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권 제60장 (60/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60장 대의(大義)를 위한 죽음(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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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심각(佛心閣).

  아직 이곳에는 죽음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혜광선사는 입정한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정좌해 있었다.

  그것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너무나 고요한 모습이었다.

  이때였다.

  돌연 세차게 방문이 박살나며 한 혈포인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혈궁천주 도엽, 바로 그였다.

  그는 한 손에 핏빛 방천화극을  움켜쥔 채 타는 듯한 눈길로 혜광

  선사를 쏘아보았다.

  그런 그의 또 다른 손에는 허연 뼈다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네놈이 혜광이란 애송이 잡승인가?"

  묻고 있는 도엽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살기가 무서운 기세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혜광선사는 비로소 눈을 떴다.

  그는 도엽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마성이 골수까지  스며들었으니 교화(敎化)의 가

  능성이 천만 중의 하나도 없는 마인(魔人)이로다......."

  혜광선사의 말에 도엽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마인이라고? 으하하하......!"

  허나 그는 곧 광소를 그쳤다.

  "나 도엽이 두려워하는 것은 천하를 통틀어 아무 것도 없다. 불존

  인지 뭔지 하는 놈이 내 앞에 현신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

  람이 나 도엽이다."

  그 말에 혜광선사의 허연 눈썹이 꿈틀 곤두섰다.

  "소림은 불문의 성지, 그곳을  피로 물들이고 불존을 모독하는 그

  대...... 죽어 마땅히 지옥에 빠지리라. 아미타불......."

  "흐흐...... 그렇다면  나의 손자를  죽인 네놈들은  극락으로 가

  고?"

  "그는 죽어 마땅한 인물......!"

  순간 도엽의 눈에서 시뻘건 혈광이 불벼락처럼 쏟아져 나왔다.

  "파렴치한 잡승놈! 아득한 옛날부터 네놈들은 수없이 많은 살인을

  자행하면서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명목으로 그짓들을 정당화

  시켰다."

  "......."

  "동기야 어찌되었 건 살인은  모두 살인이다. 또한 살인을 했으면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도엽은 방천화극을 치켜들며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소림을 멸하고 소림에 관계된 모든 자들을 죽임으로써 이 혈겁은

  종식된다."

  "아미타불......."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의 손자......  그 아이의 시신은 어디 있

  느냐?"

  혜광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엽은 이를 뿌드득 갈며 왼손에 들려 있는 뼈다귀를 거세게 움켜

  쥐었다.

  우두둑......!

  뼈는 가루처럼 으깨어져 밑으로 흘러내렸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

  "네놈 사부...... 자미성불의 뼈다."

  "......!"

  "조사동은 이미  박살났다. 달마 이래  소림역대 중놈들의 무덤은

  모조리 파헤쳐졌다."

  혜광선사의 전신에 폭풍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아미타불...... 천인공노할...... 짓이로다!"

  도엽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묻는다. 손자아이의 시신은 어디 있는가?"

  "......."

  "어디 있는가?"

  그러자 혜광선사는 애써 격동을 억누르며 침중하게 말했다.

  "시주는...... 그곳에 가면 죽는다."

  순간 도엽의 눈이 괴이하게 번쩍 빛났다.

  "그렇군! 어디인지 알았다. 흐흐흐...... 소림의 지하밀전(地下密

  殿)......  소림사   십팔관문(十八關門)이  있다는  달마동(達磨

  洞)...... 바로 그곳이군."

  "그렇다."

  "흐흐흐...... 좋다. 나 도엽이  그곳에 도전해 보지. 소림 천 년

  이래 단 세 명만이  돌파했다는 소림십팔관문...... 나 도엽이 모

  조리 박살내고 말겠다......!"

  "......!"

  "허나...... 그전에 먼저 네놈의 머리통부터 박살내야겠다!"

  콰우우― 우― 웅!

  곧장 방천화극이 엄청난 기세로 허공을 쪼겠다.

  거기에 맞서듯 혜광선사의 쌍장도 벼락치듯 앞으로 내뻗어졌다.

  "반야인(般若印)―!"

  콰쾅!

  범종이 깨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면서 '욱' 하는 답답한 신음과

  함께 혜광선사의 신형이 앉은 채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흐흐흐...... 그 따위로는 막지 못한다!"

  그 순간 음산한 괴소가 혜광선사의 머리 바로 위에서 터졌다.

  콰우우우웅!

  방천화극이 태산이라도 쪼개 버릴 듯한 기세로 혜광선사를 찍어갔

  다.

  죽음을 직감한 혜광선사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피할 수 없다!'

