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3권 제45장 죽령도(竹靈島)의 붕괴와 죽음의 탈출(脫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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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콰르르르르......
며칠간 잠잠했던 바다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후우― 우― 웅―!
휘우우웅!
파도는 거친 강풍을 타고 점차 드세지고 있었다.
요동치는 파도 위로 유유히 떠가는 한 척의 배가 보였다.
그것은 선체(船體)에서 수십 개의 돛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묵빛
일색의 거대한 흑선(黑船)으로 거센 파도 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고고한 모습으로 떠가고 있었다.
흑선의 뱃머리에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는 한 인영의 모습이 어
슴푸레한 밝음 속에서 보여졌다.
눈아래의 얼굴은 면사로 가렸고, 일신에 걸친 옷은 녹의(綠
衣).......
그는 바로 천붕군도의 벽안천매 궁독이었다.
궁독은 섬뜩하리 만큼 푸른 눈빛을 바다 멀리로 고정시킨 채 티끌
만큼의 움직임도 없었다.
파다다다닥......!
불어오는 강풍에 그의 녹삼자락이 찢어질 듯 나부끼고 있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한 번쯤 거역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돌연 나직한 중얼거림이 면사 아래로 흘러 나왔다.
"실패하면 한 줌의 흙이고, 성공하면 영화스런 제왕의 보좌에 앉는다."
그의 눈 깊숙한 곳에 일순 괴이한 광채가 일렁였다.
"주어진 삶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 앞으로 십 년(十年)이다."
십 년(十年)!
어떤 의미의 세월인가?
바로 그때였다.
스스슷!
궁독의 뒤쪽에 삼 인(三人)의 복면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그 자리에 깊숙이 부복했다.
궁독은 여전히 바다 먼 곳을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을 발했다.
"준비는?"
중앙의 복면인이 즉시 대답했다.
"완벽합니다."
"궁독의 삶에서 실패란 영원히 용납되지 않는다."
"주군을 따른 지 어언 이십 년. 이미 저희들의 생명은 이십 년 전 주군께 바쳤습니다."
"......."
"이번 일......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궁독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때를 같이해서 중앙의 복면인도 약간 고개를 쳐들었다.
백안(白眼)!
그 복면인의 두 눈은 끔찍스럽게도 온통 흰자위뿐이었다.
궁독의 눈가에 엷은 웃음기가 번져 나왔다.
"믿겠다. 너를......!"
복면인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혼(魂)을 다 바치겠습니다!"
"가라."
"존명!"
스스슷!
순간 세 복면인은 흔적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방은 광란하는 바다!
어디로 갔는가?
궁독은 천천히 고개를 바로했다.
바로하는 순간 그의 두 눈은 무섭도록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십 년이다. 십 년......!"
십 년... 무엇을 하기 위한 세월인가?
또한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꽈르르르... 르르릉... 꽈르르르......!
거센 파도는 혼자 신이 나 있었다.
②
휘우우― 우― 우― 웅!
죽령도에도 거센 광풍은 휘몰아치고 있었다.
석실 안에서 혁련소천은 탁자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탁자 위의 종이에는 이미 많은 선이 종횡으로 어지럽게 그려져 있
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혁련소천은 허리를 펴며 탁자의 한쪽
켠에 붓을 내려놓았다.
지금 이 순간, 종이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지혜롭게 빛나고 있었다.
'천곡영천(天曲靈泉)...... 동에서 서로 흐르며 그 맥(脈)은 모두
서른여섯 개이나 주맥(主脈)은 단 하나뿐이다!'
천곡영천!
'그 주맥은 죽령도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을 끊으면 나
머지 서른다섯 개의 맥도 모조리 끊어진다!'
그는 종이에 그려진 한 선을 짚으며 거듭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면...... 죽령도의 지하에 흐르는 물은 모조리 해저로
빠져 나가고 그로 인해 죽령도는...... 자연스럽게 붕괴된다!'
죽령도의 인위적 붕괴!
그것은 실로 엄청난 착상이었다.
혁련소천은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를 떠올리며 계속 생각했다.
'문제는 천곡영천의 주맥을 어떻게 끊느냐 하는 것이지만......
