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52장 비(雨) 속에 피는 꽃(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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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 부슬......!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적용사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입니다만...... 소천주님을 죽음의 곤경 속으로 몰아넣고
혈왕소의 일에 개입된 자는 동일인인 듯합니다."
"아닐 수도 있지."
혁련소천은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문득 적용사문의 두 눈에 맑고 깨끗한 광채가 서기처럼 일렁였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가정(假定)은 해놓는 것이 유리합니다."
"음!"
"얼마 전......흑사신 가경이 철환 소남붕의 사인(死因)을 규명하
기 위해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찻잔을 내려놓는 혁련소천의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떠올랐다.
"자소천주를 이해할 수가 없군. 왜 하필이면 가경같은 석두에게
그런 일을 시켰는지......."
적용사문은 빙긋 웃었다.
"자양노군 빙허잠도 나름 대로 깊은 생각이 있었을 테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가정이란 해 놓을수록 유리한 것이니까......."
혁련소천의 말에 적용사문은 잠시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그러다 이내 그는 정색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천주님!"
"음?"
"단옥교를 반드시 취할 예정이십니까?"
"물론이지."
"자양노군 빙허잠도 그의 손자 빙우관(氷羽關)을 위해 단옥교를
노리는 있는 모양입니다."
혁련소천은 싱긋 웃었다.
"빠른 놈이 이기겠군."
적용사문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빙허잠보다 앞설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
"희산과 단옥교는 극히 친밀한 관계입니다."
"음?"
혁련소천의 눈에 이채가 솟았다.
동시에 그의 머리 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때 적용사문의 묵직한 음성이 그의 귓속을 울려 왔다.
"허나...... 희산을 울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깊은 뜻이 담긴 한 마디였다.
혁련소천은 생각을 중단한 채 물끄러미 적용사문을 쳐다보았다.
그는 단정한 가운데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시 후 혁련소천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문!"
"......?"
"한 가지 청이 있소."
적용사문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청이라 하시면......?"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 희산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소."
"......!"
― 아내로 맞이하고 싶소.
적용사문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확실한 약속이 어디 있으며, 그보
다 더 듣기 좋은 말이 또 무엇이랴?
"지...... 진정이십니까?"
"나는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오."
적용사문의 눈자위에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불쌍한 아이입니다. 모쪼록 평온한 정착을 기원드리겠습니다."
"나를 믿어주겠소?"
"하늘은 의심하되 소천주님만은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혁련소천은 밝게 미소하며 그의 양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고맙소, 처남!"
쏴아아― 아― 아―!
문 밖의 비는 이미 세찬 폭우로 변해 있었다.
쏴아아......!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이 늦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적용희산은 창가에 턱을 괴고 선 채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물끄
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로 비라는 것은 어느 사람에게나 우울한 것으로 느껴진다.
허나 적용희산에게 있어 오늘의 비는 하늘이 내리는 축복이며 사
랑이었다.
비뿐이랴?
그녀에게는 지금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황홀하
게 느껴지고 있었으니.......
이유는 간단했다.
그 동안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혁련소천이 이틀 전에 돌아온 것이다.
"정말...... 멋진 비야......."
무엇인들 멋지지 않겠는가?
"오늘 밤...... 들르신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더욱 멋진 비야.......
쉬지말고 자꾸자꾸 쏟아지렴아.......
무슨 생각을 했음인가?
그녀의 귀에 갑자기 가슴 뛰는 소리가 쿵쾅쿵쾅 요란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적용희산은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자신의 가슴을 가만히 눌렀다.
"아이 참...... 계집애도, 무슨 가슴이 이렇게 뛴담?"
그리곤 그녀는 창 밖을 응시하며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저 빗속에서...... 그 분의 품에 안겨 비를 맞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그맣게 웃었다.
"후훗......! 조금 춥기는 하겠지만...... 기분은 무척 좋을 거
야."
"흠...... 나도 그 생각을 해봤는데 희산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번 해보도록 하지."
그 순간 짓궂은 한 음성이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좋아...... 어멋!"
적용희산은 무심결에 대답하려다 말고 깜짝 놀라 돌아섰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는 혁련소천이 나타나 있었다.
"풍......!"
그녀의 얼굴 가득 반가움이 출렁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적용희산은 마치 도둑질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죄...... 죄송해요. 오신 것도 모르고 주책없이......."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다. 오히려 여인네의 방에 외인이 무례히 침입한 것 같아 내
가 미안하구나."
적용희산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
다.
"이곳은...... 풍, 당신을...... 외인으로 여기지 않는 곳이에
요."
이보다 더 짙은 사랑의 고백이 또 어디 있으랴?
혁련소천은 밝게 웃었다.
"그 부드러움이 내 가슴에 사랑으로 와닿는구나, 희산!"
다음 순간, 그는 적용희산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어머! 아이......."
