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58장 제삼(第三)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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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 두두― 두―!
우두두― 둑―!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석양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하늘을 자욱이 뒤덮어 오는 버섯구름, 그 흑구름 속을 뚫고 질풍
같이 달려오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마대였다.
황토바람을 휘감은 채 찢어질 듯 나부끼는 무수한 깃발.......
일련의 기마대는 서천목산을 벗어나 하남성 쪽으로 무섭게 질주하
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구천십지만마전의 고수들이었다.
이들의 기세는 너무나 당당하여 주위의 험준한 산악과 광활한 황
야까지 이들을 향해 일제히 경배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지
경이었다.
허나, 이들의 신분을 알면 과장이 아님을 느낄 것이니.......
혈궁천주 도엽을 비롯한 혈궁천 휘하의 일천이백 명(一千二百名)!
여기에는 초절정고수 구십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귀검사랑과 일백 인(一百人)의 사랑대(邪狼隊)!
혈궁천의 서열 삼 위(三位)인 마력천궁(魔力天弓) 당우(唐羽)!
서열 사 위(四位)의 천검미랑(千劍美郞) 환철령(幻鐵靈)!
군마천의 소천주.
바로 혁련소천을 위시해서 그 휘하의 고수 팔백 명!
생사천의 천주.
만후천리!
그 휘하의 구백 명!
이른바, 구천(九天) 중 삼천(三天)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는 것
이다.
두두두두― 두― 두―!
두두두― 둑―!
대지(大地)를 두드리는 급촉하고 힘찬 말발굽 소리.......
그 기세는 정녕 하늘도 무너뜨릴 듯 위세로웠다.
기마행렬의 맨 앞의 혈궁천주 도엽은 전면을 노려보며 불같이 이
글거리는 안광을 토해내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단숨에 삼켜 버릴 듯한 기세였
다.
문득 짓눌린 바위같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당우―!"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뒤에서 한 필의 흑마가 앞으로 나왔다.
마상의 인물은 흡사 철탑(鐵塔)을 연상케 하는 십 척 거구의 흑포
거한이었다.
구릿빛의 강인해 보이는 피부, 얼굴을 뒤덮다시피한 구레나룻 수
염, 그리고 등 뒤에는 장정의 팔뚝 굵기만한 큰 흑궁(黑弓)을 비
스듬히 메고 있었다.
일견키에도 범상치 않은 위력의 강궁(强弓)이 분명했다.
일명(一名), 마궁사천리(魔弓射千里)!
마궁(魔弓)은 천 리(千里)를 쏜다!
한 번 쏘면 열 명의 장한도 산적 꿰듯 꿰뚫리고 만다는 공포의 신
궁(神弓)인 것이다.
혈궁천주 도엽은 전면으로 시선을 박은 채 내뱉았다.
"하남성으로 가는 길에 걸리는 것은 무조건 치워라!"
치워라―!
이 한 마디는 그 어떤 말보다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모든 성(城)과 현의 수령들에게 알려 행인들도 모조리 통제시킨
다!"
십 척 거한 당우는 허리를 꺾었다.
"존명을 받들겠습니다!"
두두두― 둑―!
황혼의 검붉은 불길은 서천(西天)을 태우고 불벼락처럼 대지를 향
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진동될 황혼이었다.
혈궁천주 도엽은 짓붉은 석양에 시선을 박은 채 한 차례 얼굴근육
을 씰룩였다.
"기마의 속도를 더 빨리하라! 사흘 후 소림을 제명시키리라!"
― 소림을 제명시키리라!
너무나 엄청난 말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렇듯 엄청난 말을 너무나 태연히 하고 있었다.
허나.......
두두두― 두두―!
수천 기(驥)의 준마들은 무심하게 달릴 뿐이었다.
휘우우― 웅―!
바람(風)이 분다.
희뿌연 모래바람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거세게 몰아치고 있
다.
대막의 모랫바람이었다.
그때 열 개의 검은 점들이 망망한 모래사막 저끝에 나타났다.
점들은 사풍(沙風)에 휘감겨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십 인(十人)으로서 모두 훌륭한 오추마를 타고 있었는데 뜨겁고
사나운 사풍 속에 늠연히 질러오는 그들의 기도는 실로 범상치가
않았다.
