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61장 대폭풍 5 소림(少林)이여! 천년소림(千年少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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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봉(少室峯).
이곳은 오 년 전 대혈겁(大血劫) 이후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휘이이잉......!
순간 메마르고 스산한 늦가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에 실려 한 잎 낙엽이라도 휘날릴 법하건만, 휘날릴 낙엽
이 없는 것은 소실봉 전역이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초토화되어 버린 까닭일 것이다.
헌데 언제부턴지 사람 하나가 폐허를 딛고 소실봉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흑발(黑髮)은 바람결에 제멋 대로 휘날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차림새가 모조리 먹빛 일색이다 보니 새하
얀 얼굴이 창백하게 느껴진다.
뿐인가?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누가 보아도 전율이 일만큼
차갑고 냉혹한 것이었다.
그는 바로 귀검사랑이었다.
귀검사랑의 시선은 멀리 서천(西天)을 뒤덮어 내리는 석양에 줄곧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감정이나 표정으로도 읽어낼 수 없는 무심(無心)의 얼굴.
헌데 언제부터인지...... 붉디붉은 석양을 바라보는 그의 눈자위
가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으니.......
귀검사랑이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린 것은 아마도 감정의 떨림을 감
추기 위함이었으리라.
잠시 후, 바윗덩이처럼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떼어지며 문
득 탄식같은 음성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신(神)은.......
나에게 너무도 잔인한 운명(運命)을 주었다.
하늘은.......
소림에게 너무도 참혹한 참화를 내리셨다.
아무리 그것이 천하를 위하는 일이라 하나.......
아아...... 신이여!
하늘이여!
구태여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는가?
귀검사랑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부친과 사형...... 자미성의 사존과 염검제...... 나와 가장 가
깝던 그 분들도 모두 사라져 갔다."
불그레하던 그의 눈빛이 점차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먼지처럼...... 그래...... 한낱 보잘 것 없는 저 숱한 먼지처럼
그들은 사라져 갔다."
바람에 휩쓸려 자욱이 휘날리는 먼지를 쳐다보는 모양이다.
"그들은 모두 위대안 성인(聖人)들이었다. 허나...... 누가 그들
을 알 것이며, 누가 그들의 위대한 노력을 인정해 줄 것인가?"
그는 두 손을 천천히 강하게 말아쥐었다.
"결코...... 결코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 그들의 죽음으로 바꾼
나...... 혜인...... 천만 번 고쳐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 분
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
움켜쥔 두 주먹에 불끈 힘이 가해졌다.
"소림은 부활한다. 천 년의 소림...... 그 영광의 역사는 아직 끝
나지 않았다......!"
― 소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돌아가신 그 어른들의 숭고한 정신을 전 중원에 알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나 혜인도 눈을 감을 수 있다......!"
석양은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데 귀검사랑의 눈에는 석양
보다 더 붉은 광채가 불길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천십지만마전!"
그의 중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은 곳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
했다.
영원한 불멸혼을 기원하며 세워진 사(邪)와 마(魔)의 요람 구천십
지만마전이여.......
기억하라!
천 년 소림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음을.......
단우비, 이 검(劍)에 그대의 붉은 피를 적시리라.
과거 소림이 네 영광을 위한 제물이었다면.......
향후의 소림은 네 피로써 부활할 것인즉.......
기억하라!
나, 혜인...... 아니, 혈궁천주 귀검사랑의 검은 항상 네곁에 머
물고 있음을.......
그때 돌연 한 무리의 흑영(黑影)이 마치 땅에서 솟아나듯 그의 주
위에 나타났다.
그 숫자는 정확하게 백 명.
이른바, 악령(惡靈)의 후예(後裔)로 일컬어지는 사랑대(邪狼隊)의
모습인 것이다.
스스......!
사랑대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 자리에 소리없이 무릎을 꿇었
다.
이어 그들은 아무 말없이 귀검사랑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윽고 귀검사랑은 몸을 돌려 느릿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눈빛은 한결같이 암울한 비애와
분노로 충만해 있음을 귀검사랑은 알 수 있었다.
'참아라. 참을 수 없어도 참아라!'
귀검사랑은 시선을 들어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되...... 단 살기(殺氣)만은 항상 삼 촌(三寸) 심장에 가득 담
고 있어라......!'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져 버린 그 말.......
어쩌면 사랑대보다는 스스로에게 향한 다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이 며칠인가?"
귀검사랑의 조용한 물음이 떨어지자 누군가가 즉시 대답했다.
"시월(十月) 스무여드레입니다."
"음!"
귀검사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 두 눈을 시퍼렇게 빛
내며 자르듯 단호한 음성을 내뱉았다.
"사흘 후부터...... 원래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순간 사랑대의 얼굴에 일제히 긴장된 빛이 나타났다.
귀검사랑은 한 줄기 냉오한 미소를 피어 올리며 독백하듯 중얼거
렸다.
"만마전...... 너의 붕괴는 곧 이루어진다. 나, 귀검사랑에 의
해......."
밀려드는 땅거미 속으로.......
귀검사랑의 눈빛이 칼끝처럼 뻗쳐 나가고 있었다.
― 원래의 계획!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말은 단 한 마디.
― 천 년 소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직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