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50장 혈왕(血王) - 그 신비(神秘)의 전설(傳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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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련소천은 여전히 사냥꾼 차림 그대로 서릉협을 벗어나고 있었
다. 허나 지금 그의 표정은 어딘지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혈왕의 문...... 그 신비의 이름을 이런 곳에서 듣게 될 줄이야.......'
― 혈왕의 문!
혁련소천이 그에 관한 말을 들은 것은 천기개천 사사무의 입을 통해서였다.
― 소천, 장차 무림에 출도하거든 되도록 언급을 회피해야 할 말
이 있다. 그것은 곧 혈왕의 문에 관한 이야기다.
― 구천십지만마전이 태동하기 훨씬 이전인 천이백 년 전, 무림에
는 혈왕궁(血王宮)이란 단체가 있었다.
― 혈왕궁의 궁주는 혈왕(血王) 나백(羅白)이란 인물로서 일신에
가공할 무학을 지닌 채 장장 백이십 년 동안이나 천하에 군림했
다. 당시 그는 중원뿐만 아니라 세외의 전 세력을 그의 발 아래
무릎 꿇게 했다.
― 허나 혈왕궁은 혈왕 나백 이래 뛰어난 후계자를 배출하지 못하
고 점차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혈왕 나백은 백이십 년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신을 수호하던 십대신군(十大神君)만
거느린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그가 사라진 곳이 바로 혈왕의 문이다.
'혈왕의 문에는.......'
혁련소천의 뇌리에는 사사무에게서 들었던 말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 그곳에는 현재 실전된 천이백 년 이전 시대의 중원절학(中原絶
學)과 새외무학을 비롯해서 온갖 영약(靈藥)과 천고영초(千古靈
草) 등이 비장되어 있다고 한다.
― 특히 중요한 것은 혈왕 나백이 남긴 혈왕경(血王經)과 십대신
군의 십대무경 및 고금 신기백병 중 서른여섯 가지의 신병이 그곳
에 있다는 사실이다.
― 나 사사무가 단언컨대...... 혈왕의 문을 여는 자, 능히 구천
십지제일신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무림인이 야망을 위해 그곳을 찾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기름종이에 싸인 물건을 품 속에서 꺼냈다.
'이것은 분명히 혈왕소, 혈왕의 문과 필시 어떤 연관이 있는 물건
이다!'
서서히 평범했던 그의 눈빛이 원상태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건천삼존은 봉황곡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혈왕의 문을 열기 위해
새북사사천에서 혈왕소를 찾아냈다!'
'그 사실을 안 암중의 제 삼자(第三者)는 건천삼존에게서 혈왕소
를 탈취할 계획을 꾸민 것이다!'
그는 문득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봉황곡과 신마루와의 관계는?'
'또...... 건천삼존이 봉황곡의 서열 이 위(二位)이자 군사격인
금시조(金翅鳥) 문인하중(門人河重)을 의심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의문의 연속이었다.
'혈왕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십삼 인(十三人)은 또 누구인가?'
혁련소천은 생각할수록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문득, 혁련소천의 눈빛이 다시 평범한 사람의 그것으로 변했다.
그는 바닥의 돌멩이 하나를 툭 차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그 늙은이들이 무서워 허락을 하긴 했다만......
젠장! 봉황곡이란 곳이 대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 줄 알고 이
물건을 전해준담?"
그는 문득 앞가슴을 슬슬 쓰다듬으며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대가도 받았으니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돌아가?"
"그건 안 되지."
이때 한 줄기 써늘한 음성이 혁련소천의 귓속을 파고들어왔다.
"엉?"
"네가 그렇게 하면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긴단 말이다."
"누, 누구냐?"
혁련소천은 크게 경악한 표정으로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스스......!
흡사 연기처럼 한 인영이 혁련소천의 면전에 나타났다.
인영은 약간 마른 체구에 눈이 하나뿐인 독목(獨目)의 중년인 모
습을 하고 있었다.
'설전귀도 연파!'
혁련소천은 그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허나 겉으로는 짐짓 겁먹을 표정으로 물었다.
"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말해줘도 너는 모를 것이다."
독목인 설산귀도 연파는 하나뿐인 눈을 음산하게 빛내며 혁련소천
에게 다가갔다.
"자, 네 수중에 있는 물건을 이리 내놓아라."
혁련소천은 기름종이의 물건을 꽉 끌어안으며 주춤 물러섰다.
"무...... 무슨 말을...... 이...... 이것은......."
스윽―!
연파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혁련소천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흐흐...... 애송이 놈! 쓸데없이 지껄이면 당장 숨통을 끊어 버리겠다."
"으윽......."
혁련소천은 답답한 신음성을 터뜨리며 자신도 모르게(?) 품 속의
물건을 떨어뜨렸다.
허나 물건은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연파의 수중으로 빨려 들
어갔다.
물건을 받아 든 연파는 대뜸 기름종이를 벗겨 내던졌다.
그러자 시뻘건 핏빛의 피리가 곧장 그 모습을 들어냈다.
연파는 핏빛 피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윽고 음침하게 괴소를
흘렸다.
"흐흐...... 혈왕소가 틀림없군."
그는 눈빛을 야릇하게 번쩍이며 중얼거렸다.