맨 중앙의 인물은 준수한 용모의 금의청년이었다.
등 뒤에는 두 개의 장창을 비껴차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핏빛깃발
이 하나씩 매달려 있으니.......
금마혈번 소사 바로 그였다.
그의 옆에 묵묵히 달려가고 있는 인물은 호목천군 사위릉이었다.
휘우우― 웅웅―!
휘류류― 류― 류― 류―!
모랫바람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칼과 옷자락은 찢어질 듯 나부꼈다.
누런 모래먼지가 말발굽에 그림자처럼 휘감기고 있었다.
문득 금발혈번 소사가 말없이 손을 쳐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하여 열 필의 오추마는 일제히 멈춰 섰다.
금마혈번 소사는 곧 오른손을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
"다오......."
그러자 호목천군 사위릉은 한 개의 상자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금마혈번 소사는 말없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상자 속에 든 하얀 뼈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삭을 대로 삭아 거의 가루가 되어 있었다.
금마혈번 소사는 엄중한 눈빛으로 허연 골분(骨粉)을 묵묵히 내려
다 보았다.
"연파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잠겨드는 듯한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사위릉은 그의 등을 응시하며 무겁게 말했다.
"철당협 근처였소."
"철당협......."
소사는 음울한 눈을 들어 희뿌연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대장문의 계획에는 조금의 차질도 없었다. 단지...... 연파를 죽
인 놈의 무공이 너무 뛰어났을 뿐이다."
"......!"
"놈은 검을 썼다. 검의 넓이는...... 한 치 반, 두께는 반 푼!"
"......!"
"종잇장처럼 얇은 연검이다!"
사위릉은 암울하게 젖은 눈으로 묵묵히 소사의 뒷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금마혈번 소사는 상자 속의 뼛가루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투...... 툭!
힘줄이 퉁겨나는 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손을 통해 표출되고 있었다.
휘우우― 웅―!
휘우우웅―!
뼛가루는 먼지바람에 뒤섞여 허공을 날았다.
"편히 잠들어라, 연파......."
소사는 뼛가루를 계속해서 허공에 뿌렸다.
바위를 깎은 듯한 입술은 느릿느릿 비감한 음성을 계속해서 흘려
내고 있었다.
"맹세한다. 나, 소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너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만들지 않으리라!"
문득 그의 눈은 광활한 사막의 지평선에 박힌 채 뜨거운 불꽃을
퉁겨냈다.
"모두 들어라! 이곳 모래바다 금사해(金沙海)는 과거 칠백 년 전
대막의 영광이 자리했던 곳이다!"
대막의 영광!
이 말이 토해지는 순간 모래바람은 더욱 더 기승을 부렸다.
이들 십 인의 눈도 불타올랐다.
"우리의 조상들이 대초원을 질타하고 사막을 종횡무진으로 누비
던...... 우리의 영광이 숨쉬던 곳이다!"
소사의 음성은 점점 불을 토해낼 듯 격앙되었다.
"알아야 한다! 그리고 느껴야 한다! 우리 대막의 영광을...... 반
드시 다시 되찾아야 한다!"
그는 거듭 말했다.
대막의 영광을......!
휘우웅웅― 웅―!
휘류류― 류류― 류―!
뼛가루가 날리고...... 모래폭풍은 이들 십 인의 모습을 삼켰다
다시 토해내기를 거듭했다.
그 속을 뚫고 소사의 음성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수없이 스러지신 조상들의 영령이 이곳에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
연파...... 우리의 형제들 중 한 명인 연파도 이 뜨거운 모래 속
에서 숨쉬고 있다......."
열 필의 오추마는 다시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수리에는 작렬하는 폭염, 발밑에는 불씨처럼 달구어진 모래
알.......
이것이 그들의 조상이,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대막의 전부였다.
"모두...... 모두 기억하라! 우리는 해내야 한다! 새북사사
천...... 대막의 영광은 반드시 돌아온다......!"
금마혈번 소사는 마지막 한 줌의 골분을 움켜쥐었다.
'연파......!'
