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4권 제79장 마지막 관문(關門) 그리고...... 혈경(血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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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 한 위대한 기인(奇人)의 집념으로 하나의 관문(關門)이 만들어졌다.
오천살관(五天殺關)―!
― 범인(凡人)은 나의 곁에 감히 범접치 못하리라!
현세(現世)에 한 불세출의 기재(奇才)가 있어 운명적으로 그 관문
에 도전을 했다.
바로 혁련소천......!
생(生)과 사(死)의 순간 순간이 숨가쁘게 교차하고 있는 이곳 혈
왕(血王)의 문(門).
그 마지막 관문― 오천살관!
인간의 발길을 막으려는 거대한 장벽과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한
인간의 도전!
그것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혈왕 나백과 혁련소천의 보이지 않는
결투이기도 했다.
<천살관(天殺關).>
누렇게 죽은 이끼의 잔재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 비문(碑
文), 바로 이곳이 오천살관의 마지막 관문임을 알리는 글이다.
혁련소천은 천살관 입구에 세워진 석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어 그
가 돌파한 사관문(四關門)이 얼마나 험난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허나 그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
혁련소천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천살관의 석비 아래 쓰여진 글귀를
빠르게 더듬고 있었다.
<후인이여......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는 위대한 승자(勝者)이며, 영광의 고수이다.
본좌 혈왕 나백은 진정 경하해 마지 않는 바이다.
이곳은 오천살관의 마지막 철살관, 이것만 넘으면 혈경이 그대 손
에 쥐어질 수 있을 것인즉, 본좌는 그대가 모든 것을 얻어 찬란했
던 혈왕의 영예를 후세만대에까지 빛내 주기를 바라노라.
건승(健勝)을 기원하며......
나백(羅白) 유필(遺筆).>
"좋은 소리요. 허나...... 나백 당신은 나, 혁련소천을 모르고 있소."
먹물이 번져 나듯 오연한 미소 한 줄기가 혁련소천의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혈경을 얻는 것도 좋겠지. 허나...... 지금 내가 오천살관에 도
전하는 것은 당신 나백이란 인간에게 도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
오."
나직이 중얼거리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놓았다.
그래...... 나보다 강한 사람은 고금을 통틀어 그 누구도 용납하
지 못한다.
단우비도...... 당신 나백도......!
나보다 강한 자 현세에 존재한다면 몸으로 부딪쳐 꺾을 것이
고...... 과거에 존재했다면 시공을 초월해 내가 그의 머리 위에
설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나 혁련소천의 자존심(自尊心)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니까......!
거대한 호수(湖水) 하나가 혁련소천의 두 눈 가득히 들어왔다.
허나 그것은 물이 고여 있는 호수가 아니었다.
물 대신 온통 모래로 가득 채워진...... 그것은 사호(砂湖)였다.
사호의 중앙에는 조그만 섬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주위에 자
욱이 깔린 자색의 안개와 함께 자못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천살관(天殺關)―!
다소 신비스럽긴 했지만 어찌 보면 단순하기 그지없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허나,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복잡할 수도 있음을 아는 사람이 바
로 혁련소천이었다.
'혈경은 분명히 저 섬 안에 있는 것이고.......'
혁련소천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모래와 안개...... 여기에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 것 같구나. 오
천살관 중 마지막 관문이 될 만큼 무서운 함수관계가.......'
문득 그는 발 밑의 돌 하나를 주워 사호로 던졌다.
툭......!
돌이 모래에 떨어지는 소리,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돌은 물이 스며들 듯 모래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침사(沈砂)다!"
혁련소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대막의 유사하(流砂河)에 존재한다는 침사가 어찌 이런 곳
에......."
그의 콧등에 가벼운 주름이 잡혔다.
연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는 자신의 옷을 약간 찢어 모
래 위로 떨어뜨렸다.
순간 놀랍게도 그 가벼운 옷자락 역시 스며들 듯 모래 속으로 잠
겨드는 게 아닌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무서운 흡수력을 지녔구나!"
혁련소천은 시선을 들어 사호 중앙의 섬을 응시했다.
"여기서 저 섬까지의 거리는 길어 봐야 삼십여 장...... 웬만한
절정고수라면 단번에 날아갈 수 있는 거리다."
