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34장 우(雨) 주(酒) 운명(運命)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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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겨울이 물러갔음을 알리는 봄비(春雨)가 차갑게 얼어붙었던 빙토
(氷土)를 촉촉히 적셔주고 있었다.
대하루(大河樓).
군마천 동북쪽에 위치한 육 층(六層)의 웅장화려한 누각(樓閣)인
이곳은 군마천의 인물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일종의 주루(酒樓)였다.
밑으로는 푸르디 푸른 계류(溪流)가 흐르고 있었고, 뒤로는 수려
한 산이 배경을 이루고 있어 한 폭의 그림같은 정취를 풍겨내고
있었다.
봄비(春雨)는 이곳에도 추적추적 뿌려지고 있었다.
대하루의 삼 층(三層)은 궂은 날씨 탓인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
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와하하하......."
"킬킬킬...... 그 계집년은 글쎄 어찌나 아랫도리가 킬킬킬......."
호탕한 웃음소리......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음담패설.......
시끄럽고 소란스럽기가 강호의 여느 주루에 못지 않았다.
헌데 그런 와중에서 수 시진이 지나도록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인
물이 있었다.
마치 술(酒)하고 풀지 못할 원한이라도 맺은 듯 미친 듯이 술만
들이키는 인물, 그는 한 쪽 창가 구석진 탁자에 자리한 흑의여인
(黑衣女人)이었다.
도대체 인간의 얼굴이 어찌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아름다움이 지나쳐 차라리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전율을 불
러 일으켰다.
얼음처럼 시리고 투명해 보이는 얼굴에 붉디 붉은 입술, 깎아 빚
은 듯 오똑 솟은 콧날과 보는 이의 심금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만
큼 깊은 우수에 잠긴 저 눈(眼).......
헌데 그 눈 어둑한 곳에는 어쩐지 퇴폐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게다가 허리까지 아무렇게나 치렁치렁 늘어뜨린 흑발(黑髮)과 이
마에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칼은 뺨을 지나 입술에까지 물려 있
어 더욱 퇴폐적인 인상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막 피어나는 한 송이 붉고 현란한 요기스런 꽃의 아
름다움이 이러할까?
여인의 탁자에 놓인 술병은 열다섯, 모두 독하기로 소문난 사천특
산의 죽엽청이 담긴 술병들이었다.
허나 그 중 대여섯 개는 이미 바닥을 냈다는 듯 거꾸로 세워져 있
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선 일점의 취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체로 술이란 마실수록 눈빛이 충혈되거나 거슴츠레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허나 어찌된 판인지 이 여인은 마시면 마실수록 눈빛이 맑아지고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이었다.
일곱 번째의 술병이 거꾸로 세워졌을 때, 여인의 눈에 서려 있던
음울하고 기괴한 광채는 더욱 그 농도가 짙어져 있었다.
여인은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에는 여전히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보았기 때문인가?
문득 여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소리없이 피어 올랐다.
허나 그 미소의 사악한 아름다움을 대체 무슨 말로 형용할 수 있
을 텐가?
그 미소는 피어 올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내 그녀의 얼굴에서 사
라졌다.
등 뒤로부터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중자작(雨中自酌)을 즐기는 미녀라...... 매우 운치가 있군."
웃음이 섞인 음성이 그녀의 뒤로부터 흘러 나왔다.
허나 흑의여인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여전히 비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누군가 털썩 주저앉았다.
낡고 허름한 백의, 왼쪽 옆구리에 책 한 권을 끼고 있는 영락없는
서생 모습의 미소년이었다.
책의 이름은 서천책략, 책의 주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혁련소천
바로 그였다.
그는 앉자마자 책을 탁자에 올려 놓으며 버럭 큰소리로 외쳤다.
"자, 사해(四海)가 모두 친구라 했는데...... 아름다운 낭자, 같
이 합석 좀 합시다."
