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65장 야망(野望)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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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심보옥(血心寶玉)!
그것은 피독(避毒), 피수(避水), 피화(避花)의 오묘한 공능(功能)
을 간직하고 있으며, 붉디붉은 진홍빛 광채를 환상처럼 빚어내는
아름다운 구슬이다.
허나, 그 혈심보옥을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
어찌 그 아름다움을 혈심보옥에 비할 수 있으랴!
영롱하고 준수하며 또한 보는 이의 혼(魂)마저 빨아당길 듯이 신
비롭게 빛나는 저 눈!
뿐인가?
코, 입, 귀...... 도대체 흠 잡을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
아볼 수 없는 절대완미(絶對完美)의 얼굴이 아닌가!
이 중원천하를 통틀어 이토록 완벽한 미인(美人)은 꼭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옥산랑, 바로 그녀였다.
탁자를 사이에 둔 채 지금 그녀의 맞은편에는 비할데 없이 준수한
한 미장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혁련소천이었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옥산랑은 아름다운 눈을 깜박거리며 줄곧 혈심보옥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의자에 상체를 기댄 채 느긋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보기만 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간 후, 비로소 혁련소천의 입술이 떼어지며
한 소리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산랑......."
옥산랑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그 말에 옥산랑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아내가 낭군을 찾아온 것도 잘못인가요?"
"후후...... 우리는 아직 결혼한 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옥산랑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흥! 저는 이미 오 년 동안이나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미 혼기가
지나도 한참이 지났단 말이에요."
"오...... 그래서?"
"이제 당신마저 저를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저는 꼼짝없이
처녀귀신이 되고 말 거예요"
혁련소천은 나직이 웃었다.
"후후...... 농담 마시오, 산랑. 당신은 여전히 최고의 미를 지니
고 있는 천하제일의 미인이오."
아름답다는 칭찬을 싫어하는 여인이 있겠는가.
옥산랑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예쁜 눈을 곱게 흘겼다.
"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거짓말을 하세요."
이런 말을 들었을 경우.
― 그래, 거짓말이었어.
이렇게 대답해 주면 눈에 쌍심지 돋우지 않을 여인도 없다.
그러나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혁련소천은 그저 낭
랑한 웃음만 터뜨릴 뿐이었다.
"하하하......."
감천곡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옥산랑의 방문으로 모처럼만에 기분
좋게 웃어보는 혁련소천이었다.
지난 오 년 동안 옥산랑은 매년 두 번씩 혁련소천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혁련소천은 최고의 예우로서 그녀를 맞이했었고, 머지
않아 그녀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말도 여러 차례 언급해
온 터.......
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옥산랑이 장차 혁련소천의 정실이
되리란 것은 군마천의 그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옥산랑은 유쾌하게 웃고 있는 혁련소천을 잠시 정겨운 눈길로 바
라보더니 다시 천천히 혈심보옥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이 구슬...... 무척 아름답죠?"
혁련소천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무척 희귀해 보이는데 어디서 구했소?"
"샀어요."
"누구에게서?"
"원래 이 구슬의 주인은 산동(山東)의 거부(巨富) 금덕산(金德山)
이었는데 이 구슬로 인해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다며 저에게 팔았
어요."
"그 정도면 내가 보아도 탐을 낼 만한 물건이지."
옥산랑은 문득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보물은 하나뿐인데 노리는 사람은 많고...... 생명의 위협을 느
끼는 것도 당연하지요."
"만마전의 보좌와도 비슷하군."
혁련소천의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디에 옥산랑은 때마침 기회를
잡았다는 듯 지체없이 말꼬리를 물었다.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은 경우죠."
혁련소천은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산랑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옥산랑은 정색하고 말했다.
"산랑이 주제넘게 한 말씀 드리겠어요."
"음......."
"비록 만마전의 보좌가 위대하고 거룩한 자리라고는 하나......."
"됐소."
혁련소천은 비로소 그녀의 의중을 간파하고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으니 그만 두시오."
옥산랑은 아미를 곱게 찡그렸다.
"풍, 당신은 굳이 그 길을 택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훌륭해질 수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무림의 최고봉이 되어 봐야 결국......."
"결국 무림인에 불과할 뿐일 테지."
"그걸 아시면서도......."
혁련소천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산랑! 그 말은 진정한 사나이의 야망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사
람들이 하는 말이라오."
"하지만......."
"그만 둡시다, 산랑!"
"......!"
옥산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설혹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하여도 혁련소천의 뜻만은 꺾을 수 없
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옥산랑은 혈심보옥을 양 손으로 감싸쥐며 나직이 탄식했다.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고 계세요."
"무슨......."
"얼마 전부터 풍의 아버님께서 만마전의 혈겁에 관여하시기 시작
했어요."
"뭣이?"
혁련소천의 안색이 돌연 확 바뀌었다.
"아버님께서?"
"쉬......!"
옥산랑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자 혁련소천은 움찔했다.
옥산랑의 한 차례 주위를 살펴본 뒤 나직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저도 아버님께 들은 말인데 이번에 황제께서 극비리에 풍의 아버
님께 황명을......."
옥산랑의 이야기가 끝나자 혁련소천의 입에서 절로 묵직한 침성이
흘러 나왔다.
