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49장 제삼(第三)의 음모(陰謀) - 혈왕(血王)의 문(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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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삼존(乾天三尊).
소양천존(消陽天尊),
조양천존(朝陽天尊),
백양천존(白陽天尊).
이들은 모두 백 세가 넘은 정파명숙(正派名宿)들이며, 양호(兩湖)
일대를 중심으로 전대(前代)를 풍미한 기인(奇人)들이었다.
"후후후...... 이 젊은 친구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우리에게 있어
천운이야. 천운......."
소양천존의 허탈한 뇌까림이 끝나자 조양천존이 탁한 음성으로 말
을 받았다.
"우리 건천삼존이 이렇듯 허무하게 쓰러질 수는 없네. 이번 음모
의 내막은 반드시 규명해야만 하네."
"쿨룩...... 쿨룩......."
이때 가슴을 잔뜩 움켜쥐고 있던 백양천존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
한 기침성이 터져 나왔다.
조양천존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백양, 괴로운가?"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백양이라 불린 노인은 일그러뜨린 얼굴에
한 줄기 쓰디쓴 고소를 피어올렸다.
"어렵네. 한 시진이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군."
"......!"
"후후...... 우리가 소사(蘇邪), 그 어린 놈의 무공을 얕잡아 본
게 잘못이었어......."
"으음......."
조양천존과 소양천존의 입에서 묵직한 침성이 흘러 나왔다.
문득 한쪽에 서 있는 혁련소천의 존재를 의식했는지 조양천존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혁련소천은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원군(遠君)이라...... 합니다."
"사냥꾼이냐?"
"그...... 그렇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다."
"무...... 무슨......?"
조양천존은 문득 기름종이에 싸인 물건 하나를 품 속에서 꺼냈다.
"이것을 봉황곡(鳳凰谷)에 전해다오."
'봉황곡!'
혁련소천은 내심 크게 경악했다.
봉황곡!
일명 봉황성지(鳳凰聖地)로 불리우는 십지(十地)의 단체 중 하나!
'뜻밖이구나! 정파명숙인 건천삼존이 십지 중의 봉황곡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니......!'
허나, 그런 내심과 달리 혁련소천의 얼굴에는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봉황곡이...... 무엇하는 곳입니까?"
"모르느냐?"
"무슨 곡(谷)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도무지......."
"오히려 잘됐군."
조양천존은 소매춤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곳에 봉황곡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문득 조양천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가서 봉황곡주(鳳凰谷主)에게 전해다오. 혈왕(血王)의 문을 열어
야만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혈왕(血王)의 문!'
혁련소천은 하마터면 경악성을 터뜨릴 뻔했다.
― 혈왕의 문!
"받아라. 이것은 네가 도와주는 대가이다."
조양천존은 검은 구슬(黑珠) 하나를 혁련소천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구슬이 무엇인지는 우리도 모른다. 우리 역시 오래 전에 우연
히 얻은 것이니까...... 허나 필시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혁련소천의 눈이 커졌다.
"이...... 귀한 것을......."
"받아라."
"가...... 감사합니다!"
혁련소천은 묵주를 빼앗듯 낚아채 품 속에 쑤셔넣었다.
조양천존은 침중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노부가 하는 말을 명심해 들어라. 그리고...... 봉황곡
주에게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혁련소천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첫째...... 신마루주(神魔樓主)의 봉황곡에 대한 접근은 어떤 포
석이 있는 듯하니 그의 행동을 주시하라. 기억하겠느냐?"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했습니다."
"둘째...... 우리 외에도 혈왕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제 삼자(第
三者)가 또 있다."
"......."
"우리 건천삼존은 새북사사천이 아닌 제 삼의 세력에 의해 당했
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혈왕소를 탈취코저 했다. 기억했느냐?"
"했습니다."
조양천존은 또렷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셋째...... 금시조(金翅鳥)를 완전히 믿지 마라."
"금시조......?"
"그렇게 전하기만 해라."
"아...... 알겠습니다."
"넷째...... 수단과 방법, 피아(彼我)를 가리지 말고 혈왕문(血王
門)의 비밀을 아는 십삼 인(十三人)을 제거하라."
