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64장 제구대 군마천주(第九代群魔天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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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정실의 침상 위에 한 노인이 전신을 축 늘어뜨린 채 무기
력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잿빛에 가까운 안색, 퀭하니 움푹 꺼져 들어간 두 눈은 언뜻 보기
에도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군마천주 감천곡이었다.
일 년 전부터 감천곡의 병세는 급자기 악화되고 있었다.
그것은 칠 년 전 천간산에서 신비인(神秘人)으로부터 얻어맞은 대
력금황기(大力金皇氣) 때문이었다.
그 동안은 본신의 막강한 내력으로 상처를 억제해 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상처가 조금씩 살아나 오늘의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
다.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최악의 상태까지.......
침상 앞엔 육 인(六人)이 무거운 표정으로 늘어서 있었다.
혁련소천과 홍포구마성 반태서, 무형천궁 공손무외를 비롯하여 백
신제중 사도광, 천패도 부철룡, 쌍지비탄 도위강...... 이른바 군
마천 위하 일전이각(一殿二閣)의 주인 등이었다.
감천곡을 바라보는 그들 육 인의 표정은 한결같이 침통하게 굳어
있었다.
특히 혁련소천의 표정은 더욱 그러했다.
그는 사흘 전 반태서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 감노형은 앞으로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그것은 죽음의 선고였다.
비록 혁련소천이 영호풍의 신분으로 군마천에 위장잠입하기는 했
으나 그가 감천곡에게 느끼고 있는 정(情)은 의외로 각별한 것이
었다.
그러한 감정은 감천곡의 죽음이 임박한 지금에 이르자 더욱이 실
감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
실내에는 여전히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가 열기처럼 흐르고 있었
다.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감천곡의 두 눈은 이 순간 무섭도록
텅 비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퀭한 그의 두 눈에 돌연 미세한 광채 한줄기
가 피어올랐다.
이어, 바짝 타들어간 입술이 힘겹게 떼어지며 미약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모두...... 노부의 말을 잘 들어라."
육 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천곡이 마지막 말을 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천곡은 천천히 육 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 갔다.
그의 흐릿한 시선 속으로 몰라보리 만큼 헌걸찬 모습으로 성숙한
혁련소천이 눈부시게 쏘아져 들어왔다.
순간 혁련소천을 바라보는 감천곡의 흐릿한 눈 속에 한 줄기 따스
한 빛이 흘러 나왔다.
"영호공자!"
"......!"
"자네가 군마천을 맡아주는 한 노부는 웃으면서 눈을 감을 수 있
네. 더욱 강하고...... 더욱 튼튼한 군마천이 될 것을 믿어 의심
치 않으니까......."
혁련소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천곡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좋아......."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다시 공손무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겨갔다.
"공손형......."
"......!"
"내가 신신당부했던 말...... 잊지 않았으면 하오."
"......!"
공손무외의 눈빛이 짧은 순간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회복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감형, 나 공손무외는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편이오. 허나 한 번
뱉은 말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절대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라오."
그의 말에 감천곡은 희미하게 웃어 보이더니 이어 반태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반태서는 감천곡이 미처 입을 열 사이도 없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염려 마시오, 감노형. 나 반태서...... 죽음으로써 군마천을 지
킬 것이외다."
감천곡은 스르르 눈을 감으며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고맙네. 노부는 그대에게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거늘......."
"......!"
반태서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한 눈치였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
며 입을 다물었다.
"사도광!"
백신제중 사도광은 공손히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천주!"
"내가 죽으면...... 영호공자가 제구대 군마천주가 된다."
"천주......."
"그대는 충심이 강하다. 그것을...... 구대천주에게도 아끼지 않
기를 바란다."
사도광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염려 마십시오. 사도광, 목숨을 걸고 구대천주를 보좌해 드릴 것
입니다."
"......!"
감천곡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영호공자만 남고...... 모두 나가 있도록 하게."
그 말에 반태서는 흠칫했다.
"감노형......."
"노부의 죽는 모습......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반태서의 미간에 언뜻 침울한 주름이 아로새겨졌다.
'일각...... 길어야 일각이다!'
그는 잠시 감천곡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이어 좌우를 돌
아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무외 등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리없이 밖으
로 물러 나갔다.
그들이 빠져 나가고 잠시 죽음같은 정적이 실내에 앙금처럼 내려
앉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감천곡의 입술이 다시 떼어졌다.
"영호공자......."
혁련소천은 침상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말씀하십시오, 노선배......."
"아직도...... 나를 노선배라 부르는군."
감천곡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암울한 눈빛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하며 말했다.
"왜 자네만 남아 있으라 한 줄 아는가?"
"......!"
"죽기 전 자네에게 한 마디 물어볼 말이 있어서였네."
혁련소천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노선배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감천곡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먼저 말해 보게."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의 이름은 영호풍이 아닙니다."
그 말은 감천곡에게 있어서 확실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
다.
허나, 감천곡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람은커녕 더욱 짙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알고 있었네."
"......!"
오히려 놀란 것은 혁련소천 자신이었다.
그는 약간 당혹한 어조로 말했다.
"알면서도......."
"노부가 원하는 것은...... 신분이 아닌 강자(强者), 바로 그것뿐
이었네."
