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55장 운명(運命)의 두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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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
터질 듯 여물어 있는 이 가을,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붉은 단풍이
서천목산 전역을 불길처럼 뒤덮고 있었다.
한적한 소로(小路) 위로 늦가을의 아픔이 짙게 배인 엽단풍(葉丹
楓)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바삭!
소로 위에 떨어진 엽단풍은 이내 누군가의 발 밑에서 아픈 신음을
내지르며 산산이 으스러졌다.
발의 주인은 혁련소천, 바로 그였다.
바삭...... 바삭......!
혁련소천은 밟히는 낙엽소리를 음미라도 하는 듯이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만추의 절경을 감상이라도 하는 것인가?
허나 천하에 그 누가 그의 마음 속을 알 수 있으랴.
― 풍, 단옥교는 굉장히 고고해요.
제가 그녀와 친하다고는 하지만...... 그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의
문이에요.
― 못 해도 상관 없다. 안 된다면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
― 피이...... 당신이 운명 따위로 그만 둘 분인가요? 대체, 단옥
교는 만나서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 희산, 그것은 남자의 일이다.
너는 오직 나의 부탁대로만 해주면 되는 거야.
'희산...... 과연 그녀가 단옥교를 그곳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푸르디푸른 하늘엔 한 조각 새털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단옥교,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미소녀라고 들었다.
허나...... 너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구나!'
바삭......!
그의 발 밑에서 또 하나의 엽단풍이 잘게 부서졌다.
'허나...... 나, 혁련소천이 한 번 취하고자 마음먹은 먹이라면
절대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문득 싸늘한 미소 한 줄기가 그의 입언저리에 감돌았다.
― 소천, 네가 어떤 것을 노린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취하라.
그래서도 안 된다면 차라리 그것을 없애 버려라. 네가 얻지 못하
면 타인도 얻을 수 없게끔 하라!
환각처럼 태양검제 용천승의 모습이 눈 앞을 스쳐갔다.
'후후...... 옳은 말이오. 용노야.......'
혁련소천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
그 순간 돌연 혁련소천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빠르게 사라졌
다.
소로의 한쪽 끝에서 유유히 걸어오고 있는 한 인영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일신에 걸친 옷은 어둠보다 짙은 흑의(黑衣), 칠흑같은 머리칼은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점의 온기조차 느낄 수 없는 저 창백한 얼굴.
그는 귀검사랑이었다.
스스스......!
마치 물이 흐르듯 귀검사랑은 그렇게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일순 혁련소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혈궁천주 도엽(陶葉)의 오른팔...... 귀검사랑!'
그러했다.
귀검사랑은 구천십지만마전에서 혁련소천이 가장 주시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저 자는...... 오히려 혈궁천주 도엽보다 더 무서운 인물일지도
모른다......!'
혁련소천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
다.
'지옥마제의 지옥사검을 익혔고...... 악마의 후예로 일컬어지는
백 인(百人)의 사랑대(邪狼隊)를 거느린 자.......'
이것이 그가 알고 있는 귀검사랑의 전부였다.
혁련소천과 귀검사랑과의 거리는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십 장 가량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시선과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맞닿았다.
혁련소천의 눈빛은 그저 담담한 그대로였고, 귀검사랑의 눈빛은
심해(深海)인 양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일순, 귀검사랑의 고개가 약간 숙여졌다.
동시에 감정도 억양도 실려 있지 않은 무심한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만추의 서천목산은 매우 아름답군요, 소천주."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었다.
"뜻밖이군요. 사랑(邪狼)께 그런 낭만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이
다."
귀검사랑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피어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낭만이 아니외다. 내 눈에 하늘의 푸르름은 검(劍)의 한기(寒氣)
로, 산의 붉음은 인간의 피처럼 보일 뿐...... 낭만을 느낄 만큼
나의 심장은 뜨거운 편이 못 되오."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더니 문득 화제를 바꾸었다.
"듣자하니...... 사랑께선 얼마 전 천붕군도의 고수들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던데......."
귀검사랑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귀찮은 인생들 몇 명이 유명록(幽冥錄)에 기록되었을 뿐이지요."
웃는 것도 입술뿐이었다.
그외 다른 부분, 특히 두 눈빛은 그저 깊숙이 가라앉아 있어 단
한 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눈빛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하며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소천주, 이 귀검사랑이 어줍잖은 말 한 마디만 하리다."
"무슨......."