후후...... 뇌정화신탄 다섯 개면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
'됐어! 이 정도면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혁련소천은 종이를 와락 움켜쥐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흘 후...... 죽령도는 한 인간에 의해 해저 속으로 완전히 사
라진다. 그렇게 되면 광천오제에게는 마땅히 이곳을 떠나야 할 이
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과연 혁련소천이라 말하지 않을 텐가?
혁련소천은 종이를 천천히 황촉불에 갖다 대었다.
확! 화르르르.......
'이 불꽃처럼...... 죽령도는 사라지는 것이다!'
불붙은 종이가 재로 변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툭! 툭!
혁련소천은 손을 털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이때 문 밖에서 문득 처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교홍이냐?"
"예."
"들어오너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석문이 열리며, 화교홍이 안으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그녀의 안색은 중병을 앓는 환자처럼 창백해 보였다.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풀어헤쳐져 있었고 비에 흠뻑 젖은 채 온몸
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꼴이냐? 웬일이냐, 교홍?"
혁련소천의 눈이 커졌다.
"......."
화교홍은 멍하니 그를 응시하더니 문득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교, 교홍?"
혁련소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흑......!"
돌연 화교홍은 얼굴을 감싸쥐며 허물어지듯 혁련소천의 품에 안겼다.
"흑흑...... 흑......!"
그녀는 혁련소천에게 안기자마자 구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혁련소천은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교홍, 무슨 일이 있었느냐?"
화교홍은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교홍을 용서하세요. 교홍은...... 몹쓸 여자예요. 흑흑......!"
"용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혁련소천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리며 말했다.
"진정하고 자세한 얘기를 해보아라. 교홍이 내게 무엇을 속였는지......."
화교홍은 천천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아마......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면...... 오라버니는 저
를...... 용서하시지 않을지도 몰라요."
혁련소천은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말해 보아라. 천하에 어찌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화교홍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 년 전...... 제가 이 죽령도로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요."
"음?"
"저는 계획된 음모에 의해 이곳에 들어온 거예요."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화교홍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혹시 천붕군도라고 아시나요?"
'천붕군도!'
혁련소천의 눈에 번쩍 이채가 스쳤다.
'단우비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해상최강의 세력이 아닌가!'
빠르게 염두를 굴린 그는 곧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들어보긴 했다만......!"
"저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이 바로 천붕군도의 대군황 사해마종 희
천세예요."
"......!"
혁련소천은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허나 그는 여전히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어째서 너를 이곳으로 보냈단 말이냐?"
화교홍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군황께서는 이 죽령도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 있는 것을 알고
저를 이곳으로 파견하셨답니다."
"비밀?"
"이 죽령도에 두 가지 기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낸 거죠.
바로 사라옥정과 천섬검환결이라는......."
"음......!"
"헌데 육십 년 전 광천오제 다섯 분이 이곳으로 와 그 두 가지를
얻어 버리자, 대군황은 저를 이용해 그것을 탈취하고자 계획했던
거예요."
"흠......!"
혁련소천은 나직이 침음했다.
이어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약간 무뚝뚝하게 말했다.
"헌데 그러한 비밀을 지금 밝히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의 침음한 음성을 의식했음인지 화교홍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
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
다.
"대군황께서는 두 가지 기보를 탈취한 후 이곳 죽령도에 있는 모
든 사람을 죽일 생각이에요......."
"흠...... 희천세. 듣기보다 무서운 인물인 모양이군."
"소녀는...... 그 동안 크나큰 죄책감에 빠져 고민하다가......
오늘에서야 밝히는 거예요."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얼굴을 감싸쥐며 울음을 터뜨렸
다.
"흑...... 얼마 전 오라버니께서 해독하신 세 장의 양피지와 사라
옥정이 숨겨진 위치를...... 이미 천붕군도에 연락...... 흑
흑......!"
혁련소천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직이 뇌까렸다.
"원래 그렇게 된 것이로군."
화교홍은 번쩍 고개를 치켜들더니 황망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도망가세요. 오래지 않아 천붕군도에서 들이닥치면......."
"틀렸다."
"예?"
"오늘같은 험악한 날씨에 어디로 간단 말이냐?"
화교홍의 얼굴에서 일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에요. 저같이 몹쓸 계집은...... 차라
리......."
순간, 슉!
그녀는 사정없이 자신의 천령개를 찍어 갔다.
