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권 제33장 (33/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33장 제삼(第三)의 잠룡(潛龍) 일점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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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감천곡은 전에 없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영호공자, 보름 후에는 철신도로 떠나는 것이네."

  혁련소천은 담담히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감천곡은 문득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헌데...... 요즘 적용세가에는 무슨 일로 그렇게 자주 가는가?"

  혁련소천은 빙긋 웃었다.

  "나비는 꽃이 있으면 항상 찾아다니기 마련이지요."

  "적용희산을 말하는 것인가?"

  혁련소천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감천곡은 거듭 물었다.

  "종정향도 아는가?"

  "안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감천곡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의 질투는 자칫 큰 화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법이라네."

  혁련소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염려마십시오. 천 명의 미녀를 거느린다면 좀 힘들겠지만 백 명 정도까지는......."

  "......!"

  "다른 것은 몰라도 평생 여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혁련소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천곡은 그를 힐끗 올려다 보았다.

  "어디를 가려는가?"

  혁련소천은 씩 웃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적용세가로나 가볼 생각입니다."

  감천곡은 일순 멍한 표정이었으나 곧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자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허나 종정향 그

  아이도 가끔은 생각해 주게."

  혁련소천은 그 말에 기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 달 정도는 괜찮을 것입니다."

  "한...... 달?"

  감천곡은 언뜻 짚히는 바가 있었던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혁련소천은 유유히 문 밖으로 사라졌다.

  감천곡은 그가 나간 방문을 쳐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소제는 요즘 들어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음?"

  감천곡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열었던 사람은 반태서였다.

  "생각이라면?"

  감천곡의 물음에 반태서는 특유의 냉막한 음성을 흘려냈다.

  "감노형은 어쩌면 감당키 어려운 후계자를 둔 듯하외다."

  "와하하하......."

  순간 감천곡은 목청이 터져라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허나, 그는 곧 광소를 멎고 엄숙하게 말했다.

  "반노제, 알아야 한다. 영호풍,  그 아이의 속셈이 무엇인지 몰라

  도 그는 장차 훌륭한 군마천의 천주가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말게. 후계자의 강함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나의 흉금이 좁지는 않으니까."

  반태서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윽고 무겁게 탄식했다.

  "나의 두뇌가 남못지 않음을 자부하고 있으나 감노형의 가슴 속만

  은 헤아리지 못하겠소이다."

  감천곡은 조용히 입을 떼었다.

  "반노제."

  "......?"

  "자네는 중원의 위대한 모사(謀士)이다. 장차 내가 없더라

  도...... 영호풍, 그 아이를 나처럼 보좌해 주었으면 한다."

  반태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어 그는 냉막한 어조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모사재인(謀士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오.  내가 아무리 잘해

  도 영호공자의 능력이 부족하면 안 되는 법."

  "영호공자의 능력이 없어  보였다면 애초에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

  을 뿐더러 왔다 해도 일찌감치 홍의교로 돌아갔을 것이다."

                                ②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이곳은 적용세가  내의 한 규방(閨房)이었다.

  적용희산은 다리를 비스듬히 꼬고 곱게 앉아 있었다.

  병색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활짝 핀 배꽃처럼 이를데  없이 함초롬하고 청순해 보이는 모습이

  었다.

  지금 적용희산은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허벅

  지를 베고 누운 사내의 머리를 곱게 빗질하고 있었다.

  미인의 허벅지를 베고 마냥  흐뭇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이 사내,

  코를 찔러오는 미인의 육향(肉香)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연신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이 사내!

  혁련소천, 바로 그가 아니겠는가!

  적용희산의 희디 흰 손은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혁련소

  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빗질해 가고 있었다.

  하기야 적용희산에게 있어선 보물도 이런 보물이 없었다.

  다리가 은은히 저려오고 하반신이  온통 뻐근하게 굳어져 가는 고

  통까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

  그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리라.

  머리를 빗는 작업(?)은  틀어올린 머리를 백색유건으로 단정히 묶

  음으로써 끝이 났다.

  "희산."

  적용희산은 머리에서 손을 떼며 곱게 미소했다.

  "말씀하세요."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

  "무엇이옵니까?"

  혁련소천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불쑥 물었다.

  "행복하오?"

  "예?"

  "행복하냐고 물었소."

  적용희산의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짓궂은 사람...... 하필이면 그런 질문을.......'

  그런 말이 그녀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나?"

  적용희산은 움찔하더니 황망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희산은...... 무척...... 행복......."

  그녀는 차마 말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하하핫......."

  혁련소천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양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과 그것을 감싸쥔 두 손이 모두 따뜻했다.

  "희산"!

  "......?"

  "정말 아름답다."

  적용희산은 눈을 사르르  내리깔며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피어 올렸다.

  왜 이러는가?

  벌써 한두 번  들은 말도 아닌데 매번 들을  때마다 이 가슴은 왜

  이렇게 요란하게 방망이질 치는가.

  적용희산은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녀도...... 여쭤볼 말이 있사온데......."

  "음?"

  "혹시...... 이번 일을 후회하지는 않으시는지......?"

  혁련소천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적용희산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였소?"

  "그...... 그건...... 저...... 저와......."

