "멈추시오!"

  순간 우문창의 고개가 그를 향해 홱 돌아갔다.

  "멈추라고?"

  "그렇소. 그는......."

  "흐흐흐...... 적천룡,  너는 처자식을 죽인  원수를 만나도 참을 수 있겠느냐?"

  "......!"

  적천룡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더니 문득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구료. 허나...... 그러지 않아도 그는 죽소. 더구나 그

  는...... 엄청난 음모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

  우문창의 얼굴이 일순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갈등이었다.

  천만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불공대천의 원수이건

  만 당장 그래서는 안 될 거창한(?) 명분에 가로막힌 것이었다.

  "빌어먹을......."

  결국 우문창은 멱살 쥐었던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고야 말았다.

  풍고적의 야윈 빰  위로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동시에 울음 섞인 음성이 그의  갈라 터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노부...... 이미 오래 전부터  지난 일을 후회해 왔소.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소."

  "......."

  우문창은 자신의  발끝을 응시하며 묵묵히  원래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풍고적은 거듭 말했다.

  "빙허잠은...... 칠십 년 전...... 비밀을 알고 있는 노부까지 죽

  이려 했소. 요행히 그  순간을 넘긴 노부는...... 칠십 년 동안이

  나 그의 손길을 피해 숨어다녀야 했소......."

  문득 일그러진 고소 한 줄기가 입가에 떠올랐다.

  "허나...... 늙고 지친 노부...... 온몸의 상처는 재발하고...... 결국 눈까지 멀고 말았소."

  처량하기 이를데 없는 어조였으나 그 어조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이제...... 노부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죽기 전 단우비 전

  주의 앞에서 모든 비밀을 밝히고 싶다는 것뿐이오......!"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돌연 한 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피(血)...... 시커멓게 죽은 피(血).......

  바닥에 떨어진 그 피를 보면서 혁련소천은 생각했다.

  '그래...... 향후 무서운 혈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그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한 인물을 회상해 보았다.

  '단우비...... 그가 이런 내막을 알게 된다면.......'

  피(血)...... 그리고 단우비......!

  여기는...... 무회마지 내의 한 밀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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