허나 그녀의 손은 천령개에 닿기 바로 직전에 우뚝 정지하고 말았
다.
혁련소천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화교홍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왜......?"
"네가 죽는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그, 그럼......?"
"나는 사라옥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허나 내가 해독했던 천섬검환
결의 마지막 부분만큼은 결코 희천세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순간, 화교홍의 눈에 당혹스런 빛이 물결쳤다.
"그게...... 무슨......?"
혁련소천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내가 너에게 준 것은 가짜이니까."
"......!"
"진본은 내가 갖고 있지."
"어...... 어찌?"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그 동안 나는 네게 몇 가
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진본을 숨긴 것이다. 만상노군에
게 직접 전해줄 생각이었지."
화교홍의 눈빛이 일순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그렇듯 복잡하던 눈빛은 이내 기쁨으로 변해 가는 것이었다.
"아아! 기뻐요......!"
비 맞은 해당화의 아름다움이 이러할까?
눈으로 울고, 입으로 웃으면서.......
그녀는 혁련소천의 품에 뜨겁게 파고들었다.
"흑흑...... 기뻐요! 잘 하셨어요! 덕분에 저의 죄책감도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혁련소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흐흠.......'
혁련소천은 가슴이 왠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조용히 말했
다.
"그만 울어라, 교홍!"
화교홍은 그 말에 고개와 어깨를 세차게 도리질쳤다.
"싫어! 싫어요! 교홍은......!"
허나 그녀의 뒷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혁련소천의 손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혁련소천의 두 눈에서 화교홍은 뜨거운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가늘게 몸을 떨던 화교홍은 두 볼에 홍조를 피어올리며 이윽고 스
르르 눈을 감았다.
순간 감은 긴 속눈썹끝으로 한 방울 이슬이 파르르 떨리며 반짝
맺혀졌다.
여인의 눈물, 그것은 때론 사나이의 욕정(慾情)을 무섭게 자극시
키기도 하는 것.......
어느 순간 혁련소천의 입술은 이미 그녀의 입술 위로 뜨겁게 겹쳐
졌다.
"으...... 음......!"
그때를 기다렸음인가?
화교홍은 백사같은 두 팔로 혁련소천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동시에 그녀의 입김이 혁련소천의 입 속으로 거침없이 빨려 들었
다.
"......!"
혁련소천이 움찔하는 그 순간, 화교홍의 입술은 혁련소천을 힘껏
빨아들였다.
마치 혁련소천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는 듯 그녀의 힘(?)은 그만
큼 뜨겁고 강렬했다.
'굉장하군......!'
색(色)의 달인임을 자부하는 혁련소천이 감탄할 정도라면 이미 얘
기는 끝난 것이 아니겠는가?
"으음...... 음......!"
화교홍은 들뜬 비음을 흘리며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
켜 갔다.
― 저를 가지세요.
말은 없었다.
허나 뜨겁게 짓눌러오는 터질 듯한 가슴과 아랫배 근처에서 전해
오는 야릇한 촉감이 그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혁련소천의 눈 깊숙한 곳에서 야릇한 광채
가 쏟아져 나왔다.
'좋아!'
뭐가 좋다는 말인가?
......
여체(女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흘러내리는 희뿌연 빛깔의 나신(裸
身).......
그 은밀하고 신비스런 비역(秘域)은 이미 알맞게 젖어 있었고, 애
무를 하기에 그 몸은 너무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혁련소천은 별 수고도 없이 어렵지 않게 그녀에게 진입할 수 있었다.
"아윽......!"
순간 화교홍의 눈이 커지며 전신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허나 그것은 잠시뿐, 두 사람은 곧 거센 파도 속으로 휘감겨 들어갔다.
"......."
"으음...... 음......."
바람(風)!
두 남녀의 몸은 서로 밀착되어 뜨거운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으음...... 아...... 아......!"
잇달아 터져 나오는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 소리, 화교홍의 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아픔이여.......
그래도 좋은 아픔이여.......
춤은, 땀을 동반한 채 한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나른한 피로감에 젖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적어도 화교홍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
화교홍은 침상에서 스르르 빠져 나오더니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
었다.
옷을 입는 동안 그녀는 쉴새없이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순간 화교홍의 눈이 돌연 반짝 빛났다.