두세 번 발버둥친 것은 수줍음 탓일 테고, 그녀는 곧 구름을 탄
듯한 황홀감을 느끼며 혁련소천의 가슴에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
다.
혁련소천은 그녀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 비를 맞고 싶다고 했지?"
그 말에 적용희산은 펄쩍 뛸 듯 놀랐다.
"어머! 안돼요."
"왜?"
"밖에는......."
"밖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또 무엇이냐?"
"그...... 그것이......."
거침없이 해대는 대답에 적용희산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비를 맞으면 추울 거예요. 그렇죠?"
궁리끝에 기껏 생각해낸 말이 그것이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었다.
"희산이 추워하면 나의 마음으로 불처럼 뜨겁게 해주마. 하얗게 재가 될 때까지...."
적용희산은 그 말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것은......."
"싫으냐?"
"......."
"후후...... 염려 마라. 처남에게도 오늘 밤 희산을 아내로 삼겠다고 말했으니까...."
적용희산의 눈이 커졌다.
혁련소천은 다정스럽게 미소하며 그녀를 안은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아.......'
"뜻대로 하세요."
적용희산은 이미 모든 것을 혁련소천에게 맡기고 있었다.
쏴쏴쏴......!
폭우는 뜰에 우뚝 선 두 남녀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기며 쏟아져 내렸다.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흠뻑 젖고 말았다.
그러나 적용희산은 조금도 춥지가 않았다.
뿐인가?
그녀는 비를 맞으면 맞을수록 점점 전신이 이상해지는 느낌이었
다.
'아아...... 내가 왜...... 내 몸이.......'
혁련소천의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관능(官能)이, 욕정(欲情)이, 참기 어려울 만큼 전신 구석구석에
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적용희산은 흐려지는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려 했다.
허나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은 그녀의 몸에 자꾸만 욕정을 심어주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야릇한 감흥에 젖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빗속에 핀 한송이 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밤비 속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애처롭다 할 텐가, 아니면 아름답다 할 텐가.......
이 모든 것은 자연이란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그 조화가 잘 되었을 때 바라는 것도 나타난다.
꽃과...... 밤비...... 그리고 미녀......
이 모든 것이 그에겐 그저 아름다울 뿐이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그녀를 잔디에 내려놓았다.
"희산......."
"......!"
"보고 싶다. 밤비 속에서 빛나는 네 몸을......."
적용희산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랑하는 정인(情人)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한다.
'......'
적용희산은 기쁜 마음으로 옷고름에 손을 가져갔다.
쏴쏴......!
폭우 속에서 빗물과 함께 천천히 옷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희뿌연 나신(裸身)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나신 위로 수많은 빗방울이 구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터질 듯 솟아오른 탐스런 젖가슴 위에도.......
희디흰 허벅지를 타고 그 아래까지도.......
나신을 바라보는 혁련소천의 눈이 점점 불그레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적용희산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아름답구나, 희산......."
적용희산은 눈을 감았다.
감을 수밖에 없는 것이 뺨을 감싸쥐었던 혁련소천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녀의 몸이 눈에 띄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는 것보다 좀더 확실하고 짜릿한 쾌감이 전신 혈맥을 타고
뜨겁게 용솟음치는 것이었다.
혁련소천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터질 듯한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
다.
"아...... 음......."
마침내 적용희산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뜨거운 숨결이 토해져 나왔다.
혁련소천의 뜨거운 손은 불씨를 담고 점점 밑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디를 어떻게 했는가?
그녀는 돌연 허물어지듯 혁련소천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혁련소천은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천천히 잔디 위로
쓰러져 갔다.
쏴쏴쏴쏴......!
폭우는 이제 그들의 몸 하나하나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이었던가?
"아......!"
적용희산의 숨이 멎으면서 두 손이 잔디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잔디를 움켜쥔 손에는 이내 힘이 빠져 나가고 비에 젖은
그녀의 흑발이 파도처럼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통이 지나가자 곧이어 참을 수 없는 기쁨이 깊은 곳에서 자라나
온몸으로 전율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으음......음......."
이제는 더욱 아파지기를 갈망하는 신음.......
쏴쏴쏴......
덩달아 폭우도 신을 내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한 여인이 비를 맞고 있었다.
어둠처럼 시리고 투명해 보이는 저 순백의 피부에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얼굴!
머리에 꽂힌 한 송이 단장화가 그 아름다움을 더욱 섬뜩하게 느끼
게끔 만들었다.
일점홍, 바로 그였다.
그는 지금 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고스란히 덮어쓰고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것은 예외없이 술병, 바닥에는 이미 대여섯 개의
술병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쏴쏴......!
억수같은 빗줄기는 자꾸 쏟아지는데 일점홍은 도무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만약 술병을 입에 간혹 가져가는 움직임마저 없었다면 그대로 굳
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독한 비로군."
이때 나직한 음성이 빗소리에 섞여 일점홍의 바로 옆에서 전해져 왔다.
