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권 제42장 (42/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42장 도광(刀狂)과 만상노군(萬像老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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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여기저기 음식  찌꺼기들이 버려져 있어  지저분하기 이를데 없는

  부엌이었다. 그 부엌의  한쪽에 놓인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무엇인

  가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푹푹 삶아지고 있었다.

  타다다닥...... 타다닥......

  도마 위의 고깃덩어리가 잘게 다져지는 소리였다.

  칼질을 하는 사람은 키가 근 구 척에 가까운 흑의노인이었다.

  머리는 수세미처럼 제멋대로 헝클어졌고, 덥수룩한 수염과 구레나

  룻은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어 마치  거대한 성성이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도광(刀狂) 헌원패!

  역시 광천오제 중 일 인(一人)인 그였다.

  타다다닥...... 타다다다.......

  헌원패는 무지막지하게 생긴 칼로 고깃덩어리를 다지며 연신 콧노

  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헌데, 그 콧노래라는 것이 말이 좋아 노래지 밤부엉이가 울부짖는

  듯한 지극히 듣기 거북한 것이었다.

  헌원패는 문득 칼질을 멈추고 가마솥의 뚜껑을 활짝 열어 젖혔다.

  슈와......

  축축하고 뜨거운  수증기가 구름처럼 피어  올라 헌원패의 얼굴을

  뒤덮었다.

  가마솥에는 커다란 무우가 한꺼번에 십여 개나 삶아지고 있었다.

  헌원패는 칼로 무우 하나를 푹 찔러 보았다.

  칼은 무우 깊숙이 쑤셔 박혔다.

  "으헛헛헛...... 완전히 익었군. 됐어, 됐어."

  헌원패는 흡족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칼을 뽑았다.

  "흐흐흐...... 안가놈......  뭐, 이게  만년성형하수오가 어쩌구

  어째?"

  그의 얼굴에 문득 경멸의 기색이 나타났다.

  "빌어먹을 놈! 미쳐도 제대로 미쳤어. 이 위대한 요리사 헌원나으

  리 앞에서 사기를 치려 하다니......!"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그는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칠십 년 전......  체구가 조금만 아담했어도 지금쯤 어전(御殿)

  요리사가 되어 위세당당할 이 어른이거늘......."

  그는 칼을 쥔 손에 침을 탁 뱉으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어디 어울릴  사람이 없어 그  따위 미친  놈들과 어울리게 됐는

  지...... 아무튼 그때부터 이 헌원패 일생일대의 인생비극은 시작

  된거야......."

  타다다닥...... 타다다......

  헌원패는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왕년에  팔주구황(八州九荒) 오해사호(五海四湖)를  주름잡던 이

  헌원패의 찬란한 힘을 보라!"

  무슨 말인가?

  중원천지의 지세가 제멋대로 바뀌고 있지 않은가!

  "아아......! 이토록 위대한 체격과 준수한 얼굴...... 이렇게 눈

  부신 도법(刀法)을  구사하는 자, 이  헌원패 외에  또 누가 있느

  냐?"

  헌원패는 이 순간 자기도취라는 이상한 꿈에 젖어 있는 것이었다.

  슈슈슈슉! 슉! 슉!

  칼질은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빨라졌다.

  "수많은 미녀들이 사랑을 갈구하며 애타게 나를 찾았으나 나는 그

  모든 것을 늠연히 뿌리쳤다!"

  타다다다다...... 타다다다......

  고깃덩어리는 이미 잘게 다져지다  못해 아예 가루로 변해가고 있

  었다.

  "천하의 그 어떤 고수도  내 얼굴과 천하무쌍의 도법 앞에선 그대

  로 육체복지(六體伏地)하지 않은 자 없었으니......."

  육체(六體)?

  모르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어느 한 부분을 포함해서 하는 말인

  가?

  돌연 헌원패는 칼질을 뚝 멈췄다.

  이어 그는 광기(狂氣) 감도는  눈으로 천장을 우러르며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오오! 후세 사가(史家)들은 기록하라! 무림사의 일장(一章)을 찬

  란힌 빛낸 이 헌원패의 찬란한 업적을......!"

  이쯤되면 자아도취가 아니라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큭큭......."

  참다 못해 터져 나오는  듯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부엌문 쪽에서

  흘러 나왔다.

  "......!"

  순간 자아도취경에 빠져 꿈  속을 헤매는 듯하던 헌원패의 표정이

  홱 일그러졌다.

  "이건......  나 헌원패를  비웃는......  이건  나 헌원패에  대

  한...... 일생일대의 모욕이다!"

  그는 이를 뿌드득 갈며  중얼거리더니 문쪽을 돌아보며 버럭 외쳤

  다.