돌연 그의 우묵한 두 눈이 뿌우연 물안개에 젖어 올랐다.
그것은 뜻밖에도 붉은 피눈물이다.
'맹세한다...... 대막의 영광을...... 반드시 네게 안겨주겠
다......!'
대막의 영광이여! 다시 한 번......!
그저 우연히 나온 말이라 할 텐가?
휘우우― 웅웅―!
후후― 웅― 웅웅―!
모래바람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황폐하기 짝이 없는 고봉(高峯)이었다.
거무튀튀한 바위와 붉은 황토뿐, 생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아무것
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봉의 한가운데는 음푹하고 넓은 분지가 있었다.
과거에는 호수였던 듯했으나 지금은 완전히 말라붙어 거북이 등처
럼 쩍쩍 갈라져 있는 모습이었다.
주위에는 말라죽은 시커먼 고사목(枯死木)들이 악마의 이빨처럼
삐죽삐죽 둘러서 있었다.
음산한 회색빛 풍경.......
늦가을의 건조하고 삭막한 바람은 메마른 고사목 사이를 지날 때
마다 두려운 비명을 질렀다.
휘이이이― 이― 이― 잉―!
휘우우― 웅웅― 웅―!
"쿨룩..... 쿨룩......!"
이때 심한 기침 소리와 함께 이 고봉 위로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
다.
계피학발의 청포노인이었다.
백발은 갈대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마른 얼굴의 안색은 매우 창백
했다.
노인은 몹시 피폐한 모습으로 비틀거렸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귀여운 소동들이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두 소동은 각기 흑의(黑衣)와 백의(白衣)를 입은 칠팔 세 가량의
소년들이었다.
단정한 오관에 총기로 반짝이는 눈, 발그레한 홍안에는 첫 눈에도
맑은 영기가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청심호(靑心湖)...... 다시 왔다. 나, 천학풍(天鶴風)이......
십 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노인의 눈은 말라붙은 호수를 향해 깊은 감회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오...... 청심호를 기억하는가?
언젠가 전진도문의 이 인(二人)이 훌쩍 나타났다가 떠나갔던 바로
그곳......
그렇다! 여기가 바로 그 청심호였다.
격동과 감회가 노인의 노안 가득히 파문치듯 일렁였다.
"야망...... 한낱 야망 때문에...... 모두가 흩어지고 말았다. 나
의 두 사제여...... 너희들은 무엇을 그리도 원하였더냐?"
천학풍의 입술은 가늘게 떨리며 신음같은 독백을 계속 흘러내었
다.
"전진의 영화였더냐......? 아니면 진정한 마종의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었더냐...?"
두 소동은 노인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서 약간 불안한 눈으로 노
인의 격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우우― 웅웅―!
바람은 왜 이리도 사납게 불어대는 것인지.......
천학풍의 야윈 체구는 바람에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허나, 푹 꺼진 두 동공 속에서 타오르는 회한과 은은한 위엄은 결
코 바람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신(神)과 마(魔)...... 도(道)의 최고봉...... 전진! 오오......
부끄럽도다! 화엽풍조사의 뜻이 진정 부끄럽도다!"
천학풍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혹독한 기침을 해댔다.
"쿨룩...... 쿨룩......!"
"사부님......."
"아...... 사부님......!"
두 소동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부축하려 들었다.
그 순간 천학풍의 기침은 딱 멎었다.
창백한 노안에 구슬같은 땀방울이 맺혀져 있었지만 표정엔 언제
고통으로 일그러졌더냐 싶게 엄숙하게 굳어져 있었다.
"흑아(黑兒), 백아(白兒)......."
두 소년은 주춤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예, 사부님......."
"이 사부는...... 백 년 전 두 사제와 함께 전진의 진정한 뜻을
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
"허나, 허나......."
천학풍은 머리를 흔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하늘처럼 푸르던 우리의 뜻은...... 저 말라 버린 청심호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밀렸던 회한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듯, 억눌렀던 감회가 한꺼번
에 가슴 속으로 뭉쳐오르는 듯.......
그의 입에선 늦가을 바람보다 더 허허로운 웃음이 흘러 나왔다.