"너무 빨리 크지 마시오. 쇠도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꽃
(花)도 너무 아름다우면 꺾이는 법이오. 인생도 그와 같을 것이
오."
혁련소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귀검사랑은 천천히 혁련소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혁련소천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랑!"
"......!"
귀검사랑은 조용히 멈추어 섰다.
혁련소천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오?"
"스스로 생각해 보시오."
귀검사랑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대광사의 첫대면에서부터...... 소천주 당신은 너무 강했소."
"......!"
혁련소천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이제 보니...... 저 자는 진작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었구나!'
순간, 그의 뇌리에 또 한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혹시 저 자가 암중에 도사리고 있는 제 삼의 음모자?'
허나 그는 곧장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아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귀검사랑은 이미 저만큼 멀어져가고 있었다.
'귀검사랑...... 어쨌든 주의해야 할 자임에는 틀림없다......!'
팔락......!
한 잎의 엽단풍이 두 사람의 사이 소롯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어떤 예감이라도 하듯.......
사심마성 석북위, 자소천 서열 이 위(二位)의 고수인 그는 꽤 널
따란 공지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깨 위에는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사심마성 석북위는 두 귀를 괴이하게 번뜩이며 연신 사위를 두리
번거렸다.
그러더니 석북위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어째서 단옥교 소저가 적용희산과 함께 만마전을 떠났
단 말인가?"
자소천주 빙허잠으로부터 단옥교의 감시를 명령받은 석북위가 아
니겠는가!
석북위는 뒷짐을 지며 공지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단옥교 소저는 신체적 결함 때문에 만마전을 벗어난 적이 없거
늘......."
문득 그의 안색이 음침하게 변했다.
"설마 적용희산이 고의적으로......."
그의 두 눈에서 지독히 사이한 광망이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적용희산이 단옥교와 친분이 두터운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녀는 영호풍과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졌다.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문득 어깨 위의 고양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설묘(雪猫), 너의 후각으로 단옥교 소저의 뒤를 쫓아라!"
야옹...... 야...... 옹!
무섭게 흰빛을 번뜩이며 고양이가 허공을 갈랐다.
설묘(雪猫)!
천리 밖의 냄새도 추적하는 희대의 영물, 그것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석북위는 음침한 괴소를 흘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크흐흐...... 자소천주께서 한점 점 찍은 것은 결코 타인에게 양
보하지 않는다."
스스스......!
그의 신형은 연기처럼 흐려지며 사라졌다.
헌데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스슷! 땅 속에서 솟아나는 듯 돌연 한 인영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밀납같이 창백한 안색에 일신에는 그보다 더 흰 백의를 입은 괴노
인이었다.
"흐흐...... 사심마성 석북위, 네가 감히 대종사님의 일을 방해하
려고......."
그는 석북위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비릿한 조소를 떠올렸다.
"흐흐...... 나 환사유풍이 있는 한 그런 꿈을 꾸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오오, 환사유풍! 그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환사유풍은 허공을 향해 느긋이 입을 열었다.
"수라마영, 준비는 완벽하겠지?"
순간 어디선가 냉막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대형(大兄), 염려 마십시오. 설묘는 결코 단옥교를 추적하지 못
합니다!"
"확실하겠지?"
"후후...... 이 근처 산(山)에는 단옥교의 체향(體香)과 똑같은
냄새를 풍기는 들쥐가 수백 마리나 퍼져 있습니다!"
그 말에 환사유풍은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좋아...... 고양이라면 쥐를 쫓는 게 제격이지."
스르르르......!
말이 끝나면서 그의 신형은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다.
꽃(花),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리고...... 여인(女人).
이 불가분의 관계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여인은 누구나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한다.
연못가에 다소곳이 피어난 수선화(水仙花)처럼.......
화원 가운데 여왕(女王)처럼 자리한 부귀화 모란(牡丹)처
럼.......
그렇게 여인들은 누구나 꽃(花)이기를 갈망한다.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대부분의 여인들은 꽃을 좋아하게 마련이
었다.
단언컨대 그녀처럼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하에 다시 없으리라.
꽃이 있는 곳엔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꽃은 그녀의 삶(生),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 꽃처럼 아름다운 생을 누리는 그녀의 이름은 단옥교였다.
칼로 내리친 듯 가파른 절곡이었다.
석양(夕陽) 빛이 절정에 이른 광채를 토해내는 그 시각에 한 인영
이 절벽 아래를 서성이고 있었다.
아! 방금 하강한 천상(天上)의 옥녀(玉女)인가?
