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4권 제80장 최후의 승자(勝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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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련소천은 문득 시선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엔 금세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정묘하게 조각된 열 개의 석상
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석상 앞에는 오 척 높이의 석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서찰
한 장과 책자가 단정히 놓여져 있었다.
"나백의 수하였던 십대신군의 신상인 모양인데......."
혁련소천은 맨 우측 석상의 석대 앞으로 다가갔다.
<천잔마라경(天殘魔羅經).>
옆에 놓인 서찰에는 단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천잔마사(天殘魔士) 종평흠이 성숙마공(成熟魔功)의 정화를 남긴
다.>
'천잔마사라면 십대신군 중 서열 일 위였던 인물이지.......'
혁련소천은 두 번째 석대로 눈길을 돌렸다.
<나백궁주를 제외한 천하만인은 모두 나 소천마존 앞에 항복하라.
지옥의 겁화(劫火)가 네 곁에서 숨통을 조이리라.>
옆에 놓인 책자에는.......
<소천양후경.>
'서열 이 위(二位)...... 전설에 의하면 남송시대 축용문의 시조
가 바로 소천마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지.......'
각 석대 앞을 지나갈 때마다 혁련소천의 손은 아무런 스스럼도 없
이 책자를 품 속에 갈무리하고 있었다.
마치 맡겨 놓았던 제 물건을 찾아가듯.......
혁련소천은 만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두둑하군!'
십대신군의 십대비급을 모조리 품 속에 챙겨 넣었으니 그럴 수밖
에.......
'이제 이곳을 나가는 일만 남았군!'
혁련소천은 석실의 입구를 힐끗 돌아 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 혁련소천의 신형은 어느새 통로 밖으로 불쑥 솟구
쳐 나와 있었다.
그는 잠시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의 상황은 그가 들어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사호...... 그리고 자하천무.......
허나 그것들을 바라보는 혁련소천의 얼굴에는 여유있는 미소 한
줄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기이체현현도는 다시 사용할 수 없다. 허나......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대책은 혈경을 뒤적거릴 때 이미 그의 머리 속에 떠올라 있었다.
'혈경의 제 삼부(第三部) 마공제록편(魔功諸錄篇)에 저술된 혈사
탄기(血邪彈氣)...... 그것이 나를 이곳에서 빠져 나가게 해줄 것
이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양 손을 가슴 앞에 합장했다.
"강(强)함을 부수는 것은 무과의 기본 원리...... 허나 이 세상에
서 가장 부드러운 것을 뚫기란 기본에 대한 역행(逆行)이
다......."
우우우우......!
돌연 괴이한 진동음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보기에도 섬뜩한 핏빛
운무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역행은 곧 모든 기본의 원리를 거스름이나...... 그 뜻이
상통하면 그 힘은 가히 하늘에도 닿을 수 있다......."
연후, 혁련소천은 양 손을 내뻗어 둥그렇게 호선을 그리더니 돌연
양 손을 가슴 앞으로 쭉 끌어당겼다.
"혈사탄기!"
순간 사위를 자욱이 뒤덮고 있던 자색운무가 혁련소천을 향해 노
도처럼 휘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순식간에 자색운무는 핏빛 운무와 혼합되어 혁련소천의 주위를 빠
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혁련소천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이것으로써 혈왕의 전설은 깨어지는 것이다."
그는 다시 양 손을 느릿하게 내뻗기 시작했다.
"욱!"
뜻밖에도 돌연 짤막한 신음과 함께 혁련소천의 허리가 휘청 꺾어
졌다.
폐부를 끊어내는 듯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단전으로부터 전
해져 온 것이다.
뿐이랴?
단전에 모여 있던 내공이 돌연 폭발하듯 분산되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이 웬일인가?"
혁련소천은 느닷없이 일어난 체내의 변화에 경악과 의혹을 한꺼번
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공이 흩어지다니!
도대체...... 이런 일이 어찌 내 몸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끌어모았던 자색운무는 자연스럽게 사방으로 흩어지고, 순간 한
소리 스산한 음성이 혁련소천의 귓전에 바람처럼 스며들어왔다.
"당신은 당한 것이오, 대종사......."
"......!"
또 한 차례 혁련소천의 안색이 급변했다.
