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4권 제69장 섭혼마령(攝魂魔靈)과 미령심광(迷靈心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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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랍산.
신강(新疆) 제일의 명산이다.
쪼르릉...... 쫑쫑......
산새의 울음소리가 상쾌하고,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져 내린다.
사시(巳時)쯤 됐을까?
문득 한적한 산로(山路)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모습을 드러냈다.
봉린지란(鳳麟芝蘭)이 저런 것이리라!
두 남녀의 모습은 실로 파랍산의 절경이 무색해질 정도로 돋보이
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혁련소천과 융사의 외손녀 미사였다.
미사는 여전히 금색면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꼭 맞는 자색경장을 입고 여인의 완숙한 호선을 그대
로 드러내며 가히 폭발적인 미태를 발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어깨를 부딪칠 듯 마주한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을 속삭
이는 정인(情人) 같았다.
혁련소천은 의젓하게 뒷짐을 진 채 취한 표정으로 파랍산의 풍경
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박...... 사박......!
미사는 조용히 그를 따랐다.
"음...... 정말 이곳은 아름답소. 중원에서도 이런 곳은 보기가
드물지."
미사는 나직이 이 웃었다.
"글쎄요...... 소녀는 이곳 경치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별반
감동을 느낄 수가 없군요."
혁련소천은 그녀에게 흘낏 시선을 주었다.
"인간이란 아무리 귀중한 것도 주위에 가까이 있으면 그 가치를
잘 모를 때가 종종 있는 게 아니겠소?"
미사는 멈칫 옥보(玉步)를 멈추었다.
그리고 면사 속에서 투시되는 미묘한 시선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
다.
"호호...... 꼭 저를 빗대어 하시는 말씀같군요."
"그럴 리가 있겠소?"
당치도 않다는 듯 혁련소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혁련소천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한 가지 의문이 있소."
"무슨......?"
혁련소천은 기이한 눈빛을 띠며 물었다.
"소저는 항상 면사를 쓰고 다니시오?"
미사는 그의 물음에 약간 멈칫했다가 이윽고 대답없이 고개만 약
간 끄덕였다.
"이유를 물어도 실례가 아닐지......."
미사는 선뜻 대답을 하기가 곤란한지 혁련소천의 시선을 피해 잠
시 침묵했다.
혁련소천은 싱긋이 웃었다.
"공연히 어려운 질문을 한 모양이오, 소저. 신경쓰지 마시오."
사람의 감정이란 실로 묘한 것, 혁련소천의 말에 미사는 망설이던
마음을 지워 버렸다.
"아니에요...... 실은 외조부께서도 제 얼굴을 보신 적이 없어요."
"음......?"
혁련소천은 짙은 호기심을 느꼈다.
"태어나서부터 말이오?"
"아이...... 무슨 농담을......."
미사는 살짝 교태를 부렸다.
"열 살 이후에 제 얼굴을 본 적이 없지요."
"음......."
문득 미사는 시선을 들어 하늘(天)을 올려다 보았다.
쳐다보기만 해도 푸른 물이 들어 버릴 것 같은 신강의 하늘이었다.
"소녀...... 천성적으로 두 눈에 기이한 마력(魔力)을 지녔어요."
"......?"
"그 누구든지 제 눈을 한 번만 보면 이상하게도 백치(白痴)가 되는 것이에요."
미사, 그녀의 음성에는 진한 우울이 깃들어져 있었다.
"눈을 보면 백치가 된다......."
미사는 나직이 탄식을 터뜨렸다.
"아무도 믿지 않지요. 허나...... 사실이에요"
"음......."
혁련소천은 침음성을 흘렸다.
미사는 고개를 내려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못 믿으시는군요."
"솔직히 그렇소."
일순 미사는 우울한 그림자를 지우며 애써 명랑한 웃음을 발했다.
"믿으셔야 해요. 제 자신도 가끔 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며
넋을 잃었다가 한참만에 깨어나곤 해요."
"......!"
혁련소천은 문득 신비함을 느꼈다.
'사겁안(邪劫眼)이란 저주의 마안이 인간의 심성(心性)을 제압하
기는 하지만...... 백치가 된다니.......'
그때였다.
미사는 걸음을 사뿐히 내딛었다.
"소녀에게 어떤 말을 해도 이 면사는 절대로 벗을 수가 없어요."
미사는 한 마리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바람결에 휘날린 계화향같은 그녀의 체취가 물씬 혁련소천의 후각을 자극했다.
'벗겨보고 싶다!'
혁련소천은 일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지체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미사......."
"네......?"
혁련소천의 부름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면서 돌아섰다.
"어멋......!"
돌연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교구를 뒤틀었다.