섬산유곡의 성(聖)스러운 정화(精華)를 받고 피어난 꽃의 화신(化
身)인가?
이제 갓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천하의 미(美)를 몽땅 집합시킨 듯한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녀였
다.
먼 능선처럼 고운 아미(蛾眉).
정성들여 만들어 붙인 듯 수려한 콧날, 꽃잎을 베어문 듯 붉고 윤
기 흐르는 입술.
특히 그녀의 크고 맑은 눈빛은 너무나도 청정(淸淨)했다.
그것은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순결한 눈빛인 것이다.
그녀가 꽃이라면 천하의 화중지화(花中之花)이리라.
그녀가 밤하늘의 별이라면 정녕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샛별일 것
이다.
도무지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지닌 인간이라고는 믿기 어렵지 않
은가!
그러했다.
더욱이 연남빛 궁장을 걸친 그녀의 전신에선 꿈결처럼 아련한 향
기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고고한 기품을 느끼게 하는 은은한 난향(蘭香)이었다.
그녀야말로 꽃을 생명처럼 아끼는 단옥교.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단옥교의 옥용은 지금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엔 기쁨에
넘친 생기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절벽의 한 곳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천하에 이런 꽃도 있던가?
절벽 위에 오색(五色)의 꽃잎을 지닌 한 송이 꽃이 활짝 만개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그리고 하얀 빛깔의 꽃잎.
오색영롱한 화려한 꽃이 석양에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
고 있었다.
단옥교는 지금 그 꽃을 넋을 잃도록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그녀는 한 차례 천색(天色)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
다.
"아이 참......! 희산언니는 왜 이리 늦는담."
또르르......!
옥방울 구르듯 청아한 음성!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적용희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기실, 단옥교는 오늘 아침 자신을 찾아온 적용희산을 따라 이곳까
지 온 것이었다.
적용희산은 이렇게 말했었다.
― 서천목산(西天目山)에 가면...... 어느 절벽 위에 매우 기이한
꽃이 피어 있어!
꽃을 보는 일인데 어찌 단옥교가 마다하겠는가?
더욱이 천하에도 드문 희귀한 꽃이라는 데야......!
때문에 그녀는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한 채 아무도 몰래 만마전을
빠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곳까지 와서 마침내 오색찬란한 기화(奇花)를 보고야 말
았다.
단옥교의 희열과 기쁨은 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꽃이야말로 희귀한 화초, 오향란(五香蘭)이 아
닌가!
책 속에서만 보아 온 그런 꽃이었던 것이다.
허나, 단옥교는 꽃이 핀 자리가 너무 높아 오향란을 손에 넣을 수
가 없었다.
단옥교와 적용희산은 모두 무공(武功)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적용희산은 무공을 아는 사람을 불러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오다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
어......."
단옥교는 적이 불안한 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너무도 늦는 적용희산이 은근히 염려되는 것이었다.
허나 그녀의 옥용엔 곧 기쁨에 들뜬 빛이 재차 환하게 피어 올랐
다.
"어쨌든...... 정말 놀랐어. 저런 귀한 오향란을 이런 곳에서 보
게 되다니......!"
단옥교의 시선은 눈이 부신 듯 다시 절벽 위의 오향란에 머물렀
다.
오향란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
다.
그런 중에도 시간은 자꾸 흐르고 석양은 더욱 더 짙어져갔다.
단옥교는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언니가 왜 이렇게 늦을까? 너무 늦으면...... 할아버지께 야단
맞을 텐데......."
단옥교는 만마전 제일신마의 손녀가 아닌가!
만일 그녀가 몰래 빠져 나간 것이 발각되면 심한 질책을 면치 못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단옥교의 입에선 부지중 한숨이 새어 나왔
다.
"호오...... 어쩌나......?"
바로 이때였다.
휘― 익!
돌연 절벽 위에서 한 인영이 쏜살같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
가!
"어머!"
단옥교는 너무도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탁! 핑그르......!
그 인영은 두 발로 절벽을 차며 멋지게 공중회전을 했다.
동시에 한 손으로 오향란을 쑥! 뽑아 들며 바닥에 가볍게 내려섰
다.
이 모든 동작은 실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그것은 두 눈을 의심할 만큼 기쾌무비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단옥교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나타난 인영을 정면으로 응시한 순간 그녀는 그대로 숨을
탁 멈추고 말았다.
