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4권 제86장 오소하(奧 河)의 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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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하.
파랍산(巴拉山)에서부터 동서쪽으로 장장(長長) 구백여 리에 걸쳐
뻗어 있는 하토(蝦土)의 젖줄이다.
오소하가 내려다 보이는 어느 가파르다 못해 험악하기 이를데 없
는 단애(斷崖) 위를 한 사나이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사나이는 일신에 낡은 파의(破衣)를 걸치고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정체불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쓴 죽립 아래로는 간신히 턱만 보이고 있어 그의 용모
를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는 천하웅주(天下雄
主)로서의 장중한 위엄은 죽립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돌연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사나이는 이윽고 천천히 손을 들어 죽립을
위로 들어올렸다.
순간, 드러난 그것을 어찌 사람의 얼굴이라 말하랴!
사나이의 얼굴은 오관(五官)만 겨우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얼굴 전체가 꿈에 볼까 두려울 만큼 끔찍스런 상처로 뒤덮여 있었
다.
그의 양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겉으로 드러난 살결이란 살결은 모조리 상처투성이였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그러나 그의 두 눈만큼은 추악한 용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맑
고 투명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혁련소천은 혈왕문(血王門)을 나온 즉시 하토궁을 거쳐 이곳까지
도착한 것이다.
그는 잠시 침울한 시선으로 도도히 흐르는 오소하를 응시했다.
그의 꽉 다물려 있던 입술 사이에서 돌연 지독히 메마른 음성이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이 저 오소하의 물결처럼...... 사라졌다......."
억겁의 세월을 한순간에 모두 겪어 버린 듯 모든 것이 허탈했다.
"모든 것...... 나의 벗은 나를 배신했고......."
허무함으로 가득 찬 혁련소천의 얼굴에 가는 경련이 파문처럼 일
어났다.
"후후...... 나의 집은 이미 내 집이 아니며...... 나의 수하들도
이미 내 수하가 아니다......."
그는 허공으로 눈길을 옮기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 어이가 없구나. 하루 아침 사이에...... 인간사가 변해도
이렇게 변하다니......."
그는 자조(自嘲) 섞인 고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빛만큼은 여전히 의연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제갈천뇌,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불벼락같은 광망이 무섭게 뿜어져 나왔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쉬― 이― 익!
돌연 허공에서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일며 한 줄기 회영(灰影)
이 혁련소천의 앞에 비조처럼 내려섰다.
그것은 마치 조인(鳥人)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놀라운 신법이
었다.
혁련소천을 응시하는 괴인은 검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두 눈 가득 시퍼런 청광(靑光)을 번뜩이는 먹물같은
살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일신엔 승려들만이 입는 회의가사(灰衣袈裟)가 걸쳐져 있었
고, 왼손에는 묵광(墨光)이 감도는 검은 염주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중복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승려다운 분
위기는 조금도 풍기지 않았다. 오히려 흉측독랄해 보이는 모습이
었다.
게다가 괴인은 나타나자마자 혁련소천에게 다짜고짜 폭갈을 터뜨
리는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네가 바로 냉유성이란 놈이냐?"
아미타불? 이럴 때 쓰라고 불존(佛尊)께서 가르쳤던가!
그리고 냉유성이라니...... 그는 바로 검천오형제 중의 첫째가 아
니던가!
그의 이름이 이런 곳에서 거론되다니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혁련소천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괴인에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새북사사천의 고수 마불 용해후란 말인가?"
"흐흐...... 냉가 놈! 끝까지 모르는 척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으냐?"
마불 용해후라 불린 괴인은 싸늘하게 비웃으며 왼손에 들린 검은
염주를 어루만졌다.
쩔그럭...... 쩔그럭......!
그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혁련소천을 노려보았
다.
"네놈이 아무리 부인해도 죽으면 염라부에 냉유성이라도 적힐 것
이다."
순간 괴인의 입에서 돌연 창천을 찢어발기는 일성폭갈이 터져 나
왔다.
"가랏―!"
쇄― 애― 애― 액!
동시에 검은 염주가 가공할 강기( 氣)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빛살
처럼 혁련소천에게 쏘아왔다.
혁련소천은 표정이 굳어졌다.
'대단하다! 과연 새북사사천의 고수답다. 번쾌나 천자흠보다 훨씬
위다!'
그의 생각대로 마불 용해후의 무공은 번쾌나 천자흠보다 적어도
몇 단계는 위에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만난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혁련소천
이었다.
혁련소천의 입 밖으로 냉소가 터져 나왔다.
"그대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냉가 놈! 검천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내 적수는 아니다."
염주는 이미 혁련소천의 지척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순간 혁련소천은 신형을 비쾌히 움직이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대의 착각이 그대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마불 용해후가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웃기지......."