이미 어디서 한 잔 걸치고 왔는 듯, 불그레한 얼굴에 혀까지 약간
꼬부라져 있었다.
흑의여인은 그제야 혁련소천에게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혁련소천은 몽롱한 눈을 더욱 거슴츠레하게 떴다.
'정말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구나! 저런 사람이 남자라니......!'
그는 내심 빠르게 염두를 굴린 후 거듭 혀꼬부라진 음성을 발했
다.
"좋아...... 좋아...... 그 정도라면 과히...... 보기 싫은 정도
는 아니군. 한 잔 같이할 자격이...... 있어......."
순간 흑의여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음울하고 착 가라앉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나직하나 듣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공포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음성이었다.
허나 그 말을 들은 혁련소천의 입에선 대뜸 거친 말이 튀어 나왔다.
"빌어먹을...... 생긴 건 아름다운 입이건만 더럽게 험한 말이 튀
어 나오는군. 기분 나빠서 한 잔 더 해야겠다."
이어 그는 술병 하나를 집어 거침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이 드러났다.
혁련소천은 손등으로 입가를 쓱 훔치며 거듭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술맛이 강아지 오줌 맛하고 비슷하
니......."
그러면서 흑의여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반쯤 창쪽으로 돌린 채 옆눈으로 혁련소천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란 실로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혁련소천은 헤벌쭉 웃으며 헤픈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이제보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정신이 흐물흐물
해질 만큼 아름다운 계집이군. 흐흐흐......."
순간 흑의여인의 눈 속에 무서운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혁련소천은 전혀 모르는 척 창 밖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
다.
부슬부슬 흘러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는 순간 혁련소천의 얼굴에 짙
은 우수의 빛이 드리워졌다.
"빌어먹을...... 저 놈의 비는 뭐가 좋다고 저렇게 청승맞게 내리
는지......."
그는 나직이 투덜거리며 또 한 병의 죽엽청을 집어 들었다.
이어 목젖이 두어 번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이에 술병은 또 바닥
이 났다.
"잘...... 먹는군."
흑의여인의 냉소적인 한 마디가 들려온 건 이때였다.
혁련소천은 술병을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묘하게 비틀었다.
"흣! 이 죽엽청 말인가? 그대같은 계집도 마시는데 나같은 남자가
못 먹는데서야 말도 안 되지, 암......."
그러면서 그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비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는 재차 짙은 우수의 그늘이 드리워졌
다.
순간 흑의여인의 눈가에 야릇한 빛이 스쳐갔다.
"비를...... 좋아하오?"
혁련소천은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좋아하지...... 미치고 환장하리 만큼......."
흑의여인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혁련소천을 똑바
로 직시했다.
"사연이 있다면...... 듣고 싶군."
혁련소천의 시선이 돌연 그녀에게 홱 돌아갔다.
"빌어먹을 계집! 좋지도 않은 남의 과거는 뭐하러 듣겠다는 것이
냐?"
이어 그는 아래층을 향해 목청이 찢어져라 악을 썼다.
"주인장! 야! 빌어먹을 주인놈아!"
피가 나도록 바락바락 악을 쓰자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주
목했다.
허나 그들은 혁련소천을 보자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외면했다.
개중에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이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점소이가 허둥지둥 뛰어 올라왔다.
그는 혁련소천 앞에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넙죽 허리를 숙였다.
"부...... 부르셨습니까?"
혁련소천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가서 죽엽청 열 병만 더 가져와!"
점소이는 입을 딱 벌렸다.
"여...... 열 병씩이나......?"
혁련소천은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아가리에 똥 퍼붓기 전에 냉큼 가져와라! 내 말 알아 듣겠느냐?"
점소이는 사색이 되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네! 네! 즉시......."
이어 그는 도망치듯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혁련소천의 탁자 위엔 열 병의 죽엽청이 놓여졌다.
혁련소천은 그 중 한 병을 삽시간에 비워버렸다.
이어 그는 또 한 병을 집어 흑의여인에게 내밀었다.
