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43장 고도(孤島)의 광천오제(狂天五帝)
━━━━━━━━━━━━━━━━━━━━━━━━━━━━━━━━━━━
①
칠 인(七人),
광천오제와 혁련소천, 화교홍 등은 탁자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
러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아보였고 분위기 또한 부드러운 편이었
다.
허나, 만상노군 우문창. 유독 그만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안색이
연신 붉으락 푸르락 변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커다란 접시 위에는 삶은 무우 한 개가 덩그라니
올려져 있었다.
"빌어먹을......."
참다 못했음인가?
우문창은 문득 험악한 눈길로 헌원패를 쏘아보았다.
"원숭아, 이것도 요리라고 내놓은 것이냐?"
헌원패는 콧구멍을 후벼파며 느긋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흐...... 너를 생각해서 특별히 온갖 양념을 넣고 통으로 삶
은 무우인데 뭐가 어쨌다고 투덜거리는 것이냐?"
우문창의 눈썹이 쭈삣 곤두섰다.
"이 놈아, 그럼 왜 고기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느냐?"
헌원패는 냉소했다.
"빌어먹을 놈! 생각해서 특별요리를 만들어줬더니 어쩌고 어째?"
"특별요리?"
"이 놈아! 네가 왕년에 고기는 먹어 봤겠지만 통째로 삶은 무우는
언제 한 번 먹어봤느냐?"
"그...... 그것은......."
"다시 말해서 먹어보지 못했던 것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보다 특별
한 요리가 어디 있겠느냐?"
우문창의 얼굴이 일순 구겨진 휴지처럼 일그러졌다.
헌원패가 자신을 농락하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는 생각이 들었으나 선뜻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우문창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으으...... 어엿한 황족(皇族)의 후손인 내가 미친 놈들 사이에
끼어 이런 수모를 겪다니......."
그 말에 헌원패는 콧방귀를 날리며 빈정거렸다.
"빌어먹을 놈! 왕족에 황족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느냐?"
"원숭아, 네놈과 나는 근복적으로 태생이 다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때 소절풍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허허...... 안다 알어. 이천 년 전에 황족과 사돈의 팔촌 정도는
됐을 테지."
"사돈의 팔촌......."
우문창은 소절풍마를 험상궂게 바라보았다.
"끄윽! 아미타불...... 어쩌다 다 떨어진 곤룡포 하나 주워입고
황족 운운하다니...... 쯧쯧, 부처님이 하품하실 일이지."
불영치마가 트림을 토하며 내뱉은 한 마디에 우문창의 안색은 완
전히 똥빛이 되고 말았다.
꽝!
그는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빌어먹을 쌍놈의 종자들! 내 다시는 이곳에 오나 봐라. 다시 온
다면 내 성을 갈아버리겠다!"
이어 그는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소절풍마는 끌끌 혀를 찼다.
"원 별 거지같은 놈 같으니, 저러면서도 매일 찾아오니......."
이어 그는 독심광의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저 놈은 그 동안 몇 번이나 성을 갈았을까?"
독심광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아마 대충 계산해도 천 번은 넘을 거야."
"지난번 이름이 서문창이었나 독고창이었나?"
"알게 뭐야?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게 저 놈의 성인데......."
"와하하하......."
"큭큭큭......."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때 하교홍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우문숙부님께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독심광의는 손을 내저었다.
"신경쓸 것 없다. 원래 저 놈은 능글맞기로 유명한 놈이니 곧 잊
을 것이다."
화교홍은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우문숙부님을 보니 요즘 천섬검환경(天閃劍幻經)에 굉장히 심혈
을 기울이는 것 같았어요. 만약 그것을 연마하신다면 네 분 숙부
님을 절대 그냥두지 않을 거예요."
불영치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느긋하게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불가피한 사정으로 천일연공이 잠시 중단되었지
만 내일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것만 성공하면 그까짓 천섬검
환경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 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절풍마의 콧방귀가 터져 나왔다.
"흥! 그 따위 천일연공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건곤(乾坤)의
정기를 모조리 흡수해 수만 갑자의 공력을 얻게되면 고금 최고의
강자(强者)가 될 테니까......."
