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권 제90장 (90/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5권 제90장 피(血)의 대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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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안산(白雁山).

  흰 기러기가 날개를 펼친 것과  같은 형상의 이 산은 섬서와 감숙

  성의 중간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기슭을 스치는 바람은 몹시도 차고 건조했다.

  헌데 바람을  타고 나타났는가? 홀연히 산기슭에  나타난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 중 키가  큰 인물은 빛 바랜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채 헐렁한

  마의자락을 산기슭의 차가운 바람에 유유롭게 맡기고 성큼성큼 걷

  고 있었다.

  그 마의죽립인  옆에는 백발이 성성한  흑의노인이 지그시 눈매를

  좁힌 채 한가한 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흰 유리를 한 겹 씌운 듯한 창백한 안색의 노인의 등

  은 신기하게도 불쑥 튀어 나와 있었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혁련소천과 군청위의 모습이었다.

  오소하에서 만나 이곳 백악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한 달.

  어쩌면 그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혁련소천과 군청위...... 그들이  함께 지낸 한 달은 그저

  스치고 지나간 시간이 아니었다.

  그 굳게 응어리진(血) 한(恨)의 비사(秘事)를 점철해 온 두 사람,

  동병상린지정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정(情)은  점차 세속의 율례

  (律禮)를 벗어난 사나이들의  우정(友情)을 풀어냈고 이제 그들은

  스스럼없이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의형제(義兄弟), 이백수십 년이라는 세월의 격차를 뛰어넘고 그들

  은 문자 그대로 의로 맺어진 형제지정을 굳게 맺었다.

  또한 혁련소천이 지나온 한 맺힌 사연은 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회

  상과 함께 군청위의 가슴에 무서운 분노의 불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군청위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자신의 남은 생애, 그것을 모두 혁련소천에게 주겠노라고.......

  군청위는 마냥 즐거운 듯 파안대소를 금치 못했다.

  그의 두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야말로 마냥 새롭고 진

  기로울 뿐이었다.

  하기야 이백여 년이 넘는  영어(囹圄)의 세월을 암흑 속에서 짓씹

  어온 통한의 아픔!

  그러니 이제 새롭게 햇빛을 받은 그에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것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허허...... 소형제, 진정 나  군청위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 느

  낌일세."

  "......!"

  "모든 것이 다 자네 덕분일세."

  군청위는 무한한 정이 실린 눈길로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혁련소천은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제의 덕분이라기보다는 노형님과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지요."

  "인연? 허허...... 그것 또한 듣기 싫은 말이 아니로군."

  군청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헌데 그때였다.

  문득 군청위의 얼굴에 정색의 빛이 떠올랐다.

  "자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휘이이이잉......!

  펄럭......!

  한 줄기 싸늘한 바람이 혁련소천의 마의자락을 세차게 펄럭였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모든 계획은 이미 제 머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흐음...... 자신이 있나?"

  "물론입니다."

  "허헛...... 하기야  당금 천하에 자네의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은

  없을 테니까......."

  군청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다시 입을 열어 혁련소천에게 물었다.

  "헌데 자네 그 얼굴로 계속 행동할 셈인가?"

  "제 얼굴이 뭐가 어떻습니까?"

  "흠...... 그래?"

  군청위는 그의 당당한 태도에 히죽 기이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흐...... 좋아, 좋아. 남자가 얼굴로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니

  까......."

  대수롭지 않게 말을 흘리는 군청위였다.

  허나 그 순간 군청위의 눈 속에서 가공할 기광이 번갯불처럼 번쩍

  일었다.

  "흐흐흐...... 조만간 무림에  일대혈풍이 불어닥치겠군. 우리 노

  소(老少)에 의해서 말일세."

  "노소...... 그렇지요. 노마(老魔)와 소마(少魔)의 새로운 출현이

  되겠지요......."

  비록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죽립에 가려진 채 흘러 나오는 그의

  어조는 극히 무심했다.

  "소마와 노마라...... 흐흐...... 맞네. 우리 두 노소가 마(魔)로

  불리운다는 것도 흥미있군."

  혁련소천의 죽립 밖으로 무섭도록  차가운 눈빛이 싸늘히 흘러 나

  왔다.

  '두 번의 실수란 있을 수  없다. 두고 봐라! 천하는 곧 나에 의해

  다시 정립(定立)될 것이다!'

  순간 그의 입술이 무겁게 꾹 다물어졌다.

  혁련소천. 그의 새로운 출현!

  들리지 않는가?

  배신자의 저 처절한 절규의 애원이.......

  보이지 않는가?

  잠보다 더  깊은 저  죽음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가는  뭇 주검들

  이.......

  어디선가 신선한 피냄새가 불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서편 하늘은 어느새 붉은 분(粉)으로 곱게 단장을 시작했다.