"노부가 자네를 택하였던 이유는...... 자네 이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네 자신 때문이었네."
혁련소천은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 생각보다 훨씬 큰 그릇이었구나!'
감천곡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부는...... 지난 구십오 년간 군마천을 지켜왔네."
"......!"
"무척 피곤한 일이었지. 허나 보람을 느낀다네. 자네처럼 강하고
훌륭한 후계자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었으니까......."
혁련소천은 조용히 물었다.
"노선배께서 물어보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름...... 진정한 자네의 이름이라네."
"......!"
"허허...... 자네의 진정한 이름조차 모르고 죽는다 생각하니 어
쩐지 서운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의 공허한 웃음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비애가 진득하게 배어 있
었다.
혁련소천은 더 이상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천, 제 이름은 혁련소천이라 합니다."
"혁련...... 소천......."
나직이 되뇌이던 감천곡의 두 눈에 문득 실낱같은 이채가 스쳐 지
나갔다.
"과거 혁련이란 성을 가진 무서운 인물 한 명이 무림에 있었는데
자네, 혹시 아는가? 혈뇌사야(血腦邪爺)...... 혁련후라고......?"
혁련소천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이 바로 제게 성을 주신 분입니다."
순간 감천곡의 흐릿한 동공 속에서 번쩍 기광이 쏟아졌다.
"그렇다면 그와 자네는 혈족......?"
"그렇지는 않습니다."
감천곡은 기이한 눈빛으로 혁련소천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랬었군. 대강 짐작이 가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 잿빛을 띠고 있던 감천곡의 얼굴에 돌연 불그레한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순간 혁련소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이른바 생명의 불꽃이 다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며, 매우 짧은 순간
에 끝나는 일시적인 현상임을 뉘라서 모르랴!
감천곡은 갑자기 정신이 맑아진 듯 한결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네, 영호공자!"
"......?"
"자네가 고아라면 나 또한 고아라네. 전대천주께서 나를 양자로
맞이했던 것이지."
그것뿐, 감천곡은 그윽한 눈길로 혁련소천을 응시하며 더 이상 말
하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그는 감천곡이 무엇을 부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는 담담한 표정 그대로 감천곡을 마주볼 뿐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감천곡의 눈언저리에 서서히 잔물결같은 경련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실망감이었다.
허나 그는 그런 기색을 애써 억제하며 나직한 웃음을 발했다.
"허허...... 괜한 말을 꺼내 자네의 마음을 상하게 한 모양이군.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지나친 욕심을 부렸군......."
그러나 그는 말을 하다말고 문득 오른쪽 어깨를 움찔했다.
어느새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하는 손 하나가 그의 오른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한 음성 한 줄기가 감천곡의 귓전을 부드럽게 파고들
었다.
"진작부터 그런 말씀을 해주길 기다렸습니다, 의부!"
"......!"
감천곡의 눈이 아연 휘둥그래졌다.
맹세하건데, 그가 자신의 청력을 의심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
다.
"자...... 자네 지금......."
"소천이라 불러주십시오, 의부!"
감천곡의 몸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 자네......."
복받치는 감동 탓이리라!
더 이상 목구멍 밖으로 말이 새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감천곡은 무슨 말인가를 하기 위해 몇 차례 달싹거리더니,
"와하핫핫핫......."
다 죽어가던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우렁찬 광소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천하가 내 손에 들어왔도다. 으하핫
핫......."
그리고......
돌연 광소가 뚝 멎으며 감천곡의 얼굴이 웃던 그대로 굳어졌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홍조가 씻은 듯 사라지면서 두 동공
이 급격히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에 혁련소천은 가슴이 철렁했다.
"의부!"
감천곡은 턱끝을 서너 차례 힘겹게 움직이더니 쥐어짜는 듯한 음
성을 내뱉았다.
"소...... 소천! 차...... 창문을......."
"......!"
혁련소천은 침상 바로 옆의 창문을 향해 번개같이 왼손을 내저었
다.
슈우......!
순식간에 창문이 먼지로 화해 흔적도 없이 날려갔다.
그리고 곧장 푸른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맑게 개인 하늘이
감천곡의 동공 가득히 맺혀졌다.
"푸른...... 하늘이다...... 눈이 시리도록......."
"의부!"
"저 하늘이...... 아홉 단체와...... 이 땅의 열 개...... 단체
를...... 소천...... 네 손에...... 네 손에......."
입술이 몇 차례 움직이기는 했으나, 더 이상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그리고 감천곡의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기울어져 갔다.
죽음(死)!
한 시대를 풍미한 거웅(巨雄)이 이렇게 생(生)을 마감한 것이다.
"의부......!"
혁련소천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느새 그의 꽉 감은 눈언저리로 촉촉한 물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
다.
숭덕팔년(崇德八年) 시월(十月) 그믐날, 거성(巨星)이 떨어졌다.
감천곡!
제팔대 군마천주로서 사해(四海)에 구십 년 이상 그 명성을 떨쳐
온 당대의 거성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로부터 보름 뒤, 군마천의 전 고수가 모인 자리에서 혁련소천은
마침내 제 구대(第九代) 군마천주로 즉위했다.
드디어 새로운 하늘이 열렸다고나 할까?
허나,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