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95장 무회마지(無回魔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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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칼날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수백 개의 봉우리가 병풍같이
양쪽으로 늘어서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장관(壯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으스스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천험(天險)의 절지, 이곳이 바로 열 개의 땅(十地) 중 하나인 무
회마지(無回魔地)였다.
타는 듯 붉은 저녁노을이 서편 하늘을 짙게 물들이고 있는 그 시
각 석양의 잔광을 뒤로 하고 일단의 무리들이 무회마지를 향해 접
근하고 있었으니.......
아홉 필의 말에 탄 채 백검마곡을 향해 긴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그들은 모두 구 인(九人)이었다.
선두에 선 인물, 그는 바로 담대우리가 아닌가!
그의 뒤를 상무군이 따르고 또 그 뒤에는 혁련소천과 군청위가 따
르고 있었다.
또한 그들과 나란히 광천오제가 말을 몰고 있었다.
"콜록! 콜록......!"
문득 선두의 담대우리가 거친 기침을 터뜨렸다.
이어 그는 가까스로 기침을 억제하며 감회 깊은 어조로 말을 흘렸
다.
"으음...... 이 무회마지에 찾아온 것도 어언 벌써 오십 년이 넘
었군."
독백과 같이 흘러 나온 그 음성에 답하듯 혁련소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담대천주께서 굳이 이곳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순간 담대우리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
다.
"어쩌면...... 현 구천십지만마전을 일대파국으로 몰고 갈 극비밀
(極秘密)을 이곳에서 알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네."
"......?"
"백검무회마(百劍無回魔)...... 적천룡, 그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알고 있네."
그 말에 헌원패가 문득 의아한 음성을 흘렸다.
"극비밀이라니? 그게 뭐요......?"
그의 다그치는 듯한 말에 담대우리는 천천히 고소를 지으며 고개
를 흔들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 아니오?"
담대우리의 말은 거의 핀잔에 가까웠다.
순간 헌원패의 얼굴이 달아오르듯 금세 붉어졌다.
"젠장...... 꼭 그렇게 면박을 줘야 하오?"
그때 우문창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퍼뜩 스쳐갔다.
"담대천주!"
담대우리를 부르는 그의 음성이 얼마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
"혹시...... 그 극비라는 것이 칠십 년 전(七十年前)...... 장강
에서의 그 일 아니오?"
순간 우문창을 바라보던 담대우리의 안색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
졌다.
이어 그의 표정은 침중히 변하더니 급기야 우문창의 시선을 외면
한 채 이렇다 할 언급조차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허나 그 순간 헌원패의 얼굴 또한 굳은 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강에서의 일......!"
불현듯 그의 시선이 소절풍마를 향했다.
소절풍마는 다시 불영치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또다시 독심광의에게로 향해졌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그 눈빛의 교차......! 그들의 시선은 분명 심
상치 않았다.
혁련소천은 순간 자신의 심장이 급격히 뛰는 것을 느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 적천룡이 아는 사실은...... 광천
오제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혁련소천이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 그들은 이미 계곡 앞에 도달해 있었다.
대체 그 끝이 어디인가조차 모를 천야만야한 단애가 절벽 밑에 웅
크리고 있었다.
단애의 건너편엔 아스라이 보이는 계곡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단애와 계곡 사이엔 억겁의 지저갱에서 불어 나
오는 듯한 가공할 바람기둥이 죽음보다 더 짙은 시커먼 빛을 띤
채 계곡 전체를 통째로 말아치울 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 우...... 우우웅......!
휘이이이......!
담대우리는 그 무서운 흑풍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한 듯 나직이 말
을 흘렸다.
"예나 지금이나...... 저 놈만큼은 여전하군......."
그 말끝에 헌원패가 불쑥 끼여들었다.
"담대천주, 이것을 건너야 하오?"
순간 군청위의 차가운 음성이 그의 말을 끊었다.
"이것은 흑사풍(黑死風)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죽음의 검은
바람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검은 바람......?"
"그렇다. 과거...... 적호(赤浩), 그 어린 놈도 이 흑사풍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었지."
"뭐요? 적호라니? 노마, 당신은 지금 칠대 무회마지주인 적호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다."