"......."
"그런 다음... 암중에 숨어 있는 제 삼의 음모자를 반드시 색출하
라. 천하의 운명이 그 일에 달려 있다고 전하라."
"......."
"마지막으로...... 혈왕문을 연후의 일은 십 년도 늦지 않을 것이
라 덧붙여 전해라."
조양천존은 거기까지 말하고 문득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두 기억할 수 있겠느냐?"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엉성해 보이기는 해
도 기억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능청떠는 것 또한 남에게 뒤질 이유가 없는 그가 아닌가!
조양천존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듯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
소를 머금었다.
이어 그는 혁련소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부탁한다. 반드시 전해주기 바란다."
혁련소천은 가슴을 쭉 펴며 호기롭게 말했다.
"아무 염려마십시오. 내 이 길로 당장 봉황곡이란 곳을 찾아가겠
습니다."
조양천존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젠 떠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혁련소천은 벌떡 일어섰다.
이어 그는 왔던 길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곳을 벗어나기 전 한쪽 구석에 죽어 자빠진 노
루에게 아쉬운 일별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양천존은 혁련소천을 동굴 밖까지 데려다준 후 다시 원래의 자
리로 돌아와 앉았다.
백양천존은 잔뜩 괴로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조양천존을 쳐다보았다.
"조양...... 그가 전해줄 수 있을까?"
조양천존은 자신없는 어조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한 가닥의...... 마지막 희망이다."
"그 놈은 무공도 모르는 일개 사냥꾼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전할지도 모르지......."
"하긴...... 쿨룩...... 쿨룩......."
백양천존은 가슴을 움켜쥐며 다시 고통스런 기침을 터뜨렸다.
조양천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백양...... 괴로운가?"
백양천존의 얼굴에 잠시 처절한 기운이 감돌았다.
"약간...... 허나...... 곧 편안해질 것 같애......."
허나 그 순간 조양천존은 그의 얼굴에서 죽음을 읽고 있었다.
시종 침묵하고 있던 소양천존의 입에서 암울한 탄식이 흘러 나온
건 그때였다.
"휴...... 천하의 건천삼존이 이렇게 당할 줄은 미처 몰랐구나."
바로 그때였다.
"후후후...... 새북사사천을 건드렸으니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이
지."
돌연 동굴 밖에서 웃음 섞인 한 줄기 조용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
이 아닌가.
건천삼존의 안색이 순식간에 홱 변했다.
그리고 소양천존과 조양천존은 퉁기듯 일어서며 동시에 외쳤다.
"누구냐?"
스스......!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한 인영이 마치 환영(幻影)처럼 건천삼존
의 앞에 나타났다.
"후후후...... 섭섭하군. 나 소사의 음성을 벌써 잊었다니......."
금마혈번 소사!
바로 그였다.
"네...... 네가......."
건천삼존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되었다.
금마혈번 소사는 그들을 쓸어보며 나직이 웃었다.
"후후후...... 어디까지 갔나 했더니 겨우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조양천존의 안면이 무섭게 씰룩였다.
"지독한 놈...... 끝까지 우리의 목숨이 필요하단 말이냐?"
소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새북사사천에 도전한 적은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는 것
이 우리의 철칙이니까......."
조양천존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잠시 후, 소사는 오른손을 조양천존에게 내밀었다.
"우선...... 내놓아라."
"음?"
"혈왕소."
조양천존의 두 손이 일순 이채를 띠었다.
'다행이구나! 놈은 조금 전 원군이 혈왕소를 가져간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기름종이에 쌌던 물건.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새삼 설
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조양천존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그때 백양천존이 심한
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쿨룩! 소사...... 혈왕소는 원래부터 중원의 물건...... 우리
는...... 쿨룩쿨룩...... 중원의 것을 다시 찾아온 것에 불과할
뿐이다."
소사는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것은 너의 생각이 그러할 뿐...... 일단 새북사사천에서 입수
한 물건은 곧 새북사사천의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지."
백양천존은 더욱 심한 기침을 터뜨리며 힘겹게 말했다.