"이 혈왕소가 그 토록 귀중한 것인 줄은 새북사사천의 누구도 모
르고 있었거늘...... 흐흐흐...... 따지고 보면 건천삼존의 공이
작다 할 수 없겠군."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흐흐...... 이젠 아무도 혈왕의 문을 넘보지 못한다. 대장
문...... 오직 그 분만이 문을 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는 품 속에서 또 하나의 피리를 꺼냈다.
그것은 혈왕소와 똑같이 생긴 핏빛의 피리였다.
"흐흐...... 새북사사천의 대장문께서는 혈왕 나백의 무공을 얻게
되고...... 중원천하는 이 가짜 혈왕소로 인해 엄청난 대혈겁이
일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돌연 연파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는 이내 광소를 뚝 그치며 음산한 시선을 혁련소천의 얼굴에 꽂
았다.
"애송이 놈, 모두 보고 들었을 테지?"
"그렇습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묻는지도 알고 있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너는 무림인이 아니니까......."
연파는 음침한 괴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연파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꺼림칙한 자는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는......."
그러면서 그는 옆구리에 꽂힌 월형도를 천천히 뽑기 시작했다.
허나, 그 순간 연파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무심히 지나치고 있
었으니.......
그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있던 혁련소천의 표정이 어
느새 신비스러울 정도로 담담해졌다는 것이었다.
연파는 월형도를 가슴 앞에 비스듬히 세우며 히죽 웃었다.
"걱정마라. 고통없이 죽여 줄 테니까......."
슉―!
말이 끝나는 순간 월형도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혁련소천
의 목덜미를 베어갔다.
바로 그 순간!
연파는 생애 처음으로 엄청난 괴변을 경험했다.
당연히 목을 감싸쥐고 나동그라져야 할 상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 도(一刀)를 피해 버린 것이다.
"......!"
연파의 눈이 경악으로 휩떠졌다.
"너...... 너는......."
그 순간 혁련소천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연파는 그 미소 대신 혁련소천의 소매 속에서 빠져 나오는
한 자루 연검(軟劍)을 보았을 뿐이었다.
아니, 보았다 싶은 순간 이미 연검은 그의 지척까지 쏘아오고 있었으니.......
번쩍!
일섬(一閃)― 번개!
연파는 평생 이렇게 빠른 검법을 본 적이 없었다.
"헉!"
절로 숨넘어 가는 다급성이 연파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미처 어떤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월형도를 번뜩였다.
슈슈슛!
쾌도(快刀)와 쾌검(快劍)!
월형도가 혁련소천의 목덜미를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순
간, 연파는 돌연 자신의 왼쪽가슴이 독한 술 한 잔을 마신 듯 화
끈해짐을 느꼈다.
"컥......!"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연파의 왼쪽가슴에서 시뻘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쨍그렁......!
연파는 월형도를 떨어뜨리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 속았어! 너...... 너는 고수......."
혁련소천은 웃었다.
"후후...... 너무 늦었어. 네가 나를 알게 된 것은......."
연파는 이를 악물었다.
"누...... 누구냐?"
"혁련소천."
"나의...... 월섬(月閃)을...... 능가하는...... 너의...... 검법은......?"
"초형일섬(超形一閃), 검천의 쾌검이지."
연파의 전신에 충격 어린 경련이 물결같이 일어났다.
"검천...... 중원제일쾌검...... 초...... 형...... 일...... 섬......."
그의 눈알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서서히 뒤집히기 시작했다.
"멋진...... 검법...... 내 눈이...... 현란할 만큼...... 빠르고...... 훌륭......."
"......."
"비록...... 기습적이었...... 으나...... 대단...... 인정...... 하...... 지!"
쿵!
연파는 끝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쓰러졌다.
혁련소천은 자신의 목덜미를 무심히 어루만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굉장한 쾌도였다. 가히 냉유성의 쾌검에 필적될 만큼......."
그리고는 곧 허리를 숙여 죽은 연파의 옆구리에 꽂혀 있던 두 개
의 혈왕소를 뽑아 들었다.
"두 개의 혈왕소다......."
혁련소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바로 그거야......!"
그의 눈에 번쩍 이채가 솟아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차피 혈왕소는 혈왕 나백 이후 임자가 없었다. 다시 말해 강자
라면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챙기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혁련소천은 주저없이 두 개의 혈왕소를 품 속 깊숙이 쑤셔 넣었다.
"봉황곡의 약속은 지킨다. 허나......."
그의 입가에 괴소가 어렸다.
"후후후...... 혈왕의 문은 나 혁련소천이 열게 될 것이다."
야망(野望)!
끝없는 야망이여......!
혁련소천은 잠시 죽어 나뒹구는 연파를 내려다 보았다.
"이 자의 시신이 발견되면 좋지 않다. 새북사사천은 아직 좀더 조용해야 하니까......."
생각이 끝나자 그는 허리를 굽혀 연파의 시신을 번쩍 안아 들었다.
대충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윽고 가볍게 몸을 솟구쳤다.
"이젠...... 군마천으로 돌아가자."
군마천으로!
혁련소천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흩어진 핏방울뿐!
그것은 연파가 남긴 최후의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