"내가 살아온 백육십 년의 세월...... 모두가 허망하도다. 허허
허......."
일순 그의 두 눈에서 무서운 두 줄기 섬광이 솟구쳐 올랐다.
"허나...... 나 천학풍은 죽기 전에 반드시 알리리라! 전진의 진
정한 의도...... 천 년을 도도히 이어온 전진의 진정한 뜻이 무엇
인지 전할 것이다!"
"나의 두 사제들이여......! 이 사형은 쿨룩...... 신(神)의 최고
봉으로 마와 도의 최고봉인 그대들을 누를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로 비로소 확실해졌다.
천학풍, 그는 언젠가 나타났던 전진도문 이 인(二人)의 대사형인
것이다.
불현듯 천학풍의 두 눈빛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너희들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너희들의 의도가 얼마나 어리
석은 것인지...... 보여주리라...... 쿨룩......!"
천학풍은 허리를 굽히고 또 한 차례 심한 기침을 해댔다.
순간 선렬한 핏방울이 수염을 물들이며 바람에 쓸려 나갔다.
두 소동은 몹시 안타까웠으나 이 순간 사부를 위해 아무런 방법도
취할 수 없는 자신들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흑아, 백아......."
두 소동은 황급히 대답했다.
"예, 사부님......."
천학풍은 담담히 말했다.
"하늘을 보아라!"
그 말에 두 소동은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천학풍의 음성이 그들의 작은 가슴으로 가을바람처럼 스미고 있었
다.
"저 하늘의 푸른 뜻이 너희들의 가슴에 전해지는 날...... 청심호
에는 다시 물이 찬다!"
두 소동의 몸이 기이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힘찬 심장의 박동이었다.
"가자, 만마전으로....... 단우비, 그가 진정한 마도의 주인이라
면 내 그를 도와 전진의 맥을 떨치리...... 라"
천학풍은 등을 돌렸다.
"마종을 거두고...... 전진의 진정한 영화를 꽃피우리라!"
두 소동은 총명한 눈을 부딪치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허나...... 사제들이여...... 알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이 끝난
후...... 과연 그 무엇이 남는가를......."
탄식하던 천학풍은 두 소동의 양 손을 잡았다.
"가자!"
노소(老少)...... 그들은 이 황막한 고봉을 떠나기 시작했다.
문득 천학풍은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려 메말라 버린 청심호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청심호가 다시 푸르러지는 날...... 저 속에 안겨 영원한 탄식을
되찾고 싶다만...... 허허......."
끝내 그는 허망한 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휘우우― 웅웅―!
휘이이― 이― 잉―!
바람만 그의 빛바랜 청삼을 휘날릴 뿐이었다.
석실 안은 무거운 긴장감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석실중앙엔 흑오석으로 된 의자가 품자형으로 놓여 있었고 그 위
에 지금 세 사람이 묵묵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각기 백의(白衣)와 금의(金衣), 그리고 은의(銀衣)로 전신
을 감싸고 있었다.
비록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신비스러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백의인이 긴 침묵을 깨고 나직한 음성
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 년 만에 다시 보게 되는구나. 아우들......."
그것은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위엄을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죽부(竹符)를 꺼내라!"
백의인의 말이 이어지자 세 사람은 동시에 손을 중앙으로 내밀었
다.
탁!
가벼운 음향이 일더니 그들의 손에 의해 세 조각의 죽부가 정확하
게 맞물려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죽부는 그 중앙에서 하나의 글귀를
형성하고 있었다.
<군림(君臨).>
무엇을 뜻하는 글귀인가?
백의인은 문득 두 사람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반갑다, 아우들......!"
"......!"
"......!"
세 사람 사이에는 순간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교
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후, 그들의 신형이 느릿하게 제자리로 떨어졌다.
백의인은 두 사람을 둘러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삼 형제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일 년을 주기로 이렇게
만났다."
"......!"
"비록 한 핏줄이긴 하지만 서로의 얼굴도 모른다. 구태여 얼굴을
밝히지 않는 이유를 너희들은 잘 알 것이다."
은의인이 침착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형님!"
