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40장 죽영도(竹靈島)의 광천오제(狂天五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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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잔잔한 파도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드넓은 백사장 위에 잘게
부서져 내린다.
은빛 갈매기들이 푸르디푸른 창공을 마음껏 누비고 있는 이곳,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한적한 분위기의 낙원같은 한 섬(島)이었
다.
헌데 지금 이곳엔 언제부턴지 전신이 피투성이인 한 사람이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꽉 닫힌 두 눈,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
뜻밖에도 그는 바로 혁련소천이 아닌가!
멀리서 보기에 그는 영락없이 죽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잔잔한 숨소리와 가슴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기복은 그의 생(生)이 아직 다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엄청난 대폭발과 해일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니 이는 실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련소천, 그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혁련소천의 몸에 경미한 움직임이 일
었다.
잠시 후 혁련소천은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나는 사람처럼 부스스 눈
을 떴다.
먼저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멋지게 수놓으며 날아가는
갈매기 떼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곧이어 혁련소천은 좌우로 눈을 빠르게 굴려보았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이었다.
섬의 반면은 날카로운 기암절벽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반면은 은
빛 백사장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백사장이 끝나는 저쪽 기슭에는 울창한 죽림(竹林)이 빽빽
이 우거져 있었다.
죽림을 보는 순간 혁련소천의 얼굴에 한 줄기 햇살같은 미소가 번
져 나왔다.
'죽령도(竹靈島)......!'
죽령도!
'후후후...... 어쨌든 이곳에 도착하기는 했군. 제갈천뇌는 매우
정확하게 짚었던 게야.......'
― 배를 띄운 다음 날 저녁, 해일을 동반한 엄청난 폭풍이 휘몰아
칠 것입니다. 그 해일의 흐름은 북서방향으로 죽령도를 향할 것인
즉, 대종사께서 그 흐름을 같이 타신다면 분명히 죽령도의 동쪽
백사장에 당도하시게 될 것입니다!
'허나...... 인간 한계에 대한 십관의 도전 중 수관(水關)과 화관
(火關)을 거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우연히 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일만 근 화약의 폭발은 나 자신도 예상 못했던 일......! 장손중
박이 준 적룡화의가 없었다면.......'
그는 쓰디쓴 고소를 떠올렸다.
'후후...... 하마터면 전신이 걸레쪽처럼 찢겨져 고기밥이 될 뻔
했구나!'
이어 그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헌데... 대체 어디서 계획의 차질이 생겼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접어두자. 우선 이곳에서 할 일은 광천오제를 만나는 것이
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욱......."
돌연 한 소리 신음성이 그의 입에서 절로 흘러 나왔다.
살갗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바늘끝처럼 찔러
왔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아무리 생각해도 멋지게 당했어......!'
혁련소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똑바로 몸을 세웠다.
이어 그는 죽림이 있는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떼놓았다.
"으음......!"
움직이기 시작하자 섬뜩한 고통이 전신에서 느껴져 왔다.
허나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계속해서 느릿하게 걸음을 떼
놓았다.
죽림(竹林)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
다.
어른의 허리 굵기만한 청죽(靑竹), 묵죽(墨竹), 오죽(烏竹), 자죽
(紫竹)들.......
어느새 혁련소천은 죽립 사이로 난 좁은 소로(小路) 앞에 서 있었
다.
그는 소로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놓았다.
그러나 미처 몇 걸음도 떼놓기 전에 그는 우뚝 멈춰섰다.
'저건......?'
그의 눈에 한 줄기 이채가 떠올랐다.
우측의 한 청죽(靑竹)의 겉면에 새겨진 이상한 형상의 문자를 발
견한 것이었다.
<마하루 찬탈야.......>
"마하루 찬탈야?"
혁련소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범문(梵文)이 아닌가? 헌데 이런 곳에 어찌 저런 범문이......?"