  '아아...... 설마하니 혈궁천주의 무공이 이렇게까지 극강할 줄이

  야.......'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천주님! 그의 죽음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순간 얼음장같은 음성이 문쪽에서 빠르게 터져 나왔다.

  찰나, 방천화극이  혜광선사의 머리 위에서 한  치 정도의 사이를

  두고 정지했다.

  "사랑(邪狼)인가?"

  "그렇습니다."

  스스슷!

  대답과 함께 귀검사랑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섰다.

  도엽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원한이 있느냐?"

  귀검사랑은 소름끼치도록 싸늘한  눈빛을 쏟아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구대천지한 입니다."

  "음!"

  도엽은 방천화극을 거두어들이며 선뜻 물러섰다.

  귀검사랑은 혜광선사의 얼굴에 칼날같은 시선을 꽂았다.

  "혜광, 하무검(河無劍)을 기억하는가?"

  "하무검!"

  혜광선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시...... 시주는?"

  귀검사랑은 냉혹한 미소를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삼십오 년 전...... 하무검 그 분은...... 자미성불에 의해 소림

  에서 축출...... 양 손, 양 발의 근육이 잘린 채...... 눈보라 속

  을 헤매다가...... 가장 비참하게 죽어갔다."

  "그는...... 소림의 반도......."

  "나의 부친이시기도 하지."

  일순 혜광선사의 안면이 부르르 경련했다.

  "그...... 그랬는가?"

  "나, 귀검사랑...... 그 분의  시신 옆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

  했다.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 반드시 소림을 잿더미로 만들겠노라

  고......."

  귀검사랑은 옆구리의 묵검을 천천히 집어가며 냉막하게 말했다.

  "지옥사검, 단 일 초로...... 죽여주마."

  "지옥사검! 시...... 시주가...... 어찌 그 검법을......?"

  귀검사랑은 경악하는 혜광선사의  얼굴을 싸늘하게 응시하며 음산

  하게 냉소했다.

  "크흐...... 지옥도 삼십 년 수련의 정화다, 혜광!"

  말이 끝나는 순간,

  번― 쩍!

  한 줄기 묵광이 귀검사랑의 옆구리에서 폭사되었다.

  "으음!"

  묵직한 신음과  함께 혜광선사의 왼쪽  가슴에서 자욱한 피보라가

  일었다.

  묵검이 심장 깊숙이 쑤셔박힌 것이었다.

  지독하게 빠른 쾌검 일 초였다.

  "지... 지옥멸혼(地獄滅魂)... 지옥십사검(地獄十四劍)의 최후...

  초식......."

  "선친의 원한...... 소림의 멸문으로 끝난다."

  귀검사랑은 냉막무심하게 말하며 혜광선사의 가슴에 박힌 검을 서

  서히 뽑아갔다.

  순간 검붉은 핏물이 검을 따라 밖으로 흘러 나왔다.

  혜광은 흐려지는 눈을 들어 귀검사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문득 그의 눈에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허나 도엽은 귀검사랑의 등이 앞을 가리고 있어 그것을 보지 못했

  다.

  이때 돌연 혜광선사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한 줄기 전음이 귀검사

  랑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훌륭했다...... 혜인.......)

  이게 무슨 말인가? 혜인! 혜인이라니!

  허나 그 말을 듣고 있는 귀검사랑의 표정은 지극히 무심할 뿐이었

  다.

  전음은 다시 빠르게 이어졌다.

  (오늘을 위해...... 소림 일천 제자와...... 자미성불 사부......

  네 부친 하무검...... 모두가 희생됐다.......)

  "......."

  (부디......  구천십지...... 만마전을......  그리고...... 잊지

  마라...... 수미타여래신공을.......)

  전음은 거기에서 끝났다.

  다음 순간 혜광선사는 흰  눈썹을 치켜뜨며 치떨리는 음성을 토해

  냈다.

  "귀검사랑! 그대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

  귀검사랑은 차갑게 웃었다.

  "내 죽어 지옥의  불꽃에 전신을 태울지라도...... 두려워하지 않

  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묵검을 사정없이 그어내렸다.

  팍!

  혜광선사의 정수리가  정확하게 두 쪽으로  쪼개지며 피가 솟구쳤

  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도엽의 입에서  만족스런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와하하하핫...... 훌륭하다, 사랑! 멋진 지옥사검이었다!"

  귀검사랑은 그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달마봉이다. 와하하하핫......!"

  도엽은 거듭 광소를 터뜨리더니 번쩍 밖으로 사라졌다.

  귀검사랑 역시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놓았다.