어느새 혁련소천의 한 팔이 그녀의 휘어진 허리를 완강하게 조이는 것이 아닌가!
"아...... 안 돼요?"
미사는 몸을 뒤척였다.
허나 혁련소천이 더욱 팔에 힘을 가했기 때문에 그녀로선 꼼짝달
싹할 수 없었다.
"영호공자...... 이러시면......."
혁련소천은 대답 대신 능란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으음......."
그녀의 교구가 파르르 떨렸다.
'의외로 감각이 예민하군!'
혁련소천은 슬쩍 왼손을 미사의 등 뒤로 돌며 솜뭉치같은 가슴을
가볍게 쥐었다.
"아아...... 거긴......."
미사는 달뜬 신음과 함께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미사......."
솜털이 보송보송한 미사의 귓불에 혁련소천의 달콤한 음성이 부어졌다.
"아음......."
미사의 면사가 나풀거렸고, 그녀의 몸은 불같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혁련소천. 여자를 다루는 데 있어 뉘라서 그를 따를 텐가?
'이만하면 됐나?'
혁련소천은 재빨리 오른손으로 미사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잡아챘다.
"그...... 그것만은......."
아차하는 순간 이미 미사의 면사는 속절없이 벗겨지고 있었다.
'후훗......!'
혁련소천은 완연히 드러난 미사의 옥용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
그러나 그 순간 혁련소천은 숨이 콱 막혀옴을 느꼈다.
그는 동공이 급작스럽게 응축되면서 석고처럼 굳어간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일신의 모든 감각기관이 정지되는 기분이 들면서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
미사는 살며시 몸을 빼냈다.
그녀의 얼굴...... 그것을 어찌 말로써 표현하랴.
얼음결처럼 투명한 살결 위에 천하의 명장(明匠)이 수천 년을 갈
고 닦은 듯이 선명한 오관(五官)을.......
특히 한 쌍의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두 눈은 신비한 금광(金光)이
마치 화륜(火輪)처럼 일렁이지 않는가!
그것은 말 그대로 마력(魔力)이었다.
"바보같은 사람......."
미사의 입술을 비집고 고뇌에 젖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허나 당신이 먼저 이렇게 한 이상......."
미사의 얼굴에 자욱한 슬픔이 번져갔다.
잠시 후 미사는 소매 속에서 호도알만한 금빛 단약 한 개를 꺼냈다.
"당신은 곧...... 정신을 차리겠지만...... 이 단약의 힘으로 영
원히 하토의 종...... 이 될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혁련소천의 입에 단약을 밀어넣으려 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때 혁련소천의 귓속으로 일점홍의 찌르는 듯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천주! 정신 차리시오!"
부르르르......!
혁련소천의 육신이 한 차례 폭풍같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미사의 동작은 순간적으로 정지되고 말았다.
"천주! 미사의 수법은 천이백 년 전 혈왕(血王) 나백을 수호하던
십대천군(十代神君) 중에 금안천군(金眼天君)의 섭혼마령(攝魂魔靈)이오."
순간 불가사의하게도 혁련소천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차! 방심을.......'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동시에 그의 시선은 저절로 미사의 눈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공에 괴이한 금광이 화륜처럼 일렁이는 미사의 두
눈이 들어오자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아닌가!
'안 되겠다!'
혁련소천은 황급히 혀끝을 깨물었다.
'미령심광을.......'
번― 쩍!
순간 악마의 섬광같은 새파란 불꽃이 쏘아지면서 혁련소천의 동공
이 금세 괴이하도록 투명하게 변해 갔다.
미령심광!
적용희산으로 하여금 영원한 사련(邪戀) 속을 헤매게 만들었던 저
주의 대법이 펼쳐진 것이었다.
"......!"
혁련소천의 괴이하면서도 투명한 눈빛에 미사는 돌연 벼락을 맞은
듯 머리 속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파파― 팟!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맞부딪쳤다.
일순 미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탈색되더니 두 눈에서 일렁이는 금
광이 더욱 맹렬해지는 것이었다.
'으...... 안 된다! 허나 여기서 질 수는 없다!'
혁련소천은 미령심광에 더욱 내공을 가중시켰다.
스스스......!
혁련소천의 눈이 엄청난 광휘를 쏘아내며 더욱 투명하게 변해갔다.
"......!"
이제 미사의 안색은 아예 밀납처럼 변하고 있었다.
반면 그녀의 두 눈에서 일렁이는 금광은 더욱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으으......!'
혁련소천은 어깨를 격렬하게 떨면서 이빨을 꽉 깨물었다.
'나, 혁련소천이 한낱 섭혼술 따위에 무너질 수는 없다!'
혁련소천은 내공을 가일층 증가시켰다.
푸스스스......!