군청위의 싸늘한 음성에 헌원패는 아예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노마, 당신 정신이 있소? 적호라면 벌써 백 년 전에 죽은 인물인데......?"
허나 군청위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게 흘러 나왔다.
"노부가 한창일 때, 적호 그 아이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헌원패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미친 노마군...... 좋소. 당신이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라면...... 이름이 뭐요?"
순간 군청위의 두 눈에서 한 줄기 담담한 이채가 흘러 나왔다.
"노부는...... 이름을 잊었다. 말해줘도 너는 모르니...... 그냥 노마라고만 알아라."
"크흐......."
헌원패는 군청위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막 조소를 터뜨렸다.
"엇......?"
이때 돌연 일행 중 상무군의 입에서 가벼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순간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상무군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향해졌다.
소용돌이치며 미친 듯이 치솟아 오르는 흑풍!
그 흑풍 속에서 하얀 인영이 허공을 밟으며 걸어 나오고 있지 않
는가?
"으음...... 저럴 수가......?"
군청위의 입에서 낮은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하얀 인영을 바라보는 일행의 얼굴빛이 일제히 굳어졌다.
저 가공할 죽음의 검은 바람 속을 옷자락 하나 휘날리지 않은 채,
마치 산보라도 하듯 유유롭게 걸어 나오는 백의인영은 누구인가?
그러나 담대우리는 안색하나 변화없이 유유히 다가오는 백의인영
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
경악 어린 시선 속에 나타난 백의인영은 뜻밖에도 한 송이 눈 속
에 피어난 백매화(白梅花)같은 절세의 미녀가 아닌가!
치렁한 머리채는 모두 목 뒤로 넘겨 하얀 상건(喪巾)으로 묶고 일
신에는 눈이 시리도록 깨끗한 백의소복을 입은 이십여 세 가량의
미녀.......
여인의 그 어떤 감정조차 없는 냉막미려한 얼굴을 보는 순간 혁련
소천의 두 눈빛이 한 차례 미미하게 출렁거렸다.
담대우리의 시선이 문득 혁련소천에게로 향해졌다.
그 순간 그는 혁련소천의 입가에 어리는 씁쓸한 고소(苦笑)를 보
았다.
혁련소천은 고소를 지은 채 슬그머니 고개를 흔들었고, 담대우리
의 얼굴에도 미미한 고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의 고개가 말없이 끄덕여졌다.
백의 소복미녀는 어느새 계곡을 건너 담대우리의 앞에 조용히 내
려섰다.
"백부님께...... 소채가 인사드리옵니다."
나직하면서도 어딘가 유원(悠遠)한 느낌이 서려 있는 청아한 음성
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음! 오랜만이로구나. 네 부친 역시 이곳에 계시느냐?"
"그렇습니다."
"그래......? 악형은 건강하신가?"
"예, 백부님의 염려지덕으로 평안하십니다."
백의 소복미녀 아니, 악소채로 드러난 이 미녀의 부친은 바로 십
지(十地) 중 천룡보의 보주인 천룡제신마 악군초였다.
악군초와 혁련소천.......
십 년 전(十年前), 그들은 몇몇밖에 모르는 은밀한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었었다.
그것은 바로 혁련소천의 탁월한 능력에 감복한 악군초의 청에 의
해서였다.
당시 혁련소천에게 처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군초는 과감한
단안을 내렸던 것이다.
악소채는 혁련소천을 만난 적이 드물었다.
물론 그녀는 혁련소천과 은밀한 관계를 가진 적도 없었다.
허나 그녀는 혁련소천을 극히 사모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지아비로 정한 뒤, 그녀는 혁련소천을 남
편으로보다는 위대한 영웅으로서 존경했다.
헌데...... 그녀가 소복을 입은 이유는......?
악소채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담대우리에게 물었다.
"백부님, 이 분들은......?"
"음...... 모두 노부의 벗들이시다."
"예, 그러셨군요."
공손한 태도로 대답을 하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혁련소천에게 멎었다.
순간 악소채의 서늘한 두 눈에 미미한 떨림이 일어났다.
허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의 변화였고, 이어 그녀는 곧 공손한
어조로 담대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녀를 따라오세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곧 단애를 넘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모두 갑시다."
담대우리는 일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순간 헌원패가 기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우리 보고 죽으란 말이오?"