그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나백같은 인물이 그 정도의 계산도 없이 이곳을 오천살관의 마지
막 관문으로 두웠을 리는 만무하고......."
문득 그의 두 눈에 이채가 솟아났다.
"그렇다면...... 저 자색의 안개가 문제일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돌을 집어 섬을 향해 던졌다.
헌데 돌은 십여 장도 채 날아가다 말고 돌연 밑으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음?"
혁련소천은 흠칫 놀랐다.
이어 그는 또 하나의 돌을 집어 섬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슈우욱!
돌은 허공을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허나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두 번째 돌이 처음 것보다 오륙 장 남짓
더 날아가다가 떨어졌다는 것뿐이었다.
'이럴 리가...... 이천 장을 날아가도 시원찮을 텐데, 고작 이십
장이라니.......'
또 한 번...... 그러고도 두 번을 더 거듭해서 시도했으나 결과는
매일반이었다.
'역시...... 저 안개에 문제가 있구나!'
혁련소천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상대는 인간이 아닌 돌멩이 하나 통과시키지 않는 무형의 안개!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굴려봐도 도무지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지!'
혁련소천은 결국 하나뿐인 방도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봐야 나오지 않는 결론이라면...... 몸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번쩍!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의 신형이 벼락같이 전방으로 폭사
되었다.
십오륙 장 정도 쏘아갔을까?
돌연 혁련소천은 부드럽기 이를데 없는 무형의 기운이 자신의 앞
을 막는 것을 느꼈다.
'읏......!'
부드럽다고는 하나 그 기운에 맞닥뜨리는 순간 혁련소천은 철벽에
부딪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퉁기듯 일 장 가량 밀려 나온 혁련소천은 급히 허공을 딛고 몸을
세웠다.
다음 순간, 그는 전신공력을 최고로 끌어올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
음을 내딛었다.
부력답공(浮力踏空)!
무풍마간 쌍비람에게서 전수받은 바 있는 경공술 최대절학이 지금
전개되는 순간이었다.
'으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혁련소천의 몸은 식은땀으로 후
줄근히 젖어갔다.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으며 강력
하게 퉁겨내는 것이었다.
'우...... 전설에 자하천무(紫霞天霧)라는 것이 있다더니......
이게 바로 그것인 모양이구나!'
자하천무(紫霞天霧)―!
전설은 이렇게 말한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럽되, 천하의 그 어느 것도 통과할 수 없는 천
력(天力)의 자색 안개가 있으니...... 일컬어 말하기를 자하천무
라 하더라.......
'섬까지는 불과 칠팔 장 남았을 뿐이건만.......'
이미 전신공력은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러나 앞으로 나
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혁련소천의 몸은 사방에서 죄어오는 압력으
로 인해 조금씩 밑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으니.......
'빌어먹을......!'
이를 악문 그의 이마에는 어느덧 지렁이같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일찍이 발휘된 바 없는 최고(最高)의 힘으로 맞서고 있건만 그의
발바닥은 끝내 사호(砂湖)의 표면을 딛고 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사호가 요동을 치며 혁련소천의
발을 휘감아 버렸다.
쏴우우우......!
'우웃!'
혁련소천은 가슴이 철렁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이제는 사호에게 빨아당기는 강력한 흡력까지
가세하자 혁련소천의 몸은 금세 허벅지까지 잠겨들었다.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그 방법을 시도할 수밖에.......'
무게도, 형체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천력의 자하천무도 통
과가 가능한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나의 생령(生靈)뿐이다!
혁련소천의 몸이 가슴까지 감겨들었을 때였다.
슈우우......!
돌연 혁련소천의 백회혈에서 흰 기체 한 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솟구쳐 나오기가 무섭게 곧장 사람의 형상으로 뭉쳐졌으
니...... 바로 또 하나의 혁련소천이었다.
스으으......!
또 하나의 혁련소천, 그가 마치 유령처럼 자하천무 속을 가르고
칠팔 장 남짓 떨어져 있던 섬에 내려선 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
의 일이었다.
'성공이다!'
그는 내려서자마자 사호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곳의 혁련소천은 막 얼굴이 잠겨들고 있었다.
