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68장 월야(月夜)! 그 음모(陰謀)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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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장식이 극히 호화스럽게 꾸며진 넓은 대전에 혁련소천은 술상
을 앞에 두고 융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아 있었다.
술상 위엔 온통 희귀한 산해진미로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가득 차
려져 있었다.
그들의 양 옆에는 교태가 뚝뚝 넘쳐 흐르는 두 명의 미녀가 시중
을 들고 있었다.
뿐이랴?
어디선가 흘러 나오는 은은한 주악에 맞춰 대전 중앙에는 지금 반
나(半裸)에 가까운 아름다운 무희(舞姬)들이 날아갈 듯이 군무(群
舞)를 추고 있었다.
이쯤 되면 가히 천상세계(天上世界)라 말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어서 드시와요."
"아아...... 천녀의 술도 한 잔......."
"하하하...... 좋다, 좋아."
미녀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쉴새없이 따라주는 술을 거푸 들이킨
탓인지 혁련소천의 얼굴은 붉은 노을처럼 흠뻑 상기되어 있었다.
이때 융사가 술잔을 치켜들며 느긋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돌아보
았다.
"거듭 말하건대 영호천주의 왕림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오."
혁련소천은 술잔을 마주 들어 보이며 빙긋 미소했다.
"모쪼록 오월동주(吳越同舟)가 아니면 좋겠소이다."
"하하핫...... 염려 마십시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까......."
융사는 호탕한 대소를 터뜨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쫙 펼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원과 새외의 모든 지역이 빠짐없이 그려져 있는 한 장의
지도(地圖)였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중원 십삼 개 성(十三個省) 중 강북은 노부,
강남은 영호천주의 차지가 될 것이오."
혁련소천은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머지는?"
"나머지......?"
"새외."
"......!"
융사는 흠칫하는 기색이었으나 곧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듣던 대로 역시 빈틈이 없소이다."
그는 두루마리를 말아 다시 품 속에 집어 넣으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새외 역시 절반은 영호천주의 몫이 될 것이오."
"새북사사천이 알면 난리가 나겠군."
그말에 융사의 눈빛이 순간 음침한 빛을 뿌렸다.
"흐흐흐...... 철극륭은 확실히 무서운 놈이오. 허나 그는 너무
유아독존격이라 언젠가 한 번은 크게 당할 날이 있을 것이오."
"음......."
혁련소천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궁주께 부탁이 있는데......."
"부탁이라면?"
"오래 전부터 이곳 파랍산의 경치가 절경이라 들었소."
"그건 그렇소이다만......?"
"구경을 하고 싶소."
"구경......?"
융사의 눈에 문득 의혹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혁련소천은 융사의 귓가에 얼굴을 들이대며 나직이 말했다.
"미사소저께 안내를 부탁해도 괜찮을지......."
"......!"
융사는 흠칫하는 기색이더니 돌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소."
"승낙이오?"
융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설마...... 염불은 아랑곳없이 잿밥에만 마음을 두는 것은 아니
겠지요?"
"후후...... 그럴 리야 있겠소."
"듣자하니 천주의 화명(花名)이 구천십지만마전 전역을 떨쳐 울린
다던데......."
혁련소천은 손을 내저으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염려 마시오. 내 비록 여색을 밝히는 편이나 닥치
는 대로 어찌하는 건 아니니까......."
"염려하지는 않소. 미사, 그 아이도 오래 전부터 천주를 한 번 만
나고 싶어 했으니까."
"그렇다면......?"
융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부탁인데 거절하겠소?"
"고맙소."
혁련소천은 싱긋 웃으며 오른쪽 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어머......."
여인은 교태 어린 당혹성을 흘리며 자연스럽게 안겨갔다.
혁련소천은 그녀를 느긋한 눈길로 내려다 보았다.
"네 이름은?"
여인은 사르르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벽소취...... 그냥 소취라 부르시와요."
"소취......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군."
그때 융사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시오?"
혁련소천은 야릇한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후후...... 마음에 들었다면 오늘 밤......."
"하지만......."
"하핫...... 공연히 체면 차릴 필요는 없소. 이곳 신강은 중원과
풍습이 달라 당사자만 좋으면 그냥 되는 것이오."