  어둑함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석양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은  섬서성 천봉산(天鳳山) 근처에 위치한 천

  은산장(天隱山莊)이란 곳이었다.

  천은산장, 그곳이 바로 혁련소천의 목적지였던 것이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허나 그가 군청위에게 넌지시 일러준 한 마디는 이러했다.

  ― 오늘부터가 대반전의 시작입니다!

  대반전의 시작, 혁련소천은 분명하게 그 말을 선언했다.

  대반전의 시작. 그것은 그 자신만이 아는 것!

  그러나 군청위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대지를  적시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뜨거운  피의 아지랑이

  를.......

  그는 괴소를 터뜨렸다.

  ― 흐흐흐......  자네가 어떤 일을 시작하든  관계없다. 다만 한

  가지, 노부는 피를 원할 뿐이다. 피(血)! 이백 년 동안 맡지 못했

  던 신선한 피냄새만 맡으면.......

  그들은 그 첫 번째 피(血)의 장소로 천은산장을 택했다.

  천은산장은 천봉산 기슭에 세워진 거대한 장원(莊院)이었다.

  웅장한 고루거각과 동장철벽으로 이루어진 듯한 천은산장, 이곳이

  바로 당금강호에서 혁혁한 위명을 떨치고 있는 검도(劍道)의 초절

  정고수 삼수마검(三手魔劍) 육도평(陸道平)의 장원이었다.

  헌데 평소와는 달리 오늘의 천은산장은 부산하기 짝이 없었다.

  산장의 곳곳을  현란하게 밝히고  있는 청룡무단등(靑龍畝丹燈)과

  백련홍화등(白蓮紅花燈).......

  바로 혼례의 경사를 알리는 축등(祝燈)이 여기저기 밝혀져 있었던

  것이다.

  삼수마검 육도평이 애지중지하는 금지옥엽. 육지운(陸芝雲).

  중인들은 공공연히 말했다.

  ― 개천에서 용 난다더니  육도평이 어떻게 그런 봉(鳳)같은 딸을 두었을까?

  육지운은 천봉선자라는 아름다운 외호와 함께 뛰어난 절세의 미모

  와 재지를 지닌 여인이었다.

  섬서, 감숙일대 무림인들의  화젯거리이자 숱한 젊은 청년들의 애

  간장을 태우던 천봉선자 육지운, 그런 그녀가 드디어 시집을 가는

  것이다.

  상대는 실로 놀랍게도  자소천 칠 위(七位)의 옥면수라(玉面修羅)

  석원초(石原超)였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천은산장은 이 결혼식을 뻑적지근하게 대내외

  에 알렸다.

  성대(盛大)의 극치를 말하듯  장원을 들어서는 끝없는 인파(人波)

  와 우마의 행렬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천은산장은 그야말

  로 부산하기 짝이 없었다.

  거대한 장원의 입구에는 위풍당당한 한 쌍의 석사자(石獅子)가 좌

  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금 그 오른쪽의 석사자 옆에는 호장무사(護裝武士)인 듯한 건장

  한 청의장한 둘이 서 있었다.

  상당한 외공(外功)을 익힌 듯  태양혈이 불룩한 두 청년의 얼굴에

  는 따분하고 지루한 기색이 은근히 깔려 있었다.

  불쑥 오른쪽의 장한이 입을 열었다.

  "이봐 노형, 시간이 어떻게 됐나?"

  "해시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 걸......."

  "아...... 빌어먹을......  무슨 놈의 시간이 이렇게  안 가나 그

  래?"

  "흐흐...... 왜 피곤한가?"

  "젠장할! 지금 자다가 남의  허벅다리 긁고 있나? 자네는 안 피곤

  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젠장...... 산장  안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향긋한 술이 잔뜩 쌓여 있는데 밖에서 이게 무슨 청승인가?"

  "한심한 거지 뭐. 이게 다 주인 잘 만난 탓이 아니겠나?"

  "빌어먹을......."

  두 장한은 주거니 받거니 연신 낮은 음성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헌데 말야? 그건 그렇고......  이번에 소저의 결혼은 정말 시끌

  벅적한데?"

  "아...... 이  사람아, 그건 당연하지.  상대가 누군가? 구천십지

  중의 자소천의 거물 석나으리란 걸 몰라?"

  "흐흐...... 하기야. 그러니까 천은산장이 온통 벌집 쑤셔놓은 것

  같지 않은가?"

  "장주님 입이 요새 계속 찢어지고 있잖나."

  "헌데 소저는 별로인 것 같던데......?"

  "그건 그래. 하기야 석나으리의 화명(花名)이 좀 끝내주나?"

  "쉿! 아니, 자네 죽고 싶어 환장했나? 말조심하게."

  "빌어먹을...... 헤헤헤...... 안 듣는 데서야 당금의 황제폐하도

  욕먹는 세상 아닌가?"

  "그래도 조심해야지. 우리야 파리 목숨 아닌가?"