허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번― 쩍!
한 줄기 시커먼 광채가 돌연 혁련소천의 왼쪽 소매 속에서 섬광처
럼 뻗쳐 나왔던 것이다.
카카캉―!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음이 울리며 염주와 묵광이 허공중에서 거
세게 부딪쳤다.
탕― 타앙......!
동시에 염주가 어지럽게 퉁겨져 나갔다.
염주를 퉁겨낸 것은 바로 천마묵장(天魔墨杖)이었다.
퉁겨 나가는 염주를 바라보는 혁련소천의 표정에 언뜻 경악이 어
렸다.
'천마묵장에 정면으로 부딪쳤는데도 불구하고 저 따위 염주가 부
서지지 않다니.......'
그러나 이 순간 마불 용해후의 놀라움은 혁련소천보다 천 배 만
배 더한 것이었다.
'무...... 무서운 무기! 만년한철(萬年寒鐵)을 수십 년간 단련시
켜 만든 고금 병기 서열 이십 위(二十位)의 단혈마주(丹血魔珠)가
일그러지다니.......'
그는 불신과 의혹이 가득 찬 눈길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너...... 너는 누구냐?"
"후후...... 이제야 내가 냉유성이 아닌 줄 눈치챘느냐?"
"무...... 물론, 너는 냉유성이 아니다. 냉유성은 검 외에 다른
무기가 없다. 또한...... 너같이 강하지 않으니까......."
혁련소천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내가 누군지는 지옥에 가서 물어봐라!"
번― 쩍!
검날보다도 날카로운 신광이 혁련소천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왔
다.
"내가 말했다. 나를 건드린 것이 실수라고......."
콰아아아아―!
순간 천마묵장이 광속(光速)보다도 더 빠르게 용해후를 덮쳐갔다.
"헉......."
용해후는 기겁을 하며 급급히 신형을 날려 피하려했다.
그러나 천마묵장은 그보다 더욱 빨랐고 또한 가공스러웠다.
찌― 익!
마불 용해후의 오른쪽 소매는 여지없이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다.
"흐...... 윽......."
용해후는 혼비백산하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르르 물러났다.
다음 순간 그는 경악으로 가득 찬 음성을 힘겹게 내뱉았다.
"그...... 그 무기는 천마묵장!"
"아는군."
용해후의 안색이 무참할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네가 바로 번쾌와 천자흠을 죽인......."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했다.
"너무 늦게 알았다, 용해후!"
순간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천마묵장이 크게 호선을 그리며 용해후
의 전신을 폭풍처럼 휩쓸어 갔다.
"......!"
폭풍같은 기세로 덮쳐오는 천마묵장을 바라보는 용해후의 안색은
백지장보다도 더 창백하게 변했다.
'피...... 피할 방법이 없다!'
"뒈져랏―!"
죽음을 예감한 순간 용해후는 발작적으로 양 소매를 떨쳐냈다.
쐐― 애― 액!
용해후의 손에 의해 백팔 개의 단혈마주가 폭우처럼 허공을 날았
다.
꽈― 꽈― 꽈― 꽈― 꽝!
다음 순간 천마묵장과 단혈마주가 엄청난 기세로 무섭게 충돌했
다.
충돌 속에서 단혈마주가 산산조각 박살났다.
그리고 박살난 그것들은 날아온 원래의 방향으로 쏘아가 용해후의
전신에 송곳처럼 쑤셔박히고 말았다.
퍼퍼퍼퍽―!
"크윽―!"
용해후는 전신이 고슴도치가 된 채 허물어지듯 지면에 나뒹굴었
다.
이 모든 상황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가라!"
혁련소천이 다시금 조용한 음성을 흘렸다.
누가 그처럼 부드러운 음성 속에 죽음의 공포가 깃들어 있다고 믿
으랴!
번― 쩍!
찬란한 섬광이 일며 천마묵장이 용해후의 정수리를 노리고 가차없
이 날아갔다.
헌데 그때였다.
"멈춰!"
돌연 다급한 여인의 교성이 허공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쐐― 애― 액!
동시에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혁련소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혁련소천은 갑작스런 방해자의 출현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암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암기를 무시했다.
"새북사사천의 놈들, 중원에 와서 일으킨 혈겁으로 보아 절대 용
서할 수 없다."
나직하나 추상같은 호통을 터뜨리며 그는 천마묵장으로 용해후의
정수리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크― 아― 악!"
용해후의 머리는 천마묵장에 의해 무자비하게 박살났고, 동시에
참혹이 극에 달한 처절한 비명이 선혈을 동반한 허연 뇌수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파파파팍―!
그 순간 수십 개의 암기가 혁련소천의 등에 파고들었다.