"아름다운 계집, 너도 한 잔 해라."
흑의여인은 입가에 순간적으로 기이한 미소가 스쳐갔다.
허나 그녀는 이내 술병을 받아 통째 입 속에 처박았다.
술은 그녀의 목줄기를 타고 거침없이 뱃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빈 병은 자꾸 늘어갔다.
두 사람은 마치 술먹기 시합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한 마디 대화도
없이 미친 듯이 술병을 바꿔갔다.
차츰 혁련소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반면 흑의여인의 안색은 갈수록 창백해지고 눈빛 또한 더욱 맑아
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상대는 일점홍......! 분명히 남자로 알고 있건만.......'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흔들리는 모양이다.
그렇다.
이 여인이 바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일점홍이었다.
빈병은 열 개에서 다시 스무 개로 늘어났다.
스무 개는 금세 서른 개로......
밖에는 어둠을 실은 봄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고 안의 두 사람
은 행여 뒤질세라 술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헌데 어느 한순간이었다.
갑자기 혁련소천은 탁자 위의 빈병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아주 옛날......."
그는 흐릿한 눈으로 일점홍을 응시하며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나는...... 고아라는 운명으로...... 태어났지. 허나...... 그런
나에게도 귀엽고 깜찍한 소녀가 한 명 있었어......."
"......."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나를 무척 따랐지...... 그녀의
부친은 꽤 부자였어...... 나는 그 집의 하인이었고......."
혁련소천은 몽롱한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날...... 내가 신분의 차이란 것을 느끼고 그 집을 뛰쳐나온
그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어......."
"......."
"헌데...... 빌어먹을! 그 계집도 미쳤지...... 글쎄 그게 나를
따라온 거야. 물론 나는 그 사실을 몰랐지......."
"......."
"우흐흐흐...... 그녀는 죽었어...... 미친 년이지, 제가 그 억수
같은 빗속을 사흘이나 걷고도 살아나길 바래? 흐흐흐...... 여덟
살의 귀엽고 깜찍한 계집아이는 그렇게 사라진 거야......."
다음 순간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젠장할...... 저 놈의 비만 없었어도......."
바로 그때였다. 혁련소천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것은......
'그래...... 기억이 난다. 이름이 아금이었어, 빗속에서 웃으면서
죽었지. 젠장할...... 그게 나의 첫사랑이었어.......'
그랬다.
이 이야기는 혁련소천에게 실제로 있었던, 일곱노야를 만나기 전
그가 겪었던 한 토막 서글픈 이야기였던 것이다.
일점홍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슬픈 이야기군. 허나...... 불행한 이야기는 아니오."
혁련소천은 피식 웃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이어 그는 일점홍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때까지 씨부렁거렸는데도 아직 네 이름을 묻지 않았군."
"나의 이름은......."
일점홍이 비를 응시하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일점홍...... 들어본 적이 있소?"
"일점홍?"
혁련소천은 짐짓 눈을 크게 뜨더니 문득 괴상하게 키득거렸다.
"ㅋㅋ! 이거 웃기는 이야기로군. 네가 바로 일점홍이라니......!"
이어 그는 경멸스런 눈길로 일점홍을 쳐다보았다.
"젠장...... 이제 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는 일점홍이 바로 너였군."
"......."
"소문보다 더 심해......! 완전히 속았어. 계집인 줄 알고 꼬시려
했더니 말짱 헛일만 했군."
순간 일점홍의 입언저리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이상하군. 제멋대로 주절거리는 저 자가 어쩐지 밉지가 않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감정의 변화였다.
그것은 혁련소천에게 있었던 과거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비 때문도 아니었으며 술을 마셨기 때문은 더 더욱 아니었다.
알 수 없다!
생전 처음보는 저 자에게 이토록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대체 무엇
이란 말인가.......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이때 혁련소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점홍의 코 앞에 얼굴을 바
짝 들이댔다.