혁련소천의 베개 밑에 삐죽 튀어 나온 하얀 종이를 본 것이다.
'......!'
화교홍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빼내더니 소리없이 펼쳐보았다.
종이는 모두 세 장이었으며 거기엔 오성마검의 삼식을 풀이, 해석
해 놓은 그림과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거다!'
화교홍은 하얗게 웃으며 종이를 말아 재빨리 품 속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혁련소천을 힐끗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은 그때까지도 죽은 듯이 자고 있을 뿐이었다.
화교홍은 문득 그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러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 나의 님......!"
입술을 떼는 그녀의 얼굴에 일순 요염한 괴소가 감돌았다.
"당신은 죽지만...... 그 대가로 저의 몸을 얻었으니 별로 유감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조그맣게 웃으며 이내 석실 밖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녀가 밖으로 사라진 바로 그 순간 돌연 혁련소천의 입가
에 신비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누운 자세 그대로 베개 밑이 아닌 침구 밑
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곧이어 빼내는 그의 손에는 화교홍이 가져간 것과 똑같은 세 장의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혁련소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상에서 내려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십팔천혈뇌마서(十八天血腦魔書) 중 마도십팔계의 장(章)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지.'
― 한 번 의심한 사람은 최소한 세 번은 더 의심해야 한다.
혁련소천은 옷을 다 입고 세 장의 종이를 품에 넣으며 재차 중얼거렸다.
"화교홍, 너는 나 혁련소천이란 인물을 너무나 몰랐다."
그는 한쪽 벽을 돌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헌원노대, 좋은 구경도 모두 끝났을 텐데 그만 나오는 게 어떻겠소?"
순간 퍽 하며 돌연 한쪽 벽이 무너지더니 한 인물이 실내로 들어섰다.
도광 헌원패!
바로 그가 아닌가?
지금 헌원패의 두 눈은 마치 횃불이 타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태연히 그를 쳐다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군."
순간 헌원패의 눈에서 살을 태울 듯한 혈광(血光)이 무섭게 쏟아
져 나왔다.
"그렇다! 최소한 백 번도 더 그 계집을 찢어 죽이고 싶은 살심이
내 피 속에서 들끓었다."
"후후후...... 인자(忍者)는 무적(無敵)이오."
바로 그때, 휙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또 한 명의 인물
이 떨어져 내렸다.
만상노군 우문창!
그는 내려서기가 무섭게 혁련소천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대체...... 너는 누구냐?"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했다.
"영호풍도 되고 혁련소천도 되니 편한 대로 생각하시오."
"아미타불......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중생이로다!"
이번엔 묵직한 음성과 함께 불영치마가 석문 안으로 들어섰다.
혁련소천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못 믿겠단 말이오?"
"못 믿었으면 벌써 자네를 죽였을 것이네."
불영치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후후후...... 땡초! 이야기는 똑바로 해라. 네가 무슨 재주로 저 소형제를 죽여?"
그 순간 또다시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소절풍마가 연기처럼 나타났다.
"ㅋㅋㅋ...... 맞는 말이다. 땡초 너같은 것은 한 묶음 있어도 저
소형제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스르르르......!
이번에는 땅 속에서 스며 나온 듯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 그는 바
로 독심광의였다.
이른바, 광천오제가 모조리 나타난 것이다.
"......."
혁련소천은 그들을 차례로 쓸어보며 한 줄기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헌원패의 무겁고 진중한 음성이 혁련소천의 고막을 울렸다.
"영호...... 아니 소천, 말해다오.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혁련소천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믿겠소?"
헌원패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헌원패...... 평생 처음으로 한 인간을 믿어보겠다."
"다른 분은?"
그 말에 헌원패는 버럭 노갈을 터뜨렸다.
"들을 필요도 없다! 믿지 못하겠다는 놈은 나의 칼로 사정없이 두
쪽 내고 말 테니까!"
그때 소절풍마의 음산한 괴소가 흘러 나왔다.
"흐흐흐...... 과격한 말이지만...... 나도 동감이니 넘어가지."
혁련소천은 나머지 불영치마 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러자 불영치마 등도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감의 뜻을 표시했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웃으며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해야겠군. 이 죽령도를 붕괴시키고...... 죽음의 대탈
출을 위한 준비를......!"
쏴쏴쏴......!
밖은 광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