너무도 귀에 익은...... 허나 그가 기억하는 그 음성의 주인은 도
무지 이런 곳에서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잘못 들었을 테지...... 잠시 혼돈을 일으킨 것일 테지......!'
난생 처음 자신의 청각과 기억력을 의심하면서 혁련소천은 가급적
느릿하게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렸다.
'......!'
순간 혁련소천은 심장이 딱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자욱한 운무 속에 한 사람이 환영처럼 흐릿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
었다.
혁련소천은 문득 아찔한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너......."
그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휘청 한 걸음 물러섰다.
운무를 헤치며 흐르듯 유유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얼
굴...... 그것은 바로 천우신기 제갈천뇌의 얼굴이 아닌가?
그 순간 무서운 예감이 혁련소천의 전신에 폭풍처럼 몰아쳐 오고
있었다.
오오, 하늘이여...... 만약 이 예감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혁련소천은 짧은 순간을 빌려 최대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제갈천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며 조용히 물었다.
"조금 전...... 그 말...... 그대가 했는가?"
"그렇소."
"......!"
혁련소천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허나 놀랍게도 그는 이미 웃을 수 있는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 않을 초인적인 정력(定力)의 그였기에.......
"그렇군."
비로소 그 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모든 일이 확연한 깨달음이 되어
혁련소천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혈왕의 문...... 운중삼미...... 그래, 모두 너의 음모였구나......."
제갈천뇌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조용히 웃었다.
"당신은 머리가 좋으니 그 이상의 일도 모두 파악할 수 있을 것이오."
"맞아.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대이니까......."
혁련소천은 고소를 지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철신도로 가던 배 위에서 배를 폭파하고 나를 죽이려 했던 것도......."
"바로 나였소."
"당시 네가 사주한 인물은 대력금황기를 쓰던데......."
"그랬을 것이오."
문득 혁련소천의 눈꼬리에 보일 듯 말 듯한 경련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감천곡의 등에 암습을 가한 사람도 바로 그대인가?"
제갈천뇌는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것은 당신을 군마천주로 만들기 위한 첫번째 분지 작업이었으니까......."
"음수궁을 시켜 나를 죽이려 한 것도......."
"바로 나요."
"......."
혁련소천은 암울한 눈빛을 허공으로 던지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제왕성...... 이미 네 것이 되었겠군."
"군마천도 마찬가지요."
"군마천까지......."
"백변귀천은 당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소."
"......."
혁련소천은 문득 심한 갈증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온몸 구석구석에서 살을 태울 듯 한꺼번에 치솟아 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초극(超極)의 인내로 억누르고 있는 까닭이었다.
"칠 형제가...... 모두 나를 배신했는가?"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은 그럴 수 없을 만큼 침착하고도 담담한 것이었다.
"배신이 아니오. 애초부터 계획되었던 일이었으니까."
혁련소천은 씁쓸한 고소 한 줄기를 떠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운중삼미...... 바로 그거야. 그녀들이 입고 있던 옷의 옷감이나
복장은 결코 천이백 년 전의 것이 아니었어. 몸에서 풍기는 자하
향 또한 그랬고......."
문득 허공을 향해 있던 혁련소천의 눈길이 제갈천뇌의 얼굴로 옮겨졌다.
"너에게 검주령과 독혈전(毒血箭)을 맡겼으니 검천과 독형제신궁
역시 네 손에 들어갔겠군."
"맞았소."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갈천뇌의 눈에 순간 미묘한 빛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인간적으로 대종사 당신을 좋아하오."
"......."
"허나 당신이 지닌 야망만큼이나 큰 야심을 가진 나이기에 우리는
숙명적으로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오."
"승리를 확신하는 모양이군."
제갈천뇌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당신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오."
"속단이 아닐까?"
"후후...... 내 눈을 속이려 하지 마시오. 아마 지금쯤 당신의 몸
속에는 단 한 점의 진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오."
"......!"
그렇다.
이 순간 혁련소천의 체내에는 티끌만큼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밝은 미소를 지으며 제갈천뇌를 향해 엄지를 추켜 세웠다.
"멋지다, 제갈천뇌! 내 깨끗이 졌음을 인정한다!"