융사는 소취의 전신을 쓸어보며 느긋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더구나 소취는 아직 남자경험이 없는 몸이니...... 천주도 가히
섭섭하지는 않을 것이오."
"음......."
혁련소천은 게슴츠레한 눈길로 소취의 얼굴을 새삼스레 쭉 훑어보
았다.
그것은 복종이 아닌 허락이었다.
"하하하...... 좋다, 좋아."
혁련소천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린 후 대뜸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이어 그는 술잔을 소취에게 불쑥 내밀며 말했다.
"받아라."
그러자 소취는 적이 당혹한 기색을 떠올렸다.
"저...... 저는......."
"술을 못 마시느냐?"
"그...... 그렇사옵니다."
혁련소천은 술잔을 그녀의 코 앞에 바짝 들이댔다.
"그래도 마셔라. 왜냐하면 이 술은 나, 영호풍이 주는 술이기 때
문이다."
의미 있는 한 마디였다.
소취가 혁련소천이 부어 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들이킨 것은 아마
도 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소취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혁련소천은 또 한 번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좋다. 아주 좋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좋다는 것일까?
아무튼 술자리는 이렇게 해서 점점 무르익어 갔다.
융사가 마련해 준 처소로 혁련소천이 돌아온 것은 밤이 꽤 깊어서
였다.
그러나 막 방문을 열고 들어선 혁련소천의 시야에 잡힌 건 바로
탁자에 앉아 양 손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일점홍
의 모습이었다.
얼굴 바로 옆에서 일렁이는 황촉불빛을 받아서인지 일점홍의 얼굴
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요염해 보였다.
'진정 요사스러운 놈이로군!'
혁련소천은 탁자를 향해 걸음을 떼놓았다.
'허나...... 확실히 아름답다. 나도 가끔씩 야릇한 충동이 일 만
큼.......'
그는 약간 몽롱한 듯한 눈빛을 일점홍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탁자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혼잣말처럼 한 마디 내뱉았다.
"징그러운 놈이다......."
순간 일점홍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지금...... 뭐라고 했소?"
"징그럽단 말이다."
"뭐가?"
"네놈의 얼굴이......."
일점홍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왜...... 갑자기 마음이 이상해졌소?"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기분 나쁘지만 사실이다."
"후훗......."
일점홍은 기소를 흘리며 이마로 흘러 내린 머리칼을 유연한 손놀
림으로 쓸어넘겼다.
그의 그러한 동작은 그야말로 요염하고 관능적일 수가 없었다.
일점홍은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혁련소천에게 말했다.
"어떻소, 천주?"
"뭐가 말이냐?"
일점홍은 지극히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솔직히...... 오늘 밤은 나도 마음이 이상하오."
"뭐?"
"어떻소? 웬만하면 오늘 밤 우리끼리......."
흐려지는 말꼬리였다.
허나 다음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모를 혁련소천인가?
"미친 놈!"
"후후...... 나는 과거 천주같은 사람을 많이 겪어보았소. 굳
이...... 인간의 마음을 숨기려 하지 마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유혹이란 말인가?
'저 놈...... 이제 보니 정말 나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혁련소천은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양 손을 휘휘 내저
었다.
"그만 두자. 멀쩡한 나까지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후후...... 하기야 오늘만 날인 것은 아니니까......."
'못 말릴 놈이다......!'
혁련소천은 혀를 내두르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헌데...... 한 가지만 묻자."
"무슨......?"
"너는 왜 항상 여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일점홍은 피식 웃었다.
"습관이오."
"습관?"
"그렇소."
"아주 더러운 습관이로다......."
혁련소천은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더니 문득 야릇한 미소를 피어올
렸다.
"또 하나만 묻자."
"뭐가 그렇게 묻는 게 많소?"
"후후...... 너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감정이었다만......."
"......?"
"뭐요?"
일점홍의 눈썹이 순간 칼끝처럼 쭈뼛이 곤두섰다.
짓궂은 질문에 적이 화가 난 듯했다.
그때였다.
돌연 문 밖에서 청아한 옥음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으리, 소취이옵니다."
혁련소천은 히죽 웃으며 일점홍을 쳐다보았다.