그는 등 뒤가 뜨끔함을 느끼며 안면을 찌푸렸다.
'독암기다!'
이어 그는 천천히 신형을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이 순간 시력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한 금빛의 광채를 폭사하며 한
인영이 혁련소천을 향해 덮쳐 들었다.
콰우우우우―!
"후후......."
혁련소천은 나직한 냉소를 흘리며 버럭 일 장을 번개처럼 갈겼다.
꽈르르릉―!
순간 태산같은 장력이 폭풍처럼 금빛 물체를 강타했다.
"악―!"
곧장 날카로운 비명이 일더니 하나의 섬세하면서도 가냘픈 인영이
지면 위로 세차게 곤두박질했다.
그 인영은 괴이한 모습을 한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겨드랑이 밑에 인공(人工)의 금빛 날개를 달고 있었고,
얼굴의 코 위로는 독수리 모양의 가면을 깊숙이 눌러 쓰고 있었
다.
그러나 코 아래 드러난 모습으로도 그녀가 절세의 미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혈왕문 입구에 나타났던 신비소녀가 아닌가!
"으음......."
혁련소천의 일 장에 적잖은 내상을 입은 듯 그녀의 신형은 금세라
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입가에는 실낱같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천하에 이렇게 무서운 내공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니...... 어쩌
면 아버지보다 강한 것 같다!'
"네가 나를 암습했느냐?"
그때 혁련소천은 죽립을 들어올리며 무심한 음성을 흘렸다.
순간 죽립 아래도 드러난 그의 처참한 몰골에 신비소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생애에 있어 이토록 끔찍 참혹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용해후를 죽인 그 잔인한 손속을 연상하자 그녀는 자신
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혁련소천은 무심한 시선을 신비소녀에게 던지며 천천히 다가갔다.
신비소녀는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다...... 다가오지 마라!"
"왜...... 내 모습이 귀신같으냐?"
"나...... 나는......."
"후후후......."
혁련소천은 괴소를 흘리며 신비소녀에게 다가갔다.
돌연 신비소녀가 앙칼진 외침을 터뜨렸다.
"다가오지 마라! 당신은 이미 나의 독잠에 맞았다. 나의 해약없이
는 한 시진도 넘기지 못한다."
혁련소천이 고소를 지었다.
"후후...... 갈엽침독(褐葉針毒) 정도로 나를 죽이겠다고......?"
신비소녀는 까무라칠 듯이 놀랐다.
"어...... 어떻게 그 독을......?"
"후후......."
혁련소천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순간 혁련소천의 등 뒤에 박혀 있던 암기들이 앞다투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툭―!
신비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혁련소천은
바닥에 떨어진 암기를 가볍게 발로 문지르고 있었다.
푸식―!
혁련소천의 발길이 닿자마자 암기들은 모조리 재로 화하고 말았다.
"이 따위 독 정도는 아이들의 소꿉장난이지......."
그는 다시금 신비소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신비소녀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아...... 악마, 다가오지 마라!"
일순 혁련소천의 신형이 멈칫했다.
'악마라고......? 후후...... 내가......?'
그는 내심 자조 섞인 조소를 머금었다.
"악마, 죽어랏―!"
그때 돌연 신비소녀의 신형이 혁련소천을 향해 번쩍 폭사되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혁련소천은 고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팟팟!
혁련소천은 우수를 괴이하게 휘둘러 간단히 그녀의 완맥을 움켜잡
았다.
"악―!"
신비소녀는 고통과 경악을 동시에 느끼며 한 소리 비명을 토해냈
다. 혁련소천은 소녀의 완맥을 잡은 손에 슬그머니 힘을 주며 조
용하나 위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죽이려 한 너...... 누구냐?"
신비소녀는 원독 어린 눈으로 혁련소천을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나의 이름은 철진진(鐵鎭鎭), 새북사사천의 대장문인(大掌門人)
인 철극륭(鐵克隆), 그 분의 딸이다."
― 나의 이름은 철진진, 새북사사천의 대장문인 철극륭, 그 분의 딸이다!
"철극륭의 딸?"
놀람은 잠깐이었고 혁련소천은 곧 야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은 인질이군."
"무...... 무슨 뜻이냐?"
"너를 이용하여 너의 부친을 끌어들이겠다."
"안돼......! 그것은 안돼."
돌연 혁련소천은 철진진의 터질 듯 부풀어오른 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계집년, 더 이상 떠들면...... 발가벗겨 오소하에 던져 버리겠다."
"......!"
순간 철진진의 두 눈이 크게 커지며 입이 놀라운 속도로 다물어졌다.
"젊은 친구, 그 소녀를 우리에게 양도해 줄 수 없는가?"
바로 그때, 돌연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두
줄기의 괴영(怪影)이 허공에서 불쑥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