독심광의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흥! 말짱 개수작들이다. 그것들은 내가 보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눈꼽만큼도 없다. 허나 내가 재배한 일만 뿌리의 만년성형하수오
를 이용하면 문제는 달라지지...... 수만 갑자의 내공을 거뜬히
얻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으니까."
곧장 헌원패의 냉소가 터져 나왔다.
"미친소리! 그 놈의 만년성형하수오인지 썩은 무우인지는 아무리
먹어도 내공증진은 커녕 배탈만 나더라."
그 말에 독심광의의 눈썹이 칼끝처럼 곤두섰다.
"만년성형하수오를 썩은 무우라고?"
"아니란 말이냐?"
순간 독심광의의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이 치솟았다.
"이 원숭이같은 놈! 네놈은 그 동안 몇 뿌리나 훔쳐갔느냐?"
헌원패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궁금하면 네가 직접 가서 세어봐라."
"으...... 이 육시랄 놈!"
독심광의는 당장 헌원패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중얼거렸다.
"흐흐흐......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사라옥정
(沙羅玉鼎)의 비밀을 푸는 것 뿐이지......."
"사라옥정?"
독심광의의 눈이 커졌다.
다음 순간, 그는 배꼽을 움켜쥐며 미친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와핫핫핫...... 네놈은 아직도 그 시커먼 가마솥을 사라옥정이라
고 부르느냐?"
헌원패는 문득 엄숙하게 말했다.
"솥을 보는 데는 천하제일의 요리사인 이 헌원나으리의 안목을 능
가할 자가 없다. 단언컨대 그것은 분명히 사라옥정이다."
독심광의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그래 잘 보관했다가 자손만대까지 가보로 물려주도록 해
라."
그들의 설왕설래는 도무지 끝이 없었다.
화제거리는 주로 상대를 헐뜯고 자신이 최고임을 과시하는 이야기
뿐이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문득 소절풍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식구가 한 명 더 늘었으니 식량문제를 어떡한단 말이냐?"
그 말에 헌원패가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 마라. 이 헌원나으리가 공평하게 분배해줄 테니까."
소절풍마는 눈썹을 찌푸렸다.
"결국 우리가 먹는 양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 보아하니 저 놈도
꽤나 먹게 생겼는데......."
"줄면 어떠냐? 자고로 인간이란 남을 도울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복을 받는 법이니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심광의가 동감의 뜻을 나타냈다.
"암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 소형제만큼은 무조건 환영이
네."
아부의 결과,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때 시종 침묵하고 있던 혁련소천이 의혹어린 표정으로 입을 떼
었다.
"저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
"......?"
광천오제와 화교홍은 일제히 그를 주시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약간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다섯 분께서는 무척 오래 전에 이곳에 오신 모양입니다만 어째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영호공자!"
화교홍의 입에서 급작스런 대경성이 터졌다.
"......?"
혁련소천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헌데 고개를 돌리다 말고 그는 보았다.
불영치마 등 사 인(四人)의 표정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을......
그 순간 그들의 표정에서 광기(狂氣)나 장난기, 웃음기 따위는 눈
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모습에 혁련소천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후후...... 제대로 정곡을 찌른 모양이군!'
허나 겉으로는 더욱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갑자기......."
그 순간 소절풍마의 입술 사이로 신음같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왜......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지 않느냐고......?"
불영치마가 안면을 씰룩거리며 말을 받았다.
"빌어먹을타불...... 천하인은 말할 테지...... 광천오제는 세상
사의 더러움이 싫어 이 죽령도에 살고 있다고......."
소절풍마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미친 소리지. 정신이 돌지 않았다면 멀쩡한 놈이 미쳤다고 이런
곳에 살아? 외롭고...... 쓸쓸하고...... 아무리 둘러봐도 바다뿐
인 이곳에......."
온통 수염으로 뒤덮인 헌원패의 얼굴에 한 줄기 황량한 미소가 떠
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젠장할...... 한정된 음식, 맛대가리 없는 요리...... 이젠 몸서
리쳐지도록 지겹다. 누가 누가...... 이런 곳에 살고 싶겠는가?"