  "어떤 시러배 잡종놈의 자식이 힘차게 터뜨린 콧방귀냐?"

  그는 칼을 도마  위에 푹 꽂으며 눈에서  불길같은 안광을 쏟아냈

  다.

  "누구냐? 빤질빤질한 중대가리냐? 아니면 미친 돌팔이 놈이냐?"

  그러나 문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헌원패는 소매춤을 걷어붙이며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좋아,  좋아!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친히  네놈의  모가지

  를......."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 인영이 문 뒤에서 나타났다.

  슥......

  그는 다름아닌 혁련소천이었다.

  헌원패의 두 눈이 의아한 듯 휘둥그레졌다.

  "응? 언제부터 이 죽령도에 못 보던 인간이 늘어났지?"

  이어 그는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혁련소천은 공손히 대답했다.

  "소생은 영호풍이라 합니다."

  "네놈이 조금 전 이 어른신네를 비웃는 힘찬 콧방귀를 날렸느냐?"

  혁련소천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니긴 뭐가......."

  헌원패는 눈을 부릅뜨며 분성을 터뜨리려 했으나 혁련소천이 조금

  빨랐다.

  "원래 저는 풍랑을 만나 이곳에 도착하여 헤매던 중 평생 처음 맡

  아보는 향긋한 음식냄새에 도취되어  저도 모르게 이곳까지 온 것

  입니다."

  "그, 그렇다면 콧방귀는......?"

  "누구든 좋은 냄새를 맡으면 코를 벌름거리며 킁킁거리는 것이 아

  니겠습니까?"

  헌원패는 순간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는 가슴을 쭉 펴며 자못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험험! 그래...... 그 냄새는  이 어르신네가 만들던 음식에서 풍

  겨 나온 것이다."

  빌어먹을......

  고작해야 무우 삶는 냄새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향긋하겠는가?

  혁련소천은 더욱 겸손하게 말했다.

  "음식냄새 때문에  무례히 이 땅을 밟았고  또 어르신네의 위풍에

  탄성을 올린 죄 사과드립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죄도 있는가?

  "으하하하핫......."

  헌원패는 한 차례 앙천광소를  터뜨린 후 혁련소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젊은 친구가 보기보다 소심하군.  이 사람아, 세상에 그런 게 무

  슨 죄가 되겠나?"

  "하지만......."

  "조금도 걱정 말게. 만약  누군가 자네를 욕한다면 이 헌원나으리

  가 그 놈의 아가리를 찢어버릴 테니까!"

  혁련소천은 그제야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다소 안심입니다."

  "다소는 무슨  다소, 염려 꽉 붙들어  매놓게. 그건 그렇고......

  자네 무척 배가 고픈 모양이던데......?"

  "그렇습니다."

  그 말에 헌원패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렇다면 자네를 위해 특별한 요리를 해야겠군."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불쑥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허...... 원숭이 놈이 웬일인가?  내가 오는 것을 알고 특별

  한 요리를 다 만들겠다니......."

  그 순간 헌원패의 안색이 싹 굳어졌다.

  "저 늙은 놈이 또......?"

  "흐흐흐...... 원숭아, 내 그냥  지나치려 했다만 네가 특별한 요

  리를 만들어 준다는데 어찌 예의도 없이 그냥 갈 수 있겠느냐? 나

  만 나쁜 놈이 되게스리......."

  괴소와 함께 한 인영이 부엌으로 쑥 들어왔다.

  우문창.

  낡은 곤룡포에 빛바랜 황금관을 쓴 바로 그였다.

  헌원패는 안면을  씰룩이며 그를 쏘아보더니  문득 음침한 괴소를

  발했다.

  "흐흐흐...... 그래. 그냥 가면  아주 나쁜 놈이 되지. 내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마."

  우문창은 어깨를 들썩이며 껄껄 대소했다.

  "으허허헛...... 오늘 또 원숭이 덕분에 이 만상노군(萬像老君)이

  포식을 하게 생겼구나...... 으허허......."

  혁련소천의 눈에 야릇한 이채가 섬광처럼 스쳐갔다.

  '만상노군! 광천오제의 첫째......!'

  그는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광천오제와 화교홍이란 소녀...... 이것으로 죽령도의 모든 사람

  들을 다 만난 셈이다!'

  허나, 그는 만상노군  우문창과 헌원패와의 관계가 어쩐지 석연치

  않음을 직감했다.

  '이상하다. 저들의 웃음과 대화  속에는 어쩐지 상대에 대한 적개

  심이 충만한 듯하니.......'

  문득 혁련소천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후후...... 어쨌든 좋다. 어쩐지...... 이번 일은 잘 풀릴 것 같

  기도 하다!'

  왜?

  혁련소천은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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