그러자 미사의 교구는 태풍이라도 만난 듯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음......."
급기야 신음성과 함께 미사는 입가로 선홍색 핏물을 흘리며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혁련소천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허나 그 역시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때였다.
스― 슷!
일점홍이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천주!"
혁련소천은 한 손을 내저으며 희미하게 말했다.
"괜찮다. 그보다 이 소녀를......."
"천주! 그 계집은......."
이때 일점홍의 귓전으로 혁련소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일점홍, 부탁이다!)
왠지 엄중한 음성이었다.
일점홍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대답했다.
"알았소."
이어 일점홍은 미사를 풀밭에 반듯하게 누이고 맥을 짚어 보았다.
"섭혼마령을 무리하게 전개하다 단전에서 공력이 역행하고 말았군......."
혁련소천은 짤막하게 외쳤다.
"치료해라!"
"치료하려면 상의를 벗겨야 하오."
"벗겨라."
일점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천주, 나는 여인을......."
일점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혁련소천이 말을 잘랐다.
"부탁이다, 일점홍!"
혁련소천의 음성은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잠시 혁련소천을 멍하니 바라보던 일점홍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좋소. 만약 말을 한 사람이 천주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오."
혁련소천은 흐릿하게 웃었다.
일점홍은 고개를 돌리더니 거침없이 미사의 앞가슴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미사의 배꽃같은 속살이 순식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저없이 젖가리개가 풀어지고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일점홍은 일체 감정이 깃들지 않은 표정으로 양 손을 미사의 단전
에 올려놓고 공력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다시금 혁련소천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점홍, 미사의 상처는 그리 중하지 않다.)
"......?"
"치료하는 척만 해라."
일점홍은 순간적으로 구름같은 의혹을 느꼈다.
그러나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전음으로 물었다.
(천주!)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라.)
(알...... 겠소.)
일점홍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미사의 상세를 돌보는 자세를 취했다.
창백한 혁련소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으음...... 어떻게 미사가 혈왕문의 금안천군의 섭혼마령을 익혔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 혈왕문이 열린 것은 아닐 테고.......'
바로 그때였다.
"후후후...... 천하의 군마천주도 이럴 때가 있었던 모양이군."
지극히 무심냉혹한 음성이 송곳처럼 혁련소천의 고막을 찔러왔다.
순간 혁련소천 눈빛이 섬광처럼 빛났다.
'이제야 꼬리를 흔드는군!'
허나 그는 짐짓 놀란 듯이 차갑게 외쳤다.
"누구냐?"
스스슷!
순간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귀영(鬼影)처럼 나타나며 순식간에 혁
련소천과 일점홍을 둘러쌌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초절정고수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또한 가슴에는 한결같이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붉은 해골이
사이롭게 그려져 있었다.
'혈해(血海)...... 역시 혈해의 놈들이.......'
혁련소천이 염두를 굴리는 사이 그들은 서서히 간격을 좁혀왔다.
"너희들은......?"
"군마천주 영호풍! 그대의 목을 꺾으러 왔다!"
순간 일점홍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이어 몸을 막 일으키려는 순간.
(일점홍, 움직이지 말아라.)
혁련소천은 전음으로 일점홍에게 경고하며 흑의인들을 쓰윽 훑어
보았다.
"대단한 뱃심이군. 내가 군마천주임을 알면서도 나타나다니......."
전면의 흑의인이 냉혹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피의 바다! 혈해(血海)에서 왔다!"
"혈해......?"
혁련소천의 검미가 찌푸러졌다.
"누가 너희들에게 청부를......."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혁련소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혈해의 주인 사혼(邪魂) 낙궁(駱弓)이 자양노군 빙
허잠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흐흐흐...... 잘 아시는구료."
그때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숲 속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약간 긴 얼굴에 가늘게 찢어진 눈매에서 잔인하고 음사함을 물씬
풍기는 자의노인이었다.
사심마성 석북위!
그는 바로 자소천에서 제이인자로 군림하는 인물이 아닌가!
혁련소천의 눈에 놀람이 스쳐갔다.
"그대는 석...... 북위......."
"흐흐...... 알아보시는구료."
"빙허잠이 감히 나를...... 군마천주 영호풍을 치려 하다니!"
석북위는 영활한 눈빛을 굴렸다.
"이곳은 신강이오, 영호천주!"
혁련소천은 안색이 변했다.
"융사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흐흐흐...... 그는 영리한 사람이오. 결코 만마전의 싸움에 개입
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소."
석북위가 혁련소천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
"섭혼마령...... 혈왕문 십대신군의 무학 중에 유일하게 외부로
흘러 나온 것으로 그것에 걸린 당신...... 비록 견디긴 했지만 한
시진 내에 공력을 회복할 수 없다."