"왔군."
"좋겠소."
일점홍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후훗...... 물론 좋다. 여인...... 그것도 미녀를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느냐?"
"흠......!"
이때 다시 문 밖에서 소취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으리...... 들어가도 괜찮사옵니까?"
"들어오너라. 소취."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소취가 안으로 들어섰다.
화장을 다듬은 탓인지 소취의 얼굴은 술자리에서보다 더욱 화사하
고 아름답게 보였다.
막 안으로 들어서던 소취는 일점홍을 보더니 흠칫 망설이는 기색
을 떠올렸다.
혁련소천은 빙긋 웃으며 손끝을 까닥였다.
"괜찮다. 이리 오너라!"
"......."
소취는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놓았다.
이윽고 탁자 가까이에서 소취가 무심결에 일점홍을 힐끗 쳐다보았
다.
'.......'
순간 소취는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침을 느꼈다.
소취를 뚫어지게 쏘아보는 일점홍의 두 눈에 짧은 순간 새파란 섬
광 한 줄기가 스쳐간 것이다.
소취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슥......!
그때 혁련소천의 손이 소취의 팔을 덥석 잡아당겼다.
"어머!"
소취는 크게 놀랐다.
한창 겁에 질려 있는 판에 혁련소천의 행동이 너무도 돌발적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어찌 됐든 비명이 터진 곳은 이미 혁련소천의 품 속에서였으
니.......
"일점홍."
혁련소천의 부름에 일점홍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말하시오."
"나가 있게."
"......!"
여지없는 축객령에 일점홍은 바짝 약이 올랐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하다가 돌연 멈칫하며 굳은 안색으
로 말했다.
"편히 쉬시오."
다음 순간,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밖으로 사라졌
다.
혁련소천의 두 눈에 한 줄기 괴이한 광채가 떠오른 것도 바로 그
때, 허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곱절의 빠르기로 사라졌다.
그리고 혁련소천의 얼굴에는 예의 호색적인 웃음이 피어올랐다.
"휴......."
돌연 소취의 입에서 나직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왜 그러느냐?"
소취는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문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조금 전 그 분...... 무서워요."
"무섭다고?"
"그렇사와요. 그 분은......."
혁련소천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틀렸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다."
"아니옵니다. 제가 볼 때 그 분은...... 아름답긴 하지만 어딘지......."
"그만해라."
혁련소천은 소취를 부드럽게 떼어내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 않느냐?"
"......."
소취는 비로소 본래의 방문 의도를 상기한 듯 얼굴이 발갛게 물들
었다.
"자, 똑바로 서 보아라."
소취는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혁련소천은 그녀의 전신을 느긋하게 훑어보더니 조용히 한 마디 던졌다.
"벗어 봐라."
"예?"
"모르는 모양이구나. 내 취미는 여자의 알몸 감상이라는 것을......."
"하...... 하지만......."
소취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싫으냐?"
"하...... 하오면 불이라도......."
"후후...... 불 끄고 하는 감상이라면 아예 취미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
소취는 할 수 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스르륵...... 스륵......!
사내들에겐 그저 좋은 소리, 여체(女體)를 감싼 허물이 벗겨지는
소리이기에 그 토록 좋아하는 것이리라.
여체는 어느새 실오라기를 한 올 걸치지 않은 적나라한 모습으로
혁련소천의 동공에 맺혀졌다.
"아름답군."
그러했다.
소취의 나신은 누가 봐도 그렇게 말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소취는 부끄러움보다는 칭찬을 들었다는 기쁨에 배시시 교태어린
웃음을 피어올렸다.
허나 이어지는 혁련소천의 말은 막 피어오르던 그 웃음을 말끔히
훑어가고 말았다.
"헌데...... 그 아름다움 속에는 무엇이 품어 있는가?"
"예?"
"후훗......."
냉소(冷笑)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하나!"
짤막한 외침과 더불어 혁련소천의 식지가 천장을 향해 벼락같이
퉁겨졌다.
퍽!
"크― 악!"
순식간에 천장에 구멍이 뚫리면서 비명과 함께 한 줄기 핏둥지가
구멍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
소취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바로 그 순간.