"아무리 봐도 믿어지지 않다. 너...... 진짜 남자냐?"
일점홍은 애매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시험해보고 싶다면...... 응해줄 수도 있소."
"뭐? 응해......? 풋풋......!"
혁련소천이 어이없다는 듯 키득거리자 입 안의 침이 마구 튀어 나
왔다.
"내가...... 남자인 너와 그걸......?"
혁련소천은 일점홍에게 연신 삿대질을 해대더니 돌연 입이 찢어져
라 광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하...... 응해? 와하하하하......."
일점홍은 얼굴에 튀긴 침을 닦으며 조용히 웃기만 했다.
한순간 혁련소천은 광소를 뚝 그치고 벌떡 일어났다.
"가야겠다."
일점홍은 힐끗 시선을 들었다.
"거처가 어디요?"
"알 것 없다."
"또 만날 수 있겠소?"
"또 만나? 왜?"
일점홍은 음울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당신이 좋아질 것 같소."
"징그러운 놈이군."
혁련소천은 씨익 웃으며 손끝으로 일점홍의 턱끝을 치켜 세웠다.
허나 일점홍의 표정에는 티끌만큼의 동요도 없었다.
혁련소천은 눈빛을 야릇하게 번쩍였다.
"확실히 아름답군. 남자인 나까지 반할 만큼...... 질투가 날 정도야......."
혁련소천은 턱을 치켜세운 손을 내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점홍, 오늘 나를 만난 것은 없었던 일로 생각해라."
"......!"
"무척 즐거웠지만...... 흐흐흐......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 말에 일점홍의 눈빛이 더욱 음울해졌다.
혁련소천은 문득 물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일점홍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렇군! 나는 아직 당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소."
"영호풍! 들어보았느냐?"
순간 일점홍의 낯빛이 크게 변했다.
"군마천의 소천주?"
혁련소천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 험난한 강호를 파헤쳐 나가다 산중고혼이 될 어른의 위대한 이름이지."
일순 일점홍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이제 보니...... 의도적으로 접근했군!"
"미친 놈!"
말이 끝나는 순간 혁련소천이 그의 멱살을 와락 움켜 쥐었다.
찰나, 일점홍은 난생 처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눈빛을 보았다.
머리 속까지 그대로 꿰뚫어버릴 듯한 무서운 눈빛!
지극히 짧은 순간에 보여준 혁련소천의 눈빛이었다.
"빗속에서나 뒈져 버려라......!"
혁련소천은 일점홍의 가슴을 거칠게 떠밀고는 빙글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일점홍은 일순 복잡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막 걸음을 떼놓으려는 순간 탁자 위를 스쳐가던 그의 손끝에
어떤 물체의 감촉이 와 닿았다.
서천책략이었다.
일점홍은 책을 집어들며 빠르게 계단쪽을 응시했다.
허나 혁련소천의 모습은 이미 삼 층에서 사라진 후였다.
'책을 전해줘야 돼!'
핑계였으리라!
그가 유성처럼 창 밖으로 몸을 날려야 했던 이유는......
비는 어느덧 장대같은 폭우로 변해 있었다.
일점홍은 허허로운 공간을 응시하며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멀리 작은 점으로 변해 멀어져 가는 혁련소천의 모습이 그의 동공
에 뚜렷히 박혀 있었다.
폭우는 순식간에 일점홍의 몸을 후줄근히 적셔 버렸다.
문득 일점홍은 수중의 책을 품 속에 천천히 집어 넣었다.
'나중에...... 나중에 전해줄 날이 있을 것이오.......'
창백한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기괴한 미소가 떠오른 것도 바로 그때였다.
'당신... 영호풍은 절대 죽지 않는다......!'
그는 문득 어둑한 하늘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 일점홍은 결심했소. 당신을 죽이려는 자, 나에게 먼저 죽을
거야. 그 누구라도......!"
거침없이 쏟아지는 이 밤의 비는 폭우(暴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