'이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중대한 사태이다!'
그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옥산랑은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이번 일에는 저의 오라버니께서도 끼여
들으셨어요."
"음......."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 관한 소문은 얼마 전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
옥승비(玉乘飛), 비록 무림에 이 이름이 알려진 것은 불과 삼 년
남짓하나 그 이름은 이미 전 중원을 위진시키고 있었다.
어사대부 옥부상을 부친으로 두고 있다는 막강한 배경 탓도 있었
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정도무림의 영원한 전설로 일
컬어지는 천산쌍로(天山雙老)의 의발전이라는 사실이었다.
옥산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수심에 찬 눈길로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풍, 만약 당신이 만마전 보좌에 끝까지 도전한다면 언젠가는 필
연적으로 오라버니와도 부딪치게 될 거예요."
혁련소천은 턱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그럴 경우...... 어떡하실 건가요?"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문득 나직한 웃음을 발했다.
"재밌군요. 그렇게 되면 산랑은 누구를 응원하겠소?"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당혹해진 것은 오히려 옥산랑이었다.
한동안 그녀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후...... 그런 말은 산랑 당신이 먼저 물었었지."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옥산랑의 뒤쪽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며 말했다.
"산랑......."
옥산랑은 조용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눈에는 뿌연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사랑하오, 산랑......."
"......!"
옥산랑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윽고 두 눈을 사
르르 내리감았다.
"아무튼 잘 되기만 바랄......."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혁련소천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덮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방울 눈물이 두 사람의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 * * * *
천금병마 담대우리, 그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인물과 마
주앉아 있었다.
한 명은 다름 아닌 혁련소천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일신에 천룡포를 걸쳤고, 세 가닥 검은 수염을
교룡처럼 길러내린 위엄 있는 모습의 노인이었다.
천룡제신마(天龍制神魔) 악군초(岳群草)!
십지(十地) 중 천룡성지(天龍聖地), 즉 천룡보(天龍堡)의 보주가
그였다.
"그러니까 마정의 아이들이 영호천주를 암습하려 했다 그 말인
가?"
담대우리는 혁련소천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혁련소천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요."
담대우리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렇군. 어쩐지 노부가 오는 길에 몇 명의 방해자가 있다 했더니
바로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군."
그때 천룡제신마 악군초가 냉소를 터뜨렸다.
"잘됐다. 이번 기회에 아예 마정을 흔적도 없이 제거해 버려야겠
다!"
혁련소천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악보주께서 한 번 힘써 주시겠습니까?"
악군초는 차갑게 웃었다.
"한 달 안으로 마정이란 이름을 중원에서 삭제시키겠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룡보가 움직인다면 마정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혁련소천은 다시 담대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중원에 잠시 나가 보려 합니다."
담대우리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중원을?"
"그렇습니다."
담대우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네. 지금 영호천주를 노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렇다면......?"
혁련소천은 기소를 발했다.
"후후후...... 바로 그것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
"또 한 가지 이유는 하토살군 융사가 저와의 만남을 비밀리에 제
의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담대우리의 안색이 변했다.
"융사가...... 그 자가 무슨 일로?"
"모르겠습니다. 허나......."
혁련소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짐작컨대...... 중원이란 먹음직스런 떡이 너무 크다 보니 그것
을 자르기 위한 칼이 한 자루쯤 필요한 모양입니다."
"음......."
담대우리는 묵직한 침성을 흘리며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악군초가 느긋하게 한 마디 내뱉았다.
"좋아. 한 번쯤 자신의 주위를 점검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테
지. 허나 조심하게. 만약 자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노부
의 딸 아이가 이 늙인이의 수염을 몽땅 뽑으려고 덤벼들 테니
까......."
"하하하......."
혁련소천은 상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악군초의 딸이라면......?
이름은 악소채, 삼 년 전 악군초는 혁련소천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천곡을 통해 그녀의 문제를 은밀히 상의했었다.
그 후, 군마천과 천룡보 사이에 아무도 모르는 한 가지 묵계가 이
루어졌으니.......
그것은 나중에 밝혀질 일이었다.
혁련소천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채에게 안부나 전해 주십시오."
악군초는 괴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흐...... 전하다마다. 두 말 하면 잔소리지."
그때 담대우리의 묵직한 음성이 혁련소천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영호천주!"
"......?"
혁련소천은 그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담대우리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무겁게 말했다.
"혈궁천주 귀검사랑과 자소천주 빙허잠, 그 두 명을 항상 유념하
도록 하게."
순간 혁련소천의 눈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기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귀검사랑......!'
* * * * * *
그로부터 사흘 째 되던 날 밤, 혁련소천은 귀신도 모르게 군마천
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구천십지만마전 내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서였다.
이 일은 순식간에 군마천을 제외한 나머지 팔 천의 천주들을 느닷
없이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무슨 의도인가?
오 년 동안 침묵을 지켜온 군마천이 무슨 까닭으로 움직이기 시작
했는가?
왜?
의문과 더불어...... 팔 천의 움직임이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
다.
혁련소천, 그의 속셈은 과연 무엇인가?
주위를 점검하고 하토살군 융사를 만나는 것이 밀행(密行)한 이유
의 전부인가?
대답은......?
그것은 그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찾아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