그러면서 그는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누가 썼을까? 광천오제가 이 정도로 유식하지는 못할 텐
데.......'
찰나간, 혁련소천의 시선이 좌측 죽림을 빠르게 스쳐갔다.
이어 혁련소천은 갑자기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짐짓 당혹성의 터
뜨렸다.
"아아...... 아무리 풍랑에 휩쓸렸다고 어찌 이런 곳으로 왔단 말
인가......."
독백이라 하기엔 약간 큰 음성이었다.
"만약...... 이곳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라면 정말 큰일이구나......!"
이어 혁련소천은 비틀거리면서 소로 깊숙이 멀어져 갔다.
그때였다.
돌연 한 인영이 소로의 좌측 죽림에서 솟아 나왔다.
그는 두 눈이 무섭게 번쩍거리고 텁수룩한 수염에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인이었다.
일신에는 다 떨어진 곤룡포를 걸쳤고 머리에는 빛바랜 황금관을
쓰고 있었다.
예전에는 무척 화려한 의관(衣冠)인 듯했으나 지금은 지저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리고 노인의 등 뒤에는 하나의 커다란 상자가 끈으로 매어져 있
었다.
"분명히 마하루 탄찰야라고 했다......?"
노인은 어떤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혁련소천이 멀어져 간
방향을 응시했다.
"진정 뜻밖이구나. 한낱 애송이가 범문을 알고 있다니......."
그의 입언저리에 기이한 미소가 배어 나왔다.
"이렇게 되면...... 의외로 일이 무척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는 득의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나 우문창(宇門蒼)이 천섬검환경(天閃劍幻經)을 먼저
해득하든지 아니면 그 미친 늙은이들이 사라옥정의 비밀을 먼저
푸는지가 승부의 관건이었거늘......."
문득 그의 눈에서 음침한 안광이 흘러 나왔다.
"흐흐흐...... 그 꼬마계집은 대단히 영악하지. 어디 이번 일을
맡겨 볼까?"
꼬마계집......?
순간 노인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엔 한동안 괴이한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②
혁련소천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계속 죽림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
다.
허나 아무리 살펴봐도 사람은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괴이하구나. 광천오제가 이곳에 살고 있다면 분명 인적이 있어야
하거늘.......'
인적은 고사하고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
다.
혁련소천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쯤 더 갔을까?
혁련소천은 흠칫하며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전면의 커다란 묵죽(墨竹)에 한 사람이 발목을 밧줄에 묶인 채 거
꾸로 매달려 있지 않은가!
헌데 하고 있는 모습도 그랬지만 그 사람의 차림새란 도무지 괴이
하기 짝이 없었다.
반들반들한 민대머리에 승포를 걸친 것으로 보아 중인 듯했다.
허나 그 승포라는 것도 울긋불긋 화려한 것이 도대체 중들의 그것
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작 기괴한 것은 그의 행색만이 아니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칼 한 자루가 그의 머리에 닿을락말락하면서 바
닥에 거꾸로 박혀 있는 것이다.
"끄응...... 끙......!"
그는 민대머리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힘겨운 신음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때 혁련소천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이 자의 모습을 보건데... 광천오제 중 한 명인 불영치마(佛影痴
魔)가 분명하다!'
불영치마―!
'광천오제... 드디어 나타났구나!'
혁련소천은 내심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헌데... 저 자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혁련소천은 괴승, 즉 불영치마의 모습에 의혹을 금치 못했다.
허나 그는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대경성을 터뜨렸다.
"아니? 천하의 어떤 못된 사람이 스님을 이런 꼴로 만들었단 말인
가?"
그러면서 그는 황망히 불영치마에게 다가갔다.
"스님! 제가 구해 드릴 테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어 바닥의 검을 치우기 위해 막 허리를 굽히려는 순간 돌연 불
영치마의 안색이 급변하며 눈이 찢어질 듯 휩떠졌다.
