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56장 소림(少林) 대풍운(大風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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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림사(大少林寺).
소림사 전역은 온통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허나 유독 한 곳만은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불심각(佛心閣).>
현 소림사의 장문인 혜광선사(慧光禪師)가 거처하는 방장실이 바
로 그곳이었다.
실내엔 타오르는 황촉불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인물이 대좌해 있었다.
인자한 기운이 전신에 서기처럼 흐르고 있는 황색가사의 노승(老
僧), 그가 바로 현 소림사 장문인 혜광선사였다.
그의 맞은편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결과 수염이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어 도무지 용모
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간간이 시퍼런 청광(靑光)을 두 눈에서 뿜어내는 것으로 보
아 예사 노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 노인의 무릎에는 한 자루의 녹슨 고검(古劍)이 반듯하게 놓
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앙금처럼 고여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혜광선사가 흰 수염을 꿈틀거리며 비장
한 음성을 발했다.
"염(苒)시주, 곧 있으면 겨울...... 올해도 얼마남지 않았소."
노인은 두 눈을 시퍼렇게 번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어 그는 음침한 괴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가만 생각해 보니 노부가 소림과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육십 년이 되었군."
괴노인은 황촉불을 응시하며 감회 어린 어조로 말했다.
"육십 년 전...... 만마전에 대항하다가 단우비에게 처참한 패배
를 당했을 때 자미성불이 아니었다면 노부는 지금쯤 고봉의 시신
이 되어 한 줌의 흙으로 변했을 텐데......."
혜광선사는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며 침통하게 말했다.
"염노시주, 소림은 그 옛날 죽은 뒤 아직도 살아나지 못했소."
괴노인은 그를 힐끗 응시했다.
계속해서 혜광선사는 말했다.
"지금의 소림은 단지 껍질만 남아 있을 뿐 모든 것이 죽어 있소.
과거의 소림이 아니오. 소실봉의 모든 것...... 모든 제자들이 죽
어 있소."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괴노인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진중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끝내 그 계획을 실행할 셈인가?"
혜광선사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곧 시작할 생각이오."
"음......."
"노납은 잊지 않고 있소."
혜광선사는 천천히 눈을 뜨며 비감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나의 막내사제 혜인......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소.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으로 들어가겠느냐고......."
"......!"
"그리고 그는 지금 수많은 사람의 지탄과 원망을 받으며 지옥속을
방황하고 있소."
그의 눈끝에 문득 촉촉한 물기가 번져 나왔다.
혜광선사는 두 손을 경건하게 가슴 앞에 모았다.
"아미타불...... 사제인 혜인의 의지가 그러하거늘...... 사형된
노납이 어찌 생명을 두려워하리오!"
"......!"
"혜인과 일백 인의 제자들이 있는 한 소림은 다시 중흥될 것이오.
아미타불......."
혜광선사의 담담한 음성 속에는 굽힐 수 없는 강렬한 의지가 용광
로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잠시 혜광선사를 응시하던 괴노인이 이윽고 묵직한 한 마디를 흘
러내었다.
"혜광!"
"......!"
"혈궁천주의 이름이 도엽이라 했는가?"
"......!"
"놈을 달마동에 넣어다오. 내 한 목숨을 걸고...... 그 놈을 죽여
주겠다!"
여기는......
대소림사의 방장실 불심각이었다.
충격!
일찍이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충격이 전 중원을 뿌리째 뒤흔들
었다.
화화공자 도위궁(花花公子 陶偉弓).
그는 십삼 인(十三人)의 고수와 함께 소림사 감시를 위해 구천십
지만마전에서 파견된 인물이었다.
헌데, 이 자가 느닷없이 엉뚱한 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설매선자(雪梅仙自) 한유경(韓裕卿).
당금 소림장문인 혜광선사의 사제이며, 소림의 속가제일인(俗家第
一人)으로 손꼽히던 칠절수사(七絶秀士) 한빈(韓彬)의 딸을 겁탈
해 버린 것이다.
한빈은 분기탱천하여 도위궁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허나, 한빈에게 돌아간 것은 머리통이 으스러지는 처참한 죽음뿐
이었다.
소림장문 혜광선사는 크게 분노했다.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 죽이리라!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을 발동하라!
그 결과, 도위궁과 십삼 인의 고수는 소림 최대의 진살절기 속에
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 무림을 향해 혜광선사는
이러한 폭탄선언을 터뜨린 것이었다.
― 구천십지만마전은 소림에 사죄하라!
― 만마전 제일신마는 소림의 전 제자 앞에 직접 무릎 꿇고 사죄하라!
하늘과 땅이...... 그리고 전 무림이 숨을 죽였다.
그 엄청난 선언이 몰고 온 피의 대폭풍은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미쳤다! 혜광선사는 제정신이 아니다!
항간에는 그런 말까지 나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혜광선사의 선언이 사흘 째 되던 날, 만마전에서 단 한 마디의 명
령이 떨어졌다.
― 소림을 제명하라!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명령이 하달된 바로 그 날, 구천십지만마전 악양지부(岳陽支部)의
단주(壇主)인 경천마수(驚天魔手) 곡범승(谷凡承)이 휘하고수 팔
백 명을 거느리고 숭산으로 향했다.
대혈전(大血戰)!
개파 이래 최대의 결전이 소실봉 전역을 완전히 피로 물들였다.
구천십지만마전!
비록 일개 지부의 고수들이었으나 그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일천 년을 이어온 소림사의 잠재력 또한 무궁무진한 것이
었다.
대혈전은 삼 일 만에야 그 막을 내렸다.
그 결과, 경천마수 곡범승을 비롯한 팔백 명의 고수 중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완전몰살이었다.
천하는 소림의 승리를 축하하기에 앞서 더욱 큰 두려움에 휩싸였다.
곧이어 구천십지만마전의 보복조치가 곱절로 감행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일은 터졌다.
고요하던 십팔만 리 중원 천하에 드디어 엄청난 대폭풍의 막이 올라간 것이다.
대폭풍의 핵(核). 그 핵은 바로 소림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