  "휴우...... 그건 그래. 근데 말일세......."

  "엉......?"

  "듣자하니 석나으리의 그 실력이 끝내준다면서?"

  "흐흐...... 그렇다더군."

  "흐흐흐...... 그 솜씨로 오늘밤에...... 끄응! 죽여 주는군!"

  두 장한은 천봉선자  육지운을 연상하며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비비 꼬았다.

  허나 막상 얘기가 끝나고나니 또다시 일각이 여삼추가 아닌가!

  오른쪽의 장한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참! 자네 오늘 오전에 온  손님들 중에서 한 꼽추 늙은이하고 같

  이 온 추악한 친구 봤나?"

  "아, 그 죽립 쓴 놈 말인가?"

  "맞아. 야...... 정말 더럽게  못생겼더구만. 십 년 전에 먹은 만

  두가 왕창 올라오려고 그러잖아."

  "으이구! 징그럽다. 보나마나  결혼식장에 한 끼 얻어먹으려고 온

  놈들이겠지 뭐."

  "그래도  그렇지. 그  얼굴 보면  주려던 밥도  도망가겠다. 흐흐

  흐......."

  옥면수라 석원초의 기분은 지금 하늘을 날아오를 듯 기뻤다.

  일대색명(一代色名)을 날린 그가  섬서 제일미녀인 천봉선자 육지

  운을 오늘 밤에 슬쩍 하게 됐으니 어떻게 코가 벌름거리지 않겠는

  가?

  허나 석원초가 즐거워하는 것은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크...... 제법 독한 술인 걸."

  석원초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연신 바쁘게 옮기고 있었다.

  결혼식은 끝났다.

  그리고 기다리던 초야(初夜),  석원초가 벌겋게 취기 오른 얼굴로

  회랑을 걷고 있었다.

  육지운의 그 절세미려한 얼굴을 떠올리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얼굴

  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이번  일만 성공하면 나의  위치는 완전히 보장된다.

  최소한 구천(九天) 중의 하나는 내 것이 될 것이다."

  아! 이 무슨 엉뚱한 말인가?

  자소천 서열 칠 위에 불과한  그가 감히 구천 중의 하나를 노리다

  니......!

  석원초는 술과 색(色)에 얼룩진 얼굴에 가득 괴소를 피어올렸다.

  "빙천주에겐 미안하지만...... 후후후......."

  게슴츠레하게 치켜진 그의 두 눈에 사이한 광망이 감돌았다.

  "크흐흐......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괜찮지. 흐흐

  흐...... 어서 가서 육지운 그 야들야들한 계집을......."

  석원초는 뻐근해지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슬쩍 주물렀다.

  "흐흐흐...... 네년을 완전히  극락으로 보내주리라. 황홀이 뭔지

  배우는 것도 괜찮은 맛일 걸? 흐흐흐......."

  색기 가득한 흉소를 터뜨리는 석원초였다.

  헌데 돌연 그의 얼굴이 경직되듯 굳어져 버렸다.

  어둠 속에 홀연히  나타나 하얗게 웃는 괴인물을  그는 본 것이었

  다.

  "허엇!"

  석원초는 순간 등골을 엄습하는 괴기스러움에 다급한 헛바람을 들

  이켰다.

  그는 세상에서 눈 뜨고는 다시  보지 못할 악귀와 같은 추악한 얼

  굴을 방금 보았던 것이다.

  지금 그 끔찍한 얼굴이 하얗게  이를 드러낸 채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다.

  "너...... 너는......."

  석원초는 취기가 단번에 사라짐을 느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아무런  기척도 없이 어둠 속의  얼굴이 그에게 유령같이

  다가왔다.

  뭐라고 형용할 수조차 없는 가공할 공포감의 엄습!

  '피...... 피해야 한다!'

  석원초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느낀 순간, 그는 쾌속한 신법으로 급히 왼쪽 회랑을 향해 몸을 날

  리며 한 줄기 위맹한 장세를 쳐냈다.

  "웬 놈이냐?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허나 그는 채 뒷말을 잇지 못했다.

  "가거라, 석원초!"

  북풍보다 더 차가운 그 한마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석원초는 자신의 머리가  불에 지지는 것

  같은 뜨거움을 맛보았다.

  '뜨겁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느낀 마지막 감정의 전부였다.

  퍽!

  비명조차 없이 그의 정수리가 그대로 쪼개져 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석원초의  처참한 시신이 회랑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어둠 속의 인물인 혁련소천은 돌연 품 속에서 한 개의 파

  르스름한 옥병을 꺼내 들었다.

  잠시 후, 약간은 누렇게 보이는 황색 액체 세 방울이 석원초의 시

  신 위에 떨어졌다.

  치지지직......!

  그러자 순식간에 석원초의 시신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혁련소천은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피의 대반전! 이것이 시작이다!"

  그렇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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