주홍빛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을 후광처럼 드리우고 선 그는 뜻밖에
도 준수미려(俊秀美麗)한 미청년이 아닌가!
신룡(神龍)...... 아니,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天神)인 양 눈부신
모습.
그는 일신에 눈(雪)처럼 깨끗한 백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 앞에 정중히 모은 한 손엔 접혀진 섭선(攝扇)이 쥐어
져 있었다.
흡사 천장(天匠)이 백 년을 두고 정성들여 세공한 듯한 천하제일
의 미청년, 특히 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청년!
천하에 이런 인물은 단 한 명밖엔 없다.
― 혁련소천!
그렇다!
바로 혁련소천 그인 것이다.
단옥교는 감탄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 서 있는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의 미소는 노을빛보다 더 아름다웠다. 아니, 차라리 현란하다
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아......!'
단옥교는 심장이 멎는 듯한 아찔한 기분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혁련소천이 미소를 머금은 채 정중히 입을 열었다.
"소저, 소생의 무례함을 용서하시오."
"......!"
"소저께서 이 꽃을 오래도록 바라보시기에 소생...... 속된 마음
에서 주제넘은 참견을 하였소. 소저를 놀라게 했다면 정중히 사과
드리오."
혁련소천은 은근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결코 속되지 않은 태도와 표정이었다.
단옥교의 심장은 소리내어 뛰기 시작했다.
'처음이야...... 이런 마음은.......'
이어 그녀는 두어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석양 탓일 거야.......'
허나, 그녀는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너무...... 신비해.......'
진정 그녀는 이런 미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누구든 혁련소천을 본다면 일시에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맞보고
야 말 것이다.
단옥교가 아무 말이 없자 혁련소천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소생은 군마천의 영호풍이라 하오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소저의
방명(芳名)을 듣고 싶소."
단옥교는 재차 한 가닥 경악을 떠올렸다.
'아...! 이 분이 바로... 군마천의 소천주이신... 영호공
자......?'
실로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이름이 아닌가?
'언젠가... 할아버님이 말씀하셨어......!'
그녀는 새삼 제일신마 단우비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 영호풍......! 그는 장차 군마천주가 될 것이며...... 그로 인
해 구천십지만마전은 대파란(大波瀾)을 맞을지도 모르느니라.......
― 그는 대호웅(大梟雄)으로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이상적인 형(形)의 인간이다.
― 영호풍...... 그의 눈(眼)을 보면 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결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단옥교는 혁련소천의 아름다운 눈빛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분같지 않아. 너무도 깨끗하고 맑은 저 눈
빛...저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결코 할아버지가 말한 그런 눈빛
이 아닌 걸......!'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 여인의 마음은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 훌륭한 분이 틀림없어......!'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를 그녀는 듣고 있었다.
십여 년간 곱게 닫아 걸었던 마음의 문(門)이 그렇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단옥교는 그 소리를 가슴 떨리는 흥분 속에서 듣고 있었다.
'아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걷잡을 수 없게 혁련소천에게 휩쓸려 버린 단옥교!
순진한 단옥교여......!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악마(惡魔)의 덫에 걸려 버린 천사같은 여인이여.......
혁련소천은 한 번 마음 먹으면 그 누구라도 손에 넣고야 마는 당
대 최고의 효웅.
그 마수(魔手)에 단옥교가 걸려들고 만 것이다.
이 만남은 약속된 계획 아래 실행된 음모의 조우(遭遇)!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이것이 장차 강호무림을 뒤흔들고 만마전을 일대 폭풍 속에 몰아
넣을 운명(運命)의 만남이었을 줄은.......
혁련소천과 단옥교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노을빛은 여인의 수줍음처럼 붉디붉게 익어가고.......
잠시 후 혁련소천은 빙긋 웃으며 수중의 오향란을 내밀었다.
"소저, 이 꽃을 아름다운 소저의 향명(香名)을 대신하여 바치겠
소......!"
그의 말에 단옥교의 옥용은 발그레 사과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오향란을 소중히 받아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 마워요......."
티없이 밝은 미소가 단옥교의 입가에 잔잔히 맺혔다.
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너무나 순수한 웃음이었다.
"......!"
혁련소천은 일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저 미소...... 저토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인이 있
었다니......!'
혁련소천이 여인을 보며 이토록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실로 처
음이었다.
그 순간, 그는 어떤 운명을 예감해야만 했다.
자신이 계획한 음모가 빗나가는 어떤 운명(運命)을......!
그는 이렇게 단옥교와 첫만남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