"둘!"
혁련소천의 좌장이 다시 벽을 향해 섬전같이 뻗쳐져 나갔다.
번― 쩍!
홍광(紅光)!
그것은 장심에서 쏟아져 나가는 또 하나의 작고 붉은 손(手), 미
리혈옥수였다.
콰쾅!
벽 한 부분이 종잇장처럼 터져 나갔다고 생각한 순간.
"으아아아......."
벽 가까이에서 터진 비명이 급격히 멀어지며 꼬리를 물었다.
"도망가겠다고?"
혁련소천은 차갑게 냉소하며 왼쪽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쉬― 이― 익―!
순간 가느다란 핏빛 혈선(血線)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벽의 구
멍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죽음의 실. 바로 천은사(天銀絲)였다.
"백 장까지 갈 수 있다면 너는 살아날 수 있다."
혁련소천의 중얼거림이 막 끝나는 순간,
"으아― 아―!"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폐부를 쥐어뜯는 듯한 비명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슈슉!
그 순간 또 다시 혁련소천의 왼손이 가볍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쏘
아져 나갔던 천은사가 순식간에 그의 소맷자락 속으로 회수되었다.
신기(神技)!
소취는 빠짐없이 다 목격하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세...... 세상에.......'
그녀의 얼굴에선 이 순간 한점의 핏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후후...... 융사, 그는 아직 나를 잘 모르고 있었군."
혁련소천은 차갑게 웃더니 소취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
소취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혁련소천은 싱긋 웃었다.
"후후...... 소취, 하토궁 서열 구 위(九位)의 고수인 채대옥녀
(彩帶玉女)도 놀랄 때가 있는 모양이군."
순간 소취는 눈빛까지 파리하게 굳어졌다.
"아...... 알고 있었구나!"
"하하하...... 네 체모(體毛)의 숫자까지 알고 있다면 믿을 텐가? 하하하......."
혁련소천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요란한 대소를 터뜨렸다.
그 순간 소취의 발끝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자락을 가볍게 차올렸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채대 하나가 쥐어지는가 했더니.
"죽엇!"
돌연 앙칼진 고갈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순간, 혁련소천의 눈이 커졌다.
소취의 신쾌하고 독랄무쌍한 공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녀가 허
공에 몸을 띄우는 바람에 그 은밀하고 신비스런 곳이 숨김 없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체춤을 보여주시겠다고? 하하하...... 좋다, 좋아!"
* * * * * *
스스스......!
천장에 착 달라붙어 마치 물 흐르듯 신형을 이동하는 그림자 하나
가 있었다.
그 인영은 흑의야행복(黑衣夜行服)으로 전신을 휘감고 있었는데
물 흐르듯 움직이는 그 신법은 가히 경세적(經世的)이라 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스스스......!
천장을 타고 몇 개의 복도와 회랑을 꺾어 돌았을까?
"잠행술(潛行術)이 대단하군."
돌연 한 소리 냉막한 음성이 불쑥 아래에서 들려왔다.
"......!"
흑의인이 흠칫하더니 신형을 딱 멈추었다.
이어 그는 몸을 빙글 뒤집더니 밑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계집?'
움푹 꺼져 들어간 두 눈이 상대를 빠르게 확인하는 순간,
번쩍―!
옆구리의 묵빛 장도(長刀)가 어느 새 빠져 나와 막아선 여인의 목
덜미를 꿰뚫었다.
'흐흐...... 냄새나는 계집 따위가 감히.......'
흑의인의 입 언저리에 언뜻 조소가 피어올랐다.
허나 다음 순간, 흑의인은 돌연 컥 하는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목
덜미를 와락 감싸쥐었다.
동시에 묵빛 장도가 바닥에 떨어지고, 진득한 핏물이 흑의인의 손
가락 사이로 흥건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리가......."
그때 죽어 나동그라질 줄 알았던 여인의 음성이 흑의인의 귓속에
파고 들어왔다.
"융사가 천주를 죽이라 했나?"
그 음성은 누가 들어도 사내의 음성, 막아섰던 여인은 다름 아닌
일점홍이었다.
흑의인은 경악과 불신이 어우러진 눈빛으로 일점홍의 전신을 빠르
게 훑었다.