  적용희산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무척  애쓰는 눈치였으나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순간 혁련소천은 언뜻 한  생각을 떠올리며 유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소. 어째서  내가 그대와 관계를

  가지지 않느냐 묻고 싶은 것이 아니오?"

  순식간에 적용희산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있을 리가 만무한 쥐구멍을 찾고 싶은 것이 지금 그녀의 심정이리라!

  혁련소천은 부드럽게 말했다.

  "희산!"

  "......?"

  "야합은 원치 않소. 때가 되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그대와 맺어지고 싶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적용희산의 눈자위에 금세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그녀는 손질이 끝난 혁련소천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며 힘겹게 입을 떼었다.

  "풍......."

  한 마디의 말과 두 방울의 구슬같은 눈물이 혁련소천의 이마 위에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미소했다.

  "왜 우는가?"

  눈물젖은 그녀의 얼굴에 꾸밈없는 미소가 소리없이 번져 나왔다.

  "기뻐서......."

  "기뻐도 우는가?"

  "그것이...... 여자이옵니다."

  "복잡하군."

  혁련소천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 깊숙한 곳에서 야릇한 기광이 솟아났다.

  "희산, 또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

  "......?"

  "일점홍(一點紅)을 아는가?"

  순간 적용희산의 안색이 싹 변했다.

  "아는가 보군."

  "그...... 그렇사옵니다."

  "어떤 자인가?"

  그 말에 적용희산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척 아름다운 여자예요."

  "여자......?"

  "아마...... 이 세상에서 그 이상 아름다운 미모는 드물 거예요."

  혁련소천은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희산보다 아름다운가?"

  "어머!"

  "하하핫...... 아니다. 계속해라."

  적용희산은 곱게 눈을 흘긴 후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평생을  남자에게 짓밟히면서  살아 온  불행한 여인이에요."

  "흠!"

  "비(雨)를 무척 좋아하고...... 독한 술을 좋아하며...... 언제나

  두 눈에 우수를 깔고 살아가는 그런 여자예요."

  "멋지군."

  "예?"

  "후후후...... 농담이다. 그래서......?"

  적용희산은 일시  미묘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그런 기색을 지우고 명랑하게 말했다.

  "들리는 말로는 무공도 굉장히  높다고 하는데 직접 본 사람은 없다고 해요."

  "음......."

  "그리고...... 원래 그녀는 환락천(歡樂天)의 소천주였어요."

  "환락천의 소천주?"

  혁련소천은 안색이 일변했다.

  적용희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갔다.

  "구천(九天) 중 환락천은 다른 곳과 달리 여인으로만 구성되어 있

  어요. 천주 또한 여인이구요."

  "음......."

  "헌데...... 이 년 전  일점홍 그녀는 웬일인지 소천주 자리를 팽

  개치고 환락천을 뛰쳐 나왔어요."

  "......."

  "그로부터 그녀는  줄곧 군마천에 머물고  있는 거예요. 환락천주

  역시 그녀에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낌새였어요."

  혁련소천은 묵묵히 고개를 들고 있더니 문득 입을 떼었다.

  "희산!"

  "......?"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은 것 같군."

  "......!"

  "어색한 이야기라면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적용희산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허나, 그녀는 끝내 입을 열고 말았다.

  "실상...... 일점홍은 남자예요."

  "......!"

  "너무나 아름다워...... 미(美)의  신(神)처럼 아름다워 여자처럼

  보일 뿐이지요."

                                ③

  ―  일점홍의 본명은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

  도...... 모친은 환락천주, 부친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성도 없

  습니다. 다만...... 무섭도록  붉은 단장화(斷腸花) 한 송이를 항

  상 머리에 꽂고 다니기에 일점홍으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 그는 하늘의 실수로 잘못 태어난 사람입니다. 남자이면서도 천

  성적으로 여자보다 더 부드러운 피부와 섬세한 몸을 타고 났으며,

  얼굴 또한  소름끼칠만큼 아름답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환락천주는 그를 후계자로  하기 위해 남자임을 철저히 숨기고

  여자로 키웠습니다. 여인들  틈바구니에서 자란 그는 자신이 남자

  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허나...... 오 년 전 그의 나이 십

  삼 세 때 구천의 천주 중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몸을 망쳤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워 그가 남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을 테지요.

  바로 그때  그가 남자임이 들통난 것입니다.  허나 그런 이후에도

  그는 너무도 아름다운 자신의  얼굴 때문에 도저히 남자로서의 행

  세가 불가능했습니다.

  ― 남자도, 여자도 될 수 없는 그는 그때부터 술을 배우고 인생을

  자학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남자이면서 여인에게는

  사랑을 못 느끼며 남자만 찾아다니고 비만 오면 미친 듯이 폭음을

  하는 남자가 바로 일점홍입니다.

  ― 환락천주 외에 아무도 모르나 그는 실상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살수(殺手)입니다. 상대의  목에 꼭 한 방울의  피만 흘리고 죽게

  만드는...... 그는  그것을 보고 야릇한  쾌감을 느낀다는 무서운

  자입니다.

  ― 한 방울의 피와  한 송이의 단장화...... 그래서 일점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것이 이  적용희산이 알고 있는 일점홍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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