독심광의 역시 삭막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허나 떠날 수가 없어...... 우리는 결코 이 저주의
섬을 떠날 수가 없단 말이다."
헌원패의 입에서 다시 메마른 잔소가 터져 나왔다.
"ㅋㅋ...... 훗날 억겁의 세월이 흘러 이 죽령도가 해저로 잠긴다
면...... 우리의 혼(魂) 정도는 떠날 수 있겠지."
소절풍마의 입가에서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후훗...... 우라질 놈의 섬, 하루종일 서로 싸우고 뒤쫓고......
제정신으론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섬이야."
혁련소천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져 갔다.
본 것이다.
소절풍마의 웃는 두 눈에 뿌옇게 피어오른 슬픔의 안개를......
헌원패의 이글거리는 두 눈에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는 저주
를.......
독심광의의 꽉 쥔 주먹에서 칼날처럼 솟아 나오는 무서운 살기
를.......
그리고 불영치마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서리서리 뻗쳐 나오는 가
공할 원한을.......
혁련소천은 눈썹을 모았다.
'무슨 일인가? 이들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휘이이잉......
문득 어둠을 실은 야풍(夜風) 한 줄기가 창문 틈새로 스산하게 스
며들어 왔다.
②
"빌어먹을 놈의 달(月)! 네놈은 뭐가 그리 좋아 매일 웃기만 하
냐?"
만상노군 우문창은 한 벼랑끝에 우뚝 서서 야공(夜空)에 떠 있는
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생 오라비의 허연 엉덩짝 같은 놈...... 발로 차서 그냥 동해
로 날려 버리고 싶은 놈!"
이 밤에 떠오른 달은 휘황한 만월(滿月)이었다.
홀로 미친 듯이 떠들어대던 우문창의 두 눈이 깊은 슬픔에 잠겨
갔다.
"벽상...... 보고 싶구료.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소?"
문득 둥근 만월 속에 온유하고 다정다감해 보이는 한 미인의 얼굴
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우문창의 눈가에 일순 엷은 물기가 배어 나왔다.
"벽상...... 오늘따라 유난히 울적하구료. 네 친구와 다투었기 때
문도 아니고 달이 밝기 때문도 아니오."
그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아...... 모르겠소. 실타래처럼 엉킨 나의 마음...... 그저 울
적할 뿐이오."
"벽상, 그대는 알 것이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는
지......."
우문창의 눈빛이 점점 더 깊숙이 침잠되어 갔다.
"벌써 육십 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러갔소."
"육십 년 전...... 그 저주의 언약...... 허나 더 이상 문제시하지 않겠소."
그는 두 손을 지그시 말아쥐었다.
"천심검환결의 마지막 부분...... 그것만 터득하면 나는 그 즉시
이 죽령도를 떠날 것이오."
불끈!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까짓 명예를 건 약속!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이지 않겠소. 그
냥...... 그냥 떠날 것이오."
― 명예를 건 약속!
"당연히 네 명의 친구가 막겠지. 허나 나는 갈 것이오. 막으
면...... 어쩔 수 없소. 아무도 내 앞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오."
다음 순간, 그는 두 주먹을 번쩍 치켜들며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이 빌어먹을 하늘놈아! 나 만상노군 우문창은 이미 육십 년 동안
이곳에서 썩었단 말이다!"
소리치는 그의 두 눈은 어느새 광기로인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
다.
"네놈도 양심이 있으면 말해봐라.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이 코딱지
만한 섬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냐?"
"뭐? 이 죽령도가 해저로 가라앉아야만 떠날 수 있다고? 으하하
하...... 그 따위 개소리는 똥개한테나 지껄여라!"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두 주먹을 미친 듯이 허공에 휘둘렀다.
"달(月)놈! 하늘놈! 웃지 마라! 이 기생오라비같은 자식아!"
광인(狂人)!
그 순간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미친 사람의 그것이었다.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는 우문창의 저 얼굴을 보라!
"이 개같은 놈의 하늘아! 달아!"
만상노군 우문창......
그는 지금 울고 있었다.
③
달빛은 이곳에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한 거대한 나무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앉아 있었다.
