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48장 뒤엉키는 음모(陰謀)와 건천삼존(乾天三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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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무산(巫山).
험준절악함에 있어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천하제일의 험지(險
地)!
특히 무산삼협(巫山三峽)하면 나는 새도 비껴간다는 말이 이미 전
설처럼 굳어진 지 오래가 아닌가?
팔월(八月)의 어느 날, 무산삼협 중 서릉협(西陵峽)을 끼고 돌아
가는 어느 계곡의 산길을 한 백의청년이 유유히 걷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스물대여섯 정도, 안색이 다소 창백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그의 모습은 비할데 없이 준수했다.
청년은 소매를 걷어붙인 채 어깨에는 푸른빛 낚싯대 하나를 둘러메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혁련소천의 변신한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혁련소천이 광천오제와 함께 중원으로 돌아온 때는 칠월(七月)이
었다.
죽령도가 붕괴된 사월 스무이렛날, 그는 만상노군이 미리 준비한
배를 타고 곧장 철신도로 향했다.
철신도에 도착한 그는 만년철도에서 철마기류를 흡수하며 두달 반
동안 머물다가 이윽고 중원에 돌아온 것이다.
그런 그가 오늘 이곳 무산(巫山)에 불쑥 나타난 이유는 또 무엇인가?
혁련소천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유유히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려는 유쾌한 낚시꾼의 모습과 조
금도 다를 게 없었다.
허나 이 근처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 본다면 필시 이렇게 말하리
라.
― 미친 놈, 서릉협의 급류에서 낚시질을 해! 차라리 만길 낭떠러
지 끝에 서서 구름이나 잡으라지!
허나, 천하의 혁련소천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누가 나서서 미친
놈이라 할 수 있을 텐가?
그리고 일견 한가해 보이는 듯한 그의 머리 속이 이 순간 무섭게
회전하고 있음을 누군들 상상하랴?
― 새북사사천은 새외의 하늘(天), 그 힘은 중원의 구천십지만마
전에 비견될 만큼 최극강(最極强)한 것입니다.
― 새북사사천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 단체를 이끌어가는 주인이
사십사 명(四十四名)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 사십사 인(四十四人)의 무공은 하나같이 초인적(超人的)
경지마저 넘어섰다고 전해지나 그 진실한 깊이는 누구도 측정치
못하는 실정입니다.
― 새북사사천의 최고 수뇌인 대장문(大掌門)의 정체는 아무도 모
릅니다. 심지어 나머지 사십삼 인의 주인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 새북사사천에서는 대장문을 부를 때 반드시 이런 말을 덧붙이
고 있습니다.
― 푸른 하늘의 뜻으로 탄생하신 대막의 영원한 신(神)이시여......!
눈으로는 우거진 녹음을 감상하고, 입으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혁련소천은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실상 그의 뇌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
게 회전하고 있었다.
'건천삼존이 새북사사천의 기문지보인 혈왕소를 탈취, 그로 인해
분노한 새북사사천의 대장문은 사십사 인(四十四人)의 주인 중 삼
인(三人)을 중원으로 밀파했다!'
'금마혈번 소사, 설전귀도(雪電鬼刀) 연파(烟波), 호목천군(虎目
天君) 사위릉(史偉陵)...... 그리고 그들 삼 인 외에도 일급고수
백 인(百人) 이상이 옥문관을 넘었다!'
처음으로 혁련소천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새북사사천의 중원 진입...... 이것은 실로 보통 문제가 아니다!'
'자칫 잘못해서 그들과 구천십지만마전과 어떤 마찰이 생긴다면,
중원과 새외무림 사이에 엄청난 유혈참극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혁련소천은 더 이상 콧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았다.
'만약...... 건천삼존이 혈왕소를 탈취한 것이...... 새북사사천
대장문이 중원으로 진입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민 음모라면......?'
불현듯 무서운 가정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건천삼존은 혈왕소가 반드시 필요하고...... 대장문은 중원으로
진출할 야망이 있었다고 가정할 때...... 만약 대장문이 건천삼존
의 의중을 파악해서 혈왕소를 탈취당하게끔 고의로 방관한 것이라면......!'
혁련소천은 천천히 하늘을 응시했다.
'그런 구실로 새북사사천이 중원으로 진출한다면 단우비로서도 그
들을 막을 수가 없다. 대장문은 떳떳한 구실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누군가 건천삼존을 이용해서 새북사사천을 의도적으
로 중원으로 끌어들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해볼 수 있다.