"너...... 너는......."
"천주를 죽이려는 자는 내 손에 의해 모두 너처럼 될 것이다."
흑의인은 일점홍의 수중에 쥐어진 반자 남짓한 비수를 쳐다보며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 조금 전...... 그 비수로 나를...... 찔렀느냐?"
"그랬지."
"거...... 검법은......?"
"혈검무흔(血劍無痕)."
순간, 흑의인의 눈이 있는 대로 크게 부릅떠졌다.
"혈검무흔! 그...... 그렇다면...... 사혼(邪魂)께서 말한......
악마의 천재살수(天才殺手)가...... 바로......."
그러자 이번에는 일점홍의 눈에 경악의 빛이 번쩍 솟구쳤다.
"사혼? 혈해(血海)의 사혼 낙궁? 그렇다면 너는 혈해 소속인가?"
혈해라면 바로 마정(魔井)과 더불어 중원최강의 양대살수 조직 중
하나가 아닌가.
"비...... 빌어...... 먹을...... 하필...... 너를...... 만나...... 다니......."
흑의인은 대답 대신 그 말을 내뱉고 맥없이 고꾸라졌다.
일점홍은 그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혼 낙궁...... 그 자가 융사와 손을 잡았는가? 그렇다면......
융사는 혈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소천주 빙허잠과도 손
을 잡았다는 뜻인데......."
문득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천주가...... 위험하다!"
팟!
그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와지끈!
혁련소천이 기거해 있는 방문이 산산조각 박살나고 순식간에 일점
홍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
그러나 일점홍은 아연 멍청해지고 말았다.
그의 두 눈에 보이는 실내의 풍경은 그야말로 진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취는 알몸을 채대에 묶인 채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혁련소천은 깃털 하나로 그녀의 희멀건 허벅지 사이를 느릿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으음......."
당연히 흘러 나옴직한 신음.......
소취는 벌거벗은 몸뚱이를 뱀처럼 뒤틀며 연신 숨막힐 듯한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천...... 주......."
일점홍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에게 다가갔다.
순간 혁련소천은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히죽 웃어 보였다.
"후후후...... 일점홍, 어서 가서 융사를 좀 데려오게. 이 재미있
는 광경을 어찌 나 혼자 볼 수 있겠나?"
"......!"
잠시 어이없어 하던 일점홍은 곧이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은 두 손, 두 발 몽땅 들었다는 뜻이었다.
"아― 악!"
돌연 소취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수 한 자루가 소취의 목덜미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허나 혁련소천은 그녀에게 일별조차 주지 않고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살인멸구(殺人滅口)라...... 괜찮은 방법이지."
"와하하하......."
돌연 우렁찬 광소가 터지면서 금빛 인영 하나가 실내에 번쩍 들어
섰다.
융사, 바로 그였다.
혁련소천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궁주의 솜씨였을 테지?"
융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소."
"해명을 원한다면?"
융사는 문득 두 눈을 음침하게 빛내며 말했다.
"나는 강자(强者)를 좋아하오."
"그래서?"
"비록 영호천주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소문만으로
모든 걸 믿고 넘기기엔 내 성격이 용납치 않소."
"말하자면 내 능력을 시험해 보았다는 말인데......."
융사는 문득 신색을 엄숙하게 가다듬었다.
"양해하시오. 최소한 나와 합작하려는 사람이라면 나와 버금가는
인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혁련소천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결과는...... 합격이오?"
"하하핫...... 그렇지 않다면 내 어찌 소취를 죽였겠소?"
융사가 입이 찢어져라 웃는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일점홍의 전음이 혁련소천의 귓전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천주, 융사는 빙허잠과도 이미.......)
(알고 있다. 허나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어라.)
혁련소천의 빠른 전음에 일점홍은 또 한 번 멍청해지고 말았다.
이때 혁련소천은 웃음 띤 얼굴로 융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제 궁주의 뜻은 충분히 알겠으니, 내일 아침 미사소저께 이야
기나 잘해 주시오."
"하하핫...... 그야 여부가 있겠소이까?"
빠끔히 뚫린 천장의 구멍을 통해 한 줄기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