담대우리는 그를 향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소. 이 단애와 저 계곡 입구 사이에는 하나의 은철선(銀鐵線)이 연결되어 있소."
"거, 무슨 소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고 있지 않소?"
"상관없소......."
"어이구! 하기야 싹 같이 죽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게 아니오. 백검마곡에는 하나의 신물이 있소."
"신물(神物)......?"
담대우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의 이름은 잠풍주(潛風珠)라고 하오."
"잠...... 풍주......?"
"그렇소. 천하에 존재하는 그 어떤 바람도 잠풍주 앞에선 유명무
실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으음! 그럴...... 수가?"
헌원패를 비롯한 몇몇이 신기하고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득 그들의 뇌리에 악소채가 나타나던 모습이 상기됐다.
'아......! 그래서 저 아이가 아까 그렇게 쉽게.......'
그들은 비로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그들의 귓전에 담대우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 이제 모두 계곡을 건너기로 합시다."
비로소 중인들의 고개가 끄덕였다.
허나 헌원패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아니, 잠풍주인지 뭔지 믿다가 염라대왕에게 선착순으
로 달려가는거나 아닌지 모르겠군."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헌원패의 말을 불영치마가 이어 받았다.
"아미타불...... 불존의 자비가 있을 것이니 너무 심려할 것 없다."
"뭐야? 야...... 이 땡초 중아! 불존의 자비로운 손이 아무리 많
아도 네놈의 그 번쩍이는 대갈통을 받아줄 손은 아마 없을 것이다."
"뭣이? 대갈통이라니......?"
헌원패의 지독한 험구에 불영치마가 두 눈에 쌍심지를 세웠다.
이때 독심광의가 싸늘한 음성으로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시끄럽다! 빨리 따라오기나 해라."
어느새 담대우리와 혁련소천, 군청위 등은 단애를 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헌원패는 뒤질세라 급히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그는 독심광의에게 한 마디 투덜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망할 녀석, 저 놈은 꼭 번번히 웃어른 행세를 하려고 한단 말이야."
이윽고 그들은 모두 단애를 넘어 계곡을 건너기 시작했다.
휘류류류류류륙―!
콰우우우...... 우우......!
마치 광란하는 성난 해일이 몰아닥치듯 엄청난 위세로 계곡을 휩
쓰는 저 죽음의 검은 바람!
허나 암흑과도 같은 흑사풍 속에 극히 은밀하게 하얀 빛을 발하는
은철선이 계곡 맞은편으로 팽팽히 이어지고 있었다.
과연 그 저주의 흑사풍은 아예 악소채 근방을 침범조차하지 못했
다.
허나 막상 흑사풍 영역 속에 들어선 일행의 눈에 비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휘이이이이이잉―!
거대한 암석이 마치 모래알처럼 흑사풍 속에 휘말리고 있었고, 혼
백을 빼앗아 가려는 악귀의 통곡간이 흘러 나오는 그 엄청난 괴음
이란.......
그리고 단애 아래는 밑도 끝도 없는 혼돈의 암흑, 바로 그 자체였
다.
헌원패는 잔뜩 일그러졌던 얼굴을 활짝 편 채 신기하다는 듯 사방
을 둘러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호오......? 정말 신기하군. 세상에 이런 구슬이 다 있었다니......?"
아무래도 그의 수다스러움이 걸리는 듯 우문창이 넌지시 면박을 주었다.
"그건 네가 견문이 좁은 탓이다."
"견문?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헌데...... 말이다......."
"......?"
"저런 구슬 하나만 있으면 천하무적이겠는데?"
"그건 또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냐?"
"잠꼬대라니! 아...... 생각 좀 해봐라. 저런 거 하나 있으면 어
떤 장풍에도 끄떡없을 것 아니냐?"
"뭐...... 야? 크으! 생각하는 것이 정말 너답다."
우문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일행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 그것은 다가올 풍운과는 전혀 다른 화평의 미소였
다.
그리고 떠드는 사이에 그들은 계곡을 완전히 건넜다.
석양을 등지고 찾아온 아홉 명의 인물, 그들은 무엇 때문에 무회
마지를 찾아왔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중에 혁련소천이 끼어 있다는 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