허나 일점홍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후후후......이 비만큼이나 축축한 놈이군."
그제서야 비로소 일점홍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나타난 사람은 혁련소천이었다.
일점홍은 혁련소천을 똑바로 쳐다보며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비는 정다운 벗이오."
"너같은 놈에게나 친구이겠지."
혁련소천은 피식 웃으며 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듯 낚아챘다.
이어 그는 술병을 입 속에 쑤셔넣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일점홍의 미간이 약간 찌푸러졌다.
"그만...... 주시오."
혁련소천은 술병을 입에서 떼고 손등으로 입언저리를 쓰윽 문질렀다.
이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는...... 왜 화원에 숨어 있었느냐?"
일점홍은 흠칫했다.
"알고...... 있었소?"
"흐흐...... 남녀간의 정사(情事)를 훔쳐보는 것은 보는 사람에겐
즐거우나 당사자는 가히 유쾌한 것이 못 되지."
일점홍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 한 줄기가 떠올랐다.
"매우 아름다운 소녀더군요."
"적용희산이다."
"적용사문의 누이동생?"
"음."
일점홍은 피식 웃었다.
"아름답고 가련한 사슴 한 마리가 늑대에게 걸렸군."
그 말에 혁련소천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재미있는 표현이다."
일점홍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혁련소천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물었다.
"그녀를 사랑하시오?"
혁련소천은 웃음을 뚝 그쳤다.
"질투하느냐?"
"질...... 투? 풋......."
"웃지 마라."
"......."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너는 지금 극심한 질투를 느끼고 있는 거야."
일점홍은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지극히 염세적인 미소를 지으며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오."
"......."
혁련소천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화(妖花)!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저 사악하리 만큼 아름다운 얼굴.......
그것은 말 그대로 한 송이 요기(妖氣)로운 꽃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일점홍을 바라보는 혁련소천의 눈가에 기이한 미소가 엷게 감돌았다.
"너를 보노라면 나는 가끔 이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충동?"
"너를 범하고 싶은 충동이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학대하면서...... 기분 나쁠 정도로 아
름다운 네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변태인가?
혁련소천은 다시 술병을 입 속에 거꾸로 처박았다.
일점홍은 문득 희미하게 미소했다.
"억지로 참지는 마시오."
"킥!"
순간 혁련소천은 술병을 입에서 떼며 목덜미를 감싸쥐었다.
술이 목구멍에 걸린 것이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 배꼽을 움켜쥐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정녕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이로다. 으하하하하......!"
한동안 숨넘어갈 듯 웃어대던 그는 돌연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곤 기이하게 눈을 빛내며 일점홍을 또렷이 응시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나를 만나러 왔느냐?"
일점홍은 흠칫했다.
"그것도...... 알고 있었소?"
"후후...... 천하에 내 손바닥과 머리 속을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일점홍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과신은 저승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오."
"기분 나쁜 놈이 재수없는 소리만 하는군."
혁련소천이 빈정거리자 일점홍은 정색하고 말았다.
"당신을 죽이려는 자가 있소."
혁련소천은 피식 웃었다.
"미친 놈이군."
"오늘 밤 죽이려 할 것이오."
"후후...... 날짜는 괜찮게 잡았군, 마침 비도 오겠다......."
"그녀는 아주 무서운 고수요. 지금까지 강호의 절세고수 육십삼
명(六十三名)이 그녀의 손 아래 고혼이 되었소."
순간 혁련소천의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떠올랐다.
"여자란 말인가?"
"그렇소."
"직업살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혁련소천은 입꼬리를 묘하게 비틀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오늘 밤도 잠은 다 잤군."
"그녀의 이름은 음수궁(陰愁宮)이라 하오."
일순 혁련소천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의외롭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마정(魔井)의 주인?"
일점홍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이제 두렵소?"
혁련소천은 코끝을 괴이하게 씰룩였다.
"빌어먹을 놈...... 기껏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그 따위 재수없는
얘기뿐이라니...."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는 거요?"
"......."
"잘 가시오. 그리고...... 돌아가면 비에 젖은 몸은 잘 닦도록 하
시오. 자칫하면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까."
감기라니, 무공을 익힌 사람이 비 좀 맞았다고 그런 병에 걸릴 리
가 있겠는가?
그것은 뭔가 뼈가 있는 말이었다.
일점홍의 마지막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혁련소천은 그저 묵묵히
걸음을 떼놓고 있었다.
'일점홍...... 마정의 주인이 나를 찾아온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구나!'
비는 계속해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허나 묻지는 않겠다. 네가 가르쳐 줄 마음이 있었다면 묻기 전에
네 스스로 말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기는 조
심하도록 하지!'
쏴아아아......!
비(雨) 속, 한 사람은 어슬렁 멀어져 가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묵묵히 술병째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폭우는 금세 그칠 기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