"으음......."
석북위는 흑의인들에게 외쳤다.
"그대들은 저 계집애같은 녀석을 제거하라!"
"알겠소이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흑의인들은 날렵하게 일점홍을 포위했다.
일점홍은 여전히 양 손을 미사의 단전에 올려놓은 채 이를 갈았다.
"비겁한 놈들!"
"살수는 죽일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흑의인들은 일제히 일점홍을 덮쳐왔다.
쐐― 애― 액!
우웅―!
그들의 합격술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듯이 완벽하고도 신랄했다.
"후훗......!"
순간 일점홍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자욱이 피어났다.
버― 언― 쩍!
환상인가?
일점홍의 양 손이 미사의 단전에서 떼어짐과 동시에 그의 소맷자
락에서 쏟아진 차가운 광채가 허공을 갈랐다.
"......!"
"......!"
흑의인들은 얼어붙은 듯이 경직됐다.
"혈...... 검...... 무...... 흔......."
쿵...... 쿵...... 쿵......!
그것으로 끝이었다.
흑의인들이 앞을 다투어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내린 것이다.
너무도 환상적이고 깨끗한 수법, 흑의인들의 천돌혈에는 한 방울
핏물이 꽃으로 피어 있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석북위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일점홍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희문을 바른 듯이 무감하여 오히려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석북위...... 죽인다!"
석북위는 물벼락을 맞은 수캐처럼 부르르 전율을 일으켰다.
비록 자소천의 서열 이 위라 하지만 무공보다는 모사(謀事)에 강한 그가 아닌가!
'놈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석북위는 힐금 혁련소천을 일별하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영호풍! 저 놈은 탈진한 상태...... 인질로 우선 위기를.......'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가?
스― 슷!
석북위는 믿기지 않을 빠른 속도로 혁련소천을 덮쳐갔다.
"어리석은 놈!"
순간 혁련소천의 야멸찬 냉소와 함께 석북위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 이런 개같은 경우가......."
어느새 혁련소천이 석북위의 완맥을 거머쥔 채 씨익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감히 네놈 따위가 나 군마천주를 능멸하다니!"
"으으......."
"네놈을 죽이고 빙허잠에게 따지겠다!"
혁련소천의 모습은 석북위에게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석북위는 사색이 되었다.
"천주...... 목숨만......."
"지저분한 놈! 세 치 혓바닥을 놀려 자소천의 서열 이 위에 오른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보아라!"
혁련소천은 석북위의 목을 움켜쥔 채 그대로 수도(手刀)로 내리쳤다.
"제...... 제발......."
석북위가 말을 잇기도 전에 퍽 하며 가차없이 그의 머리가 박살났다.
"크아아악!"
피와 뇌수가 뒤섞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혁련소천은 석북위의 시신을 가볍게 팽개쳐 버렸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일점홍은 이윽고 고소를 머금은 채 혁련
소천에게 다가갔다.
이제서야 그는 좀 전의 혁련소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주! 진정 감탄했소."
일점홍의 얼굴 위로 오랜만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뜻밖에도 혁련소천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가는 것이 아닌가.
"일점홍, 안심하기엔 이르다."
"무슨......?"
일점홍은 의혹을 띄웠다.
"아직 진짜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
"피의 바다를 관장하는 사혼 낙궁, 그 놈이 왔다!"
일순 일점홍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사혼...... 낙궁......."
혈해의 주인 사혼 낙궁이 나타났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였다.
"흐흐흐...... 과연 군마천주답군."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무심무감한 음성과 더불어 소리없이 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어둠보다 짙은 묵의(墨衣)를 일신에 걸친 중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눈은 인간의 오욕칠정을 모두 초월한 듯이 지극히 침잠되어 있
었고, 짧은 수염에 안면은 살얼음이 얄팍하게 깔린 듯 차갑고도
사이한 분위기를 내풍기고 있었다.
사혼 낙궁―!
바로 중원이대살수집단인 마정(魔井)과 혈해(血海) 중 피의 바다
를 관장하는 사혼 낙궁이었다.
중년인의 모습이나 현 나이는 이미 백여 세,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노린 자는 단 한 명의 실수 없이 죽인 살수혼(殺手魂)!
혈해와 마정을 이대살수집단이라 하는 것은 그 세력이 비슷하기
때문이지 결코 마정의 음수궁을 낙궁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낙궁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상식으로 알아야 하는 사실이었다.
가히 구천(九天)과 십지(十地)의 주인들도 경시할 수 없는 인물 사혼 낙궁!
지금 그가 나타난 것이다.
혼자가 아닌 혈해의 최강살수(最强殺手) 혈해무정구도수(血海無情九刀手)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