"아...... 아미타...... 타불! 어떤 찢어죽일 시러배잡배놈이 이
부처님의 천일연공(千日鍊功)을 방해하느냐?"
혁련소천은 멈칫했다.
'과연 광천오제답게 험악한 말투구나. 헌데...... 천일연공이라
니......?'
그는 반쯤 허리를 굽힌 엉거주춤한 자세로 불영치마를 쳐다보았
다.
"스님께서는 지금......."
순간 불영치마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도끼눈을 뜨며 버럭
고함쳤다.
"이 우라질 중생꼬마야! 어서 썩 물러가라! 만약 네놈 때문에 노
납의 천일연공이 실패한다면 네놈을 닭모가지처럼 비틀어 죽여 버
리겠다!"
혁련소천은 어이가 없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그나저나 대체 무슨 무공을 이 따위로
연마한단 말인가?'
천하무공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는 혁련소천이었으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밖의 괴사였다.
이때 불영치마는 문득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괴이한 음
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계집아이가 노납에게 말했
다. 이렇게 천 일(千日)만 견디면 천하무쌍의 신공(神功)을 완성
하게 될 것이라고......."
'맙소사!'
혁련소천은 기가 꽉 막혔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괴사는 맙소사 중의 맙소사였다.
문득 불영치마는 혁련소천의 전신을 음침한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천하에서 가장 어리석은 중생꼬마야, 너는 어쩌다가 이곳에 들어
왔느냐?"
혁련소천은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파도에 휩쓸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곳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불영치마는 입꼬리를 괴이하게 비틀었다.
"빌어먹을...... 기왕이면 물 속에서 뒈져 고기들 배나 채워주지
왜 살아 와서 이 부처님의 좋은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혁련소천은 진정 어이가 없었다.
땡초도 땡초나름!
이건 칼만 안 들었지 피에 굶주린 마두(魔頭)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때 불영치마는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침통하게 중얼거렸
다.
"아아! 천일연공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과거
석존(釋尊)께서 성불(成佛)하시기 전까지의 고통을 노납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도다......!"
이럴 땐 멀쩡한 고승(高僧)의 모습 그대로였다.
혁련소천은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스님께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그렇게 계셔야 합니까?"
불영치마는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구백구십구 일(九百九十九日) 하고도 열한 시진이 더 남았
다.
혁련소천은 순간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그 천일연공이란 것을 시작한 것은 불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영치마의 불벼락같은 호통이 터졌다.
"이 놈의 새끼야! 자꾸 묻지 마라! 한 시진 있는 것도 이렇게 힘
들고 배고픈데 네놈까지 깐죽거리니 정말 괴롭고 고통스럽다!"
이어 그는 두 눈을 꽉 감아버렸다.
반들반들한 민대머리에서는 계속 비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
다.
그런 모습에 혁련소천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겨우 한 시진 동안 이러고 있었으면서 석존의 성불이 어떻다
고......?'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불영치마답군. 그렇다면 이제 다른 네 명을 찾아봐야겠다!'
내심 생각하며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스님,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불영치마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콩알만한 땀방울만 뚝뚝 흘릴뿐 아
무 말도 없었다.
(쯧쯧...... 도대체 누가 이 따위 황당한 연공법을 말했는지 모르
겠으나 그것을 믿고 따르는 불영치마가 더욱 한심하군!)
혁련소천은 내심 혀를 차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어 막 걸음을 떼놓는 순간,
"끄응...... 끙......."
마치 심한 변비에 걸린 사람이 한 차례 일(?)을 보기 위해 끙끙거
릴 때 이런 신음을 발하던가!
불영치마의 신음은 처음보다 훨씬 무겁고 고통스럽게 들렸다.
혁련소천의 뇌리에 언뜻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광천오제는 정말 미친 자들이 아닐까?'
저멀리 그지없이 맑고 투명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소로의 끝이
혁련소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광자(狂者)들과의 만남이 시작된 이곳은 동해의 죽령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