극도의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영웅
(英雄)이라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혁련소천은 확실히 영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련소천을 향한 감탄의 빛이 제갈천뇌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어
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대종사는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소. 훌륭하오."
그것은 티끌 하나 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혁련소천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허나 다시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이렇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대종사께 주어지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제갈천뇌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 기회를 주기에는 당신이란 존재가 너무 무섭고 두렵기 때문이오."
"그럼......?"
제갈천뇌는 느릿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주시오."
"무엇을 말인가?"
"혈경과 십대비급."
혁련소천은 빙긋 웃었다.
"천뇌."
"말씀하시오."
"그대는 매우 멋진 친구다. 내 그릇이 그대를 수용하기에 작았음도 인정하겠다."
제갈천뇌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천뇌, 기억할지 모르겠군. 내 몸 속에 박아 놓은 여섯 가지 무기
중 혈종잠(血宗潛)이란 것도 있음을......."
"혈종잠!"
제갈천뇌의 얼굴에서 돌연 핏기가 싹 가셨다.
"서...... 설마하니 그것을......."
"알고 있겠지만...... 혈종잠은......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도 전개가 가능하다."
"......!"
"오직 단 한 번만 사용이 가능할 뿐이지만 필살의 암기다."
"......!"
제갈천뇌는 자신도 모르게 세 걸음을 물러섰다.
혁련소천은 씨익 웃었다.
"너는 결코 혈종잠을 피할 수 없다. 설혹...... 단우비라 해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미소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의 빛깔로 제갈천뇌의 몸을 적셔왔다.
"그것을 쓰면...... 당신은 죽소."
"어차피 나는 죽는다. 허나......."
혁련소천은 조금씩 뒷걸음질치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 혈종잠을 사용하지는 않겠다. 애써 키워온 그대의 야망을
이런 식으로 허물어뜨릴 생각은 없으니까......."
"......!"
"대신 너도 내가 얻은 열한 권의 비경을 얻을 생각은 버려야 한다."
"......!"
"너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
제갈천뇌의 고개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끄덕여지고 있었다.
― 얻고자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취하라. 허나......
네가 얻을 수 없다면 남도 그것을 얻지 못하도록 하라.
그래도 취하고 싶다면...... 너는 생사를 도외시한 중대한 모험을
해야만 할 것이다.
제갈천뇌가 움찔하는 그 순간이었다.
뜻밖에도 혁련소천이 침사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무슨 짓이오?"
슈슉!
찰나지간, 제갈천뇌의 소매춤에서 흰 깃털 하나가 혁련소천을 향
해 섬광처럼 폭사되었다.
"하핫...... 백우전(白羽箭)인가?"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피가 솟았다.
백우전이 혁련소천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혁련소천의 몸은 이미 침사 깊숙한 곳으로 급격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 모든 것은 제갈천뇌가 어찌해 볼 틈도 없이 그야말로 찰나지간
에 일어났다.
침사는 혁련소천의 몸과 열한 권의 비급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삼켜 버렸다.
한동안의 정적이 자색연기와 함께 제갈천뇌의 주위를 묵묵히 감돌
았다.
"뜻밖이었다......."
씁쓸한 고소가 흘러 나온 건 한참만의 일이었다.
"과연...... 대종사다운 일이었소."
그는 참사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어 정중한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내가 태어나 가장 두려워했고 또한 가장 존경했던 당신...... 혁
련소천 대종사......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그것은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의 진심이었고, 혁
련소천을 향하는 마지막 예우이기도 했다.
"당신이 못다 이룬 천하패권의 위업...... 반드시 내가 이루고 말 것이오."
제갈천뇌는 천천히 돌아섰다.
"혈경...... 아무리 무서운 비급일지라도 내 머리보다 무섭지는
못할 터...... 섭섭하지만은 않소이다, 대종사......."
중얼거리는 그의 입언저리로 흡족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이제 당신이 사라진 이상...... 이 하늘 아래 나의 적수는 누구
도 될 수 없을 것이오. 그 누구도......!"
자욱한 운무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가는 제갈천뇌의 뒷모습이 신
비스럽게 보였다.
침묵의 침사......!
언제 무엇을 삼켰냐는 듯이 침사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을 뿐이었
다.
혁련소천...... 과연 그는 어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