'저것은 사령(死靈)...... 나는 생령(生靈).......'
그는 자신의 또 다른 몸이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
했다.
"이기이체현현도(以氣離體玄玄道)...... 사령(死靈)이 사호 속에
빠졌으니 두 번 다시 전개할 수 없겠구나......."
이기이체현현도!
인간의 상식을 깨뜨리고 일반 무학과는 아예 그 차원마저 달리하
는 최후최대의 사법(死法)!
사후 금자생의 바로 그 기공이 칠 년 만에 재현된 것이었다.
혁련소천은 사령이 잠겨든 사호에서 아쉬운 듯 눈을 떼고 느릿하
게 몸을 돌렸다.
또 하나의 비석은 섬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었다.
<후인이여......
비로소 그대는 진정한 혈왕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앙축하노라.
기꺼운 마음으로 그대를 맞이하노니.......
그대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 될 것을 확신하노라.>
'그것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소!'
값 비싼 웃음이었다.
<...... 혈왕소를 꺼내 비석의 구멍에 집어 넣어라.
나의 모든 것이 그대를 맞이하리라.>
비문의 추서를 읽으면서 혁련소천은 혈왕소를 품 속에서 꺼냈다.
이어 그는 비석 중앙에 뚫려 있는 구멍 속으로 혈왕소를 깊숙이
쑤셔 넣었다.
우르르릉......!
순간 웅장한 굉음이 일며 비석이 땅 속으로 푹 꺼지는가 싶더니,
돌연 지하 깊숙한 곳으로 이어진 통로가 혁련소천의 눈 앞에 드러
났다.
"......."
혁련소천은 천천히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은 검은 오석(烏石)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계단의 숫자는 정확
하게 예순다섯 개였다.
뚜벅뚜벅......!
단조로운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혁련소천은 천천히 계단이 끝나는
곳에 내려섰다.
그러자 그의 앞에 정방형으로 깨끗하게 다듬어진 석실 하나가 문
을 활짝 연 채 기다리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서슴없이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그의 시야에 잡힌 건 석실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하나의
석상이었다.
비록 석상이라고는 하나 준수하기 이를데 없는 중년의 얼굴과 몸
에서 풍기는 기품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하웅주(天下雄主)로서
의 분위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혈왕 나백이다!'
그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혁련소천은 굳이 보지 않아도 한 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찬찬히 시선을 석상 아래로 이동하자 혁련소천은 드디어 피처럼
붉은 책자 한 권을 볼 수 있었다.
붉은 책자의 겉장에는 고대의 전자체로 단 두 글자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혈경(血經).>
스으......!
혈경은 자연스럽게 혁련소천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디어...... 혈경을 손 안에 넣었다!'
치밀어 오르는 격동을 지그시 억누르며 혁련소천은 나백의 석상을
향해 힐끗 일별을 던졌다.
'만약...... 혈경의 내용이 내 마음에 차지 않을 경우...... 나는
당신의 석상을 박살내고 말 것이오!'
이어 혁련소천은 천천히 혈경의 첫장을 넘겼다.
그러나 몇 줄 채 읽기도 전에 그의 눈은 놀람으로 크게 떠져갔다.
"이럴 수가......."
그 감탄사로 석상이 박살나야 할 이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기억하건대...... 혁련소천이 지금처럼 넋 나간 듯한 표정을 지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
"실로...... 가공할 무학이다......!"
혈경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난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어떤 확실
한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무공도...... 절대...... 절대 이 혈경
의 무학을 당해낼 수 없으리라!"
<혈경(血經).>
이 한 권의 책자는 인간이 창안해 낼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무공
까지 모조리 수록하고 있었다.
"믿는다! 이것이라면 능히 단우비를 능가할 수 있으리라!"
확신에 찬 한 마디!
혁련소천은 순간 한 줄기 위대한 광휘(光輝)가 혈관 속을 폭풍처
럼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은 참을 수 없는 광소가 되어 그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크핫하하하...... 와하하하......."
그의 광소는 길고 긴 여운을 끌며 무척이나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
었다.
그러나 혁련소천이여...... 아는가?
그대를 겨냥한 최후의 음모가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광소가 멎은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