입에 문 것은 오죽(烏竹)으로 만든 피리, 그 피리에서는 지금 비
할 데 없이 구슬픈 곡조가 처량하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삘릴리...... 삘리......
마치 정인(情人)을 잃은 상심녀(傷心女)의 애한을 노래하듯, 흐느
끼듯 흘러 나오는 곡조에는 깊고 진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삘릴리...... 삘리......
혁련소천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피리에서 입과 손을 뗄 줄을 몰랐다.
스스로 음률에 도취되었는가?
그의 얼굴에는 이 순간 짙은 우수의 그늘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
돌연 피리소리가 뚝 멎었다.
혁련소천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화교홍이 뒤쪽의 한 바위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은가루처럼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받아서인지 화교홍의 자태는 이
순간 더욱 아름답고 요염해 보였다.
혁련소천이 돌아보자 화교홍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곱게 웃었다.
"정말 훌륭한 피리솜씨예요. 하마터면 나도 울어버릴 뻔했으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혁련소천은 쑥스럽게 웃었다.
"이거...... 화소저가 있는 것도 모르고 내 기분만 내고 있었으니 부끄럽소이다."
화교홍은 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공자님의 피리솜씨는 저로선 처음 듣는 선음(仙音)이
었어요. 정말 훌륭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천천히 혁련소천을 향해 걸음을 옮겨왔다.
"영호풍, 영호공자님이라 하셨죠?"
"그렇소이다만......."
"기뻐요."
'음?'
뜻밖의 말에 혁련소천은 움찔했다.
"무슨 말씀이오?"
"교홍은......."
화교홍은 혁련소천의 옆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오 년 전 표류 끝에 이곳에 당도하여 무척 외롭게 지냈어요. 그
러다가 이렇게 영호공자님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뻐요."
혁련소천은 싱긋 웃었다.
"나도 이런 곳에서 화소저같은 미인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하오."
화교홍의 눈이 커졌다.
"그 말씀 정말인가요?"
"진심이오."
화교홍의 눈에 금세 이슬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화교홍...... 이곳에 온 이래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이에요."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교홍은 그런 그의 모습을 눈부신 듯 바라보더니 문득 두 눈을 사르르 내리깔았다.
"저...... 한 가지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요."
화교홍은 홍조를 띠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자님이 뭐라고 하실 것 같아요."
혁련소천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주겠소."
화교홍은 그 말에 용기를 얻었음인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저...... 공자님을......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오라버니?"
그가 되묻자 화교홍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군요."
혁련소천은 재차 움찔하며 황망히 말했다.
"천만에...... 화소저는 오해하지 마시오. 너무도 뜻밖의 말이었
는지라 잠시 당황해서 그랬을 뿐이니까."
그 말에 화교홍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하오면......."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었다.
"사실...... 나도 화소저같은 미인 동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진작부터 생각했었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한 말이었다.
"오라버니......."
화교홍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와락 혁련소천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뭉클......
싱싱하고 탄력 있는 여체(女體)의 감촉이 순식간에 혁련소천의 전
신으로 와닿았다.
'팔자에도 없는 누이동생이 생겼군!'
혁련소천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여인 특유의 체향(體香)과 향긋한 머리내음이 그의 후각을 자극시켰다.
'흐흠.......'
혁련소천은 순간 이상한 충동이 불끈 치밀었으나 이내 지워버렸다.
그는 화교홍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교홍!"
화교홍은 아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무슨......."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
화교홍은 배시시 웃었다.
"말씀해 보세요."
혁련소천은 잠시 망설이더니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죽령도에 살고 있는 오 인(五人)은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곳
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오?"
"......!"
화교홍의 눈에 짧은 섬광이 스쳤다.
그것은 너무도 빨라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허나, 그녀는 몰랐다.
자신을 마주 대하고 있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벼락치는 순간을 만분지 일로 쪼개는 빠르기의 변화조차 혁련소천
의 이목을 벗어날 수 없음을.
'그랬었군. 너 역시 뭔가 있는 여자였어.......'
― 뭔가 있는 여자!
혁련소천의 얼굴 위로 은싸라기같은 달빛이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