구천십지만마전과 충돌을 유발시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노린
다는 계획하에서.......'
생각이 이에 이르자 혁련소천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져 갔다.
'만약 후자의 가정이 맞는 것이라면...... 대장문과 단우비 외에
또 한 명의 무서운 인물이 암중에 도사리고 있다는 결론이 아닌가!'
제삼(第三)의 인물!
잠시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이 혁련소천의 뇌리에 불쑥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렇다! 죽령도를 항해 가던 도중 누군가에 의해 뜻하지 않게 당
한 적이 있었다!'
낚싯대를 잡은 그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만약에...... 당시 내가 당할 수밖에 없게끔 완벽한 음모를 꾸몄
던 자와...... 새북사사천과 구천십지만마전 간에 충돌을 유발시
켜 그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여기까지 생각한 혁련소천은 마음이 바윗덩어리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런 자가 실제 당금 무림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는
내 생애 최대의 강적이 될것이다......!'
혁련소천은 다시 걸음에 속도를 가했다.
그러나 몇 걸음이나 갔을까?
돌연 그의 눈에 번쩍 이채가 떠올랐다.
'피냄새다!'
번쩍!
느끼는 순간 이미 그는 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빽빽한 수림 속에 한 백의노인이 가슴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탄
채 죽어 있었다.
혁련소천은 낚싯대끝을 움직여 노인의 옷고름을 헤쳐보았다.
그러자 노인의 가슴에 시꺼먼 묵빛의 장인(掌印)이 찍혀 있는 것
이 드러났다.
'무서운 양강(陽强)의 장공...... 건천삼존 중 소양천존의 소천장
인이다!'
혁련소천의 낯빛이 침중해졌다.
탁!
시체의 가슴을 더듬던 낚싯대끝에 무엇인가가 걸려 바닥에 떨어졌다.
"......!"
혁련소천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각영패(四角令牌)였으며 거기엔 한 줄기 글
씨가 새겨져 있었다.
<새북천령(塞北天令).>
"역시 새북사사천의 고수로군!"
무겁게 중얼거리는 혁련소천의 눈에서 문득 기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아직은 새북사사천이 중원에 진입해 올 때가 아니다!'
그는 시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죽은 지 하루가 지나지도 않은 것 같다. 서둘러야겠구
나. 큰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휙!
그의 신형은 수림 깊은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갔다.
혁련소천이 내려선 곳에는 세 구의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황폐한 들판이었다.
시신들의 복장은 좀전에 보았던 백포노인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백포노인의 시신은 가슴이 시꺼멓게 그을려 있는 반면, 이
들 세 구의 시신은 목덜미에 붉은 반점이 하나씩 나타나 있는 게
특이했다.
'이들은 조양천존(朝陽天尊)의 조양지(朝陽指)에 당했군!'
혁련소천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발견된 새북사사천 고수들의 시체는 모두 서
른여섯 구...... 한결같이 이삼 초 이내에 당한 듯 보였다!'
다시 그의 눈에 괴광이 일렁였다.
'허나...... 시신들에 나타나있는 상처의 흔적이 점차 둔탁해지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맛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건천삼
존도 무사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천하의 그 어떤 것들이 혁련소천의 안목을 벗어날 수 있을 텐가!
'우선 새북사사천의 삼 인보다 건천삼존을 먼저 찾아야겠다. 그래
서 그들이 혈왕소를 노리게 된 동기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
스슷!
혁련소천의 신형은 다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수림 밖에 내려서는 혁련소천의 얼굴에는 당혹스런 기색이 나타나 있었다.
'종적이 끊어졌다!'
그는 주위를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허나 그 어디에도 사람이 스쳐간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건천삼존이 하늘로 사라졌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더구나 몸도 불편한 상태에서.......'
허나 어찌하랴?
시체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고 인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으음......."
혁련소천은 낮게 침음하더니 문득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혁련소천의 두 눈이 돌연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인간한계에 대한 십관의 도전...... 그 중 일곱 번째 관문이 바
로 시력을 극한까지 단련하는 것이었다!'
오오! 그랬던가?
'천안공(天眼功)...... 그것을 전개하면 태양도 직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백 장 밖에서 기어가는 개미의 움직임까지도 파악
이 가능해진다!'
'허나...... 천안공을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한 시진뿐이
다. 그 시각이 지나면 나의 두 눈은 터져 버린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한순간 무언가를 감지했음인지 그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이것은.......'