"쿨룩! 쿨룩...... 소...... 소사...... 그렇다면...... 내가 모
든 것을...... 해결해 주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개빛같은 빠르기와 함께 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전광석화(電光石火)!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뜻밖의 기습이었다.
그 토록 괴롭게 기침하며 헐떡거리던 백양천존이 이토록 빠른 기
습을 시도할 줄 뉘라서 상상이나 했겠는가?
허나 소사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우뚝 서 있을 따
름이었다.
"안돼! 백양!"
그 순간 조양천존의 대경성이 급하게 터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소사가 빙긋이 웃었다.
"늦었다."
슈슛!
"으― 악!"
참담한 비명이 터지고 백양천존의 몸이 거세게 퉁겨져 나간 건 찰
나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퉁겨 나가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시뻘건 핏물이 두 쪽으로 쪼개진 그의 머리에서 꼬리를 물며 뿜어
지고 있었으니.......
백양천존은 실 끊어진 연처럼 맥없이 날아가 벽에 세차게 부딪치
더니 이내 바닥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그런 그의 몸은 이미 살아 있는 그것이 아니었다.
언제 뽑았던가?
어느 틈인지 소사의 손에는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장창 하나가 위
협적으로 쥐어져 있었다.
백양천존의 죽음을 본 순간 조양천존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피
어올랐다.
"이 찢어 죽일 놈!"
동시에 그는 양 손 십지(十指)를 소사를 향해 한꺼번에 미친 듯이
퉁겼다.
슈슈슈슈― 슈웅!
귀청을 찢을 듯한 파공성과 함께 열 줄기의 홍광(紅光)이 소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폭사되었다.
"조양지(朝陽指)인가?"
소사의 얼굴에 언뜻 조소가 떠올랐다.
퍼퍼퍼퍽! 퍽! 퍽!
이 순간 열 줄기의 홍광은 소사의 가슴과 복부에 사정없이 작렬했
다.
헌데 이 어찌된 조화인가.
분명 열 줄기의 홍광에 격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사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조양천존은 아연 넋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럴 수가......."
번쩍!
순간 소사의 수도(手刀)가 섬광같은 속도로 조양천존의 목덜미를
스쳐갔다.
동시에 둥근 머리통 하나가 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찾아온 조양천존의 죽음이었다.
툭! 떼구르르......!
자신의 발밑에 떨어지는 조양천존의 머리통을 보는 순간 소양천존
의 눈꼬리가 쭉 찢어졌다.
"이...... 악독한......."
"우야― 압!"
소양천존은 전신에 혼신의 힘을 담고 미친 듯이 소사에게 부딪쳐
갔다.
동귀어진(同歸御盡)!
죽음을 각오한 최후의 절초(絶招)가 펼쳐진 것이었다.
허나, 소사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후후...... 새북사사천에서는 나를 일컬어 죽음의 귀공자(貴公
子)라 부르지. 이유는 내게 도전한 자는 한 명도 살려두지 않기
때문이야."
그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 직전 장창에 걸린 혈번(血幡)이 괴이
무쌍하게 번뜩였다.
슈슈슈슉―!
그 속도는 너무나 빨라 도무지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였
다.
파파파팟!
경쾌한 격타음이 일어나며 분수같은 피가 튀더니 소양천존의 앞가
슴이 쫙 갈라져 갔다.
"큭!"
공격해 오던 자세 그대로 소양천존의 몸은 소사의 코 앞에서 돌처
럼 굳어졌다.
꽈르르륵......!
시뻘건 핏물은 뜨거운 김을 피워내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무...... 무서운...... 놈......."
소양천존은 간신히 그 말을 내뱉더니 그 자리에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실로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소사는 몸을 구부려 건천삼존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허리를 펴며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후후...... 역시 혈왕소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군."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후후...... 대장문, 과연이외다."
무슨 뜻인가?
"으핫핫핫......."
소사는 돌연 호탕한 대소를 터뜨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연파...... 다음 일을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소사는 바람처럼 그 자리를 떠나갔다.
무슨 일인가?
대체 어떤 일이 꾸며지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