백의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약간 억양을 높였다.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우리는 난세에 태어났다. 이 난세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군림해야 한다. 그 누구 앞에서라도
군림해야 한다."
백의인의 음성은 점차적으로 나직하게 가라앉아 갔다.
"어쩌면...... 우리끼리도 부딪칠 수 있다. 얼굴을 알면...... 감
정이 드러나고, 감정이 드러나면 이성이 흐려진다."
"......."
"이성이 흐려지는 것...... 그것은 곧 모든 것의 몰락을 의미한
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현기를 담은 채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다른 두 사람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그들의 기도를 더할 수 없이 신비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
다.
백의인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늘은...... 우리 삼 형제에게 고아라는 신분 외엔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 허나 오직 하나...... 천하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머리를 주었다."
"......."
"이 머리를 이용해서...... 우리 삼 형제는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
를 수 있다."
이윽고 백의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두 사람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선 채 느릿한 음성으로 말을 이
었다.
"우리의 영원한 목표...... 그것은 바로 구천십지만마전의 붕괴
다."
― 구천십지만마전의 붕괴!
그것은 그야말로 가공할 자기 선언이었다.
백의인의 등 뒤에서 문득 칼날같은 기세가 회오리처럼 일어났다.
"십 년 이상을...... 우리는 오직 그 한 가지 일에만 전념했다."
"......!"
"앞으로 십 년이 다시 흘러야 한다...... 아니,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룬다. 구천십지만마전......
그 사도 최강의 단체를 반드시 붕괴하고 말것이다."
누구인가?
이 광오한 패기를 부드럽고도 나직한 음성 속에 검끝처럼 감추고
있는 이 인물은?
백의인은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새북사사천...... 그 움직임은 나의 계략으로 약간 둔화시켰다."
"최소한 오 년 이내에 새북사사천은 중원으로 넘어오지 못한다."
백의인은 음성에 조금 긴장감이 서렸다.
"잠마혈문의 문주는 완전히 신비에 가려져 있다. 그의 무공은 추
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그는 강한 뇌(雷)의 무공을 사용하는
데...... 그 정도가 결코 단우비 못지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의인은 다음 순간 전신에서 무서운 긴장감을 드러내며 침중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말을 경청하던 두 사람의 몸에서 최초로 미세한 변화가 일어
났다.
그들의 태도는 감히 그 무엇이 백의인을 저토록 긴장시킬 수 있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일종의 경악이었다.
백의인은 이내 무거운 음성을 흘려냈다.
"한 명의...... 인물이다."
"또 다른? 그가 누구입니까?"
"기억하라, 분명히 기억하라. 그는 장차 무림에서 단우비와 쌍벽
을 이룰 것이다."
백의인은 거듭 강조한 후 신음처럼 한 마디씩 내뱉았다.
"그는 바로 혁련소천이란 인물이다."
"혁련소천......."
두 사람의 면사가 미미하게 흔들리며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백의인은 묵직한 음색으로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난세의 영웅...... 우리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다."
"으흠......."
"허나......."
백의인은 문득 말꼬리를 흐리며 신비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문득 음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는 현재 내 수중에 있다. 바로 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
이다."
아아...... 이 사람 백의인!
무림의 경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어 보고 있는 무섭도록 예
리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혁련소천을 수중에 두고 있다는 이 신비
의 인물!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석실 속의 밀담(密談)!
이것이 바로 제 삼(第三)의 움직임이었다.
혈궁천.
군마천.
생사천.
그들이 이끄는 삼천의 고수들은 서천목산을 떠나 소림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하(山河)를 짓밟고, 준령(峻嶺)을 부수며 그들은 호호탕탕 소림
으로 이동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少林)으로―!
구천십지만마전의 세 개의 하늘(三天),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풍전등화의 대소림사......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소림을 도와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소림을 돕는다는 것, 그것은 곧 자파(自派)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앞에 몸을 던질 미련한 인물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지나는 곳을 피하기에만 급급할 뿐.......
어디 그 뿐인가?
각 성(城)의 성주들, 각 현(縣)의 현령들은 포고(布告)를 내려 행
인을 통제하는가 하면 길까지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사흘 후.......
삼천은 드디어 숭산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