'둔형천은술(遁形天隱術)...... 이럴 수가......!'
유리알같은 그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이 수법은...... 신마루(神魔樓)의 은둔수법...... 어찌 건천삼존이 이 수법을......?'
혁련소천은 머리 속이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정한 모든 추측에 금이 가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보자!'
스― 윽!
혁련소천의 신형은 곧장 한 방향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②
그것은 계곡의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어 여간해서는 찾기 어려운
동굴이었다.
혁련소천은 이 동굴이 내려다보이는 한 구릉 위에 모습을 드러냈
다.
어느새 그의 왼손엔 활이 쥐어져 있었고,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있어 마치 사냥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뿐인가!
그의 오른손에는 노루 한 마리까지 들려 있지 않은가!
두 눈을 멀쩡하게 뜬 살아 있는 노루였으나 자세히 보면, 한쪽 다
리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혁련소천은 멀리 보이는 동굴에 일별을 던진 후 천천히 노루를 내
려놓았다.
"부탁한다...... 노루야."
이어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노루의 엉덩이를 툭 쳤다.
"가라!"
화살에 맞았으리라 생각했던 노루는 혁련소천이 놓기를 기다렸다
는 듯이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노루가 달려가는 방향은 동굴이 있는 바로 그쪽이었
다.
"미끼는 던져졌다."
혁련소천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
렀다.
순식간에 그의 눈빛이 평범한 사람의 그것으로 변했다.
그리고나선 "이 놈의 노루야! 네가 가면 어디까지 가겠느냐? 서
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혁련소천은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
작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영락없이 노루의 뒤를 쫓아가는 평범한 사냥꾼
의 폼이었다.
노루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제서야
혁련소천은 땀을 뻘뻘 흘리며 동굴 앞까지 당도했다.
그는 이마에 고인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몇 차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런 다음 그는 동굴을 힐끗 쳐다보며 냉랭한 코방귀를 날렸다.
"흥! 이곳이 네놈의 집인 모양이다만 어림도 없다. 네놈을 잡지
않으면 우리집 생계가 곤란해진단 말이다"
슥......!
그는 화살 한 대를 활에 메기며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먹물같은 어둠이 그의 전신을 자욱이 휘감아 왔다.
"빌어먹을! 뭐가 보여야 그 놈을 잡든지 어쩌든지 해보지......."
혁련소천은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더니 문득 은근한 음성을 흘려
냈다.
"노루야...... 노루야...... 자, 이리 오너라. 잡혀만 준다면 내
너를 위해 백 일 동안 명복을 빌어주마......."
대답이 있을 리 없었고 노루가 달려올 리가 만무했다.
"빌어먹을......."
혁련소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활 전체로 앞을 휘저으며 조심스럽
게 걸음을 떼놓았다.
그러나 한참을 가도 어둠만이 그를 반겨줄 뿐 노루의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거...... 혹시 끝도 없는 동굴이 아닐까?
우웅......!
불안한 기색이 담긴 중얼거림이 어둠 속에서 은은히 메아리쳤다.
"제기랄...... 다시 돌아 나가자니 그렇고......."
혁련소천이 불현듯 걸음을 멈춘 채 머뭇거렸다.
이때였다.
돌연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 나와 혁련소천의 손목을 꽉 움켜쥐
었다.
"헉! 누...... 누구냐?"
혁련소천은 기겁을 하며 대경성을 터뜨렸다.
순간 그의 귓가에 극히 나직한 음성이 전해졌다.
"떠들지 마라. 시끄럽게 굴면 입을 틀어막아 버리겠다."
혁련소천은 겁에 질린 눈으로 사위를 황망히 두리번거렸다.
"누...... 누구십니까?"
"이 동굴의 주인이다."
혁련소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그럼 노구귀신?"
"생각외로 소심하고 겁이 많은 놈이군."
손목을 움켜잡았던 손이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한 순간
돌연 환한 불이 켜지며 내부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음?"
혁련소천은 몹시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 반사적으로 한
손을 들어 밝은 빛을 가렸다.
순간 그의 시야에 흔들리는 불빛 아래 호호백발의 세 노인이 품자
형으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들은 한결같이 창백한 안색에 피로감이 완연해 보이는 모습들
이었다.
특히 그 중 한 명은 가슴을 잔뜩 움켜쥔 채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
을 하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그들을 보는 순간 대뜸 직감했다.
'건천삼존이다!'
노루는 동굴 한 귀퉁이에 목이 비틀어진 채 죽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