  그러나 몇 걸음이나 갔을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혜광선사의 시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림을 일으키더니 검(劍)을 잡은 손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올 만큼 거센 힘이 가해졌다.

  귀검사랑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악다문 이빨 사이로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한 마디.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누가 지옥에  들어가

  랴......!"

  석실 안엔 석상같은 모습의 한 노인이 정좌해 있었다.

  무릎 위에는 녹슨 고검(古劍),  왼쪽 무릎 앞에는 제법 커다란 목

  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노인은 바로 혜광선사가  염노시주라 부르던 바로 그 괴노인이

  었다.

  괴괴한 침묵이 시간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꽈꽝!

  "크하하하하하......!"

  석문이 순식간에 박살나면서 천둥같은  광소와 함께 한 인영이 유

  유히 들어섰다.

  방천화극을 움켜쥔 혈궁천주 도엽이었다.

  그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거렸으나 얼굴은 한껏 득의로 충

  만해 있었다.

  그러다 굳은 듯 정좌해 있는 괴노인의 존재를 발견한 도엽은 돌연

  광소를 그쳤다.

  "너는 누구냐? 소림의 잡승은 아닌 것 같은데......."

  괴노인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뜨며 입술을 떼었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엽......."

  도엽의 얼굴에 의아롭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나를?"

  "그렇다."

  "흐흐흐...... 그러고 보니  너는 나 도엽이 달마동 십팔관문에서

  죽기를 기다린 모양이구나. 허나......  나는 단 반 시진 만에 그

  관문들을 모조리 통과해 버렸다."

  괴노인은 조용히 말했다.

  "손자의 유체를 찾으러 왔나 보군."

  "그렇다. 어디 있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괴노인의 무릎 앞에 있던 목갑이 도

  엽의 면전으로 날아왔다.

  흠칫 놀란 도엽은 날아오는 목갑을 받아 서슴없이 뚜껑을 열었다.

  "......."

  순간 도엽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수급(首級)!

  목갑 속에는 눈을  까뒤집고 혀를 쑥 빼물고  있는 머리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구...... 궁아......."

  도엽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목갑 안의 수급은 바로 그의 손자 도위궁이었던 것이다.

  "우우...... 우......!"

  도엽은 괴이한 신음을 토하며 전신을 경련하더니 이윽고 괴노인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누구의 짓이냐? 네놈이냐?"

  괴노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바로 내가 그랬다."

  "우아― 아!"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도엽의 신형이 폭발하듯 퉁겨 나갔다.

  동시에 방천화극이 하늘이라도 허물어뜨릴 듯 광포하게 공간을 갈

  랐다.

  콰우우우― 우― 웅―!

  그와 동시에 괴노인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도엽을 향해 폭사

  되었다.

  때를 같이 해서.......

  번― 쩍!

  창백한 빛줄기 하나가 불가사의한 속도로 전방을 쏘아갔다.

  힘(力)과 빛(光), 그 만남은 지극히 짧았다.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방천화극은 괴노인의 앞가슴을 꿰뚫고  등 뒤로 그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허나, 언제 뽑아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고검의 끝 또한 도엽의 심

  장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진홍의 핏물이 두 사람의 배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엽의 얼굴은 이 순간 온통 불신과 경악으로 뒤덮여 있었다.

  "네...... 네 검초는......  분명...... 지옥십사검...... 최후초

  식...... 지옥...... 멸혼......."

  "잘 보았다......."

  "어......  어찌...... 이런  일이......  그것은...... 귀검사랑

  이......."

  괴노인의 창백한 얼굴에 경멸의 조소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도엽......  너는   모를  것이다......   죽어서도......  영원

  히......."

  "이...... 이건...... 말도...... 안돼...... 나 도엽이...... 죽

  는다니 그것도...... 지옥...... 사검에......."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은 상대의 병기를 자신의 몸 속에 꽂은 채

  양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혈궁천이...... 혈...... 궁...... 천이......!"

  쿵!

  거마(巨魔). 도엽의 죽음이었다.

  그토록 당당했던 혈궁천주. 구천마제 중 한 명이 사라지는 순간이

  었다.

  쿵!

  괴노인도 쓰러졌다.

  "나, 염검제...... 할 일은...... 다 했다......."

  염검제!

  아아...... 이 괴노인이 바로 염검제인 것이었다.

  염검제는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달마동......   이제......  무너져라......   모든......  비밀

  을...... 삼키고......."

  그 말을 끝으로...... 염검제도 죽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소실봉 지하 깊숙한 곳에서 경천둥지할 대폭발

  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소리를 밖에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명(黎明).

  또 한 번의 아침이 동천(東天) 저편으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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