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32장 위대(偉大)한 야망(野望)
━━━━━━━━━━━━━━━━━━━━━━━━━━━━━━━━━━━
①
존궁을 나오는 혁련소천의 발걸음은 만근처럼 무거워 보였다.
제일신마 단우비, 그가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무서운 인물임을 깨
달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정면으로 단우비와 부딪친다면 어떻게 될까?'
혁련소천은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해 옴을 느끼며 시선을 들
어 하늘을 응시했다.
짙푸른 하늘...... 문득 그 한 곳에 커다랗게 확대된 단우비의 얼
굴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 하늘의 의미를 느꼈는가?
나타난 환상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돌연 혁련소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단우비와의 격돌... 오직 한 번이면
충분할 뿐 결코 두 번은 필요치 않으니까.......'
'기다리자. 아직 세월은 무궁하다. 그리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존궁을 바라보았다.
'존궁... 기다려라. 언젠가 너는 내 손에 의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늘을 통째 무너뜨리려는 위대한 야망(野望)이었다.
②
군마천 내의 한 정실에 틀어박힌 혁련소천은 보름 동안 한 번도
밖을 나서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책을 못 봐 환장한 사람처럼 수천 권의 책을 한꺼
번에 쌓아놓고 미친 듯이 독서삼매경에 빠져든 것이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 뿐,
실상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혁련소천은 사실 보름 동안이라는 기간을 통해 천겁현오밀경의 무
학을 거의 대부분 터득해가고 있었으니.......
<천겁현오밀경.>
그것은 천축무학의 최정수(最精數)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
을 만큼 신비무쌍한 기학(奇學)이었다.
중원무학과는 아예 그 본질이 틀렸다.
천하의 모든 무학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는 혁련소천도
이것을 열납하는 동안 한두 번 놀란 것이 아니었다.
― 서하국의 바보같은 국왕놈들, 옥(玉)을 한낱 관상용으로만 쓴 셈이야.......
그리고 혁련소천은 나름대로 또 한 가지의 사실을 단정지었다.
― 단우비, 그의 무공이 어떤것인지 모르나 결코 천겁현오밀경의 이상은 되지 못하리라.
혁련소천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읽는 책은 서전책략, 언젠가 장군부에서 읽었던 바로 그 책
이었다.
"소천주께 아룁니다."
이때 문 밖에서 한 소리 공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혁련소천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적용세가의 적용사문 가주께서 소천주님을 뵙자고 찾아왔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스쳐갔다.
'역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문쪽을 쳐다보았다.
"곧 나간다고 전하라."
"제가 소천주님을 뵙자고 한 것은 한 가지 상의할 문제가 있기 때
문입니다."
적용사문은 전에 비해 무척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눈두덩이가 쑥 들어갔고 수염도 까칠한 것이 무척 심기가 상한 듯이 보였다.
허나 혁련소천을 바라보는 두 눈만큼은 변함없이 물처럼 고요했고
자세 또한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혁련소천은 조용히 물었다.
"상의할 문제라면......?"
순간 적용사문은 혁련소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소천주님은 아직 미혼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혼이오. 허나 약혼자는 있소."
"어사대부 옥부상의 천금 옥산랑 소저 말씀입니까?"
순간 혁련소천의 얼굴에 경악의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적용사문은 담담히 말했다.
"실례된 말이오나 어떤 필요에 의해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혁련소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사생활을 조사한다는 것은 당사자로서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오."
그의 음성에는 불쾌한 기색이 다분히 서려 있었다.
적용사문은 차분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허나 저에게는 누구보다 절실한 사유가 있었기에 부
득불 죄를 범했습니다."
"사유?"
이때 적용사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 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귀공, 이게 무슨 짓이오?"
적용사문은 정중히 말했다.
"희산에게 베푸신 애정의 덫을 풀어 주십시오. 이 적용사문이 이
렇게 사정드리겠습니다."
혁련소천은 내심 뜨끔했다.
허나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말했다.
"귀공, 자세를 고치시오. 또 나는 귀공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
는지 이해가 되지 않소이다."
허나 적용사문은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고 말했다.
"한 번의 스침으로 여인을 헤어날 수 없는 사련(邪戀)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과거 육십 년 전에 사라진 천기개천 사사무의 미령심광뿐입니다."
찰나간에 혁련소천의 눈빛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적용사문...... 내가 너무 얕보고 있었구나......!'
이때 적용사문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사정드리겠습니다. 회산에게 베푸신 미령심광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점점 알아듣기 힘든 말이구료. 미령심광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오?"
적용사문은 아무 말 없이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허나 그는 혁련소천의 표정에서 어떤 변화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을 빌어 혁련소천의 두뇌가 민활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적용사문...... 과연 대단한 지혜를 가졌구나. 허나... 지금 이
자는 나의 마음을 넘겨짚고 있을 뿐이다!'
'후후... 하지만 그 정도에 넘어갈 나 혁련소천이 아니지.......'
생각이 끝날 즈음 적용사문이 재차 간곡한 음성을 흘려냈다.
"소천주......."
"귀공!"
순간 혁련소천이 버럭 분성을 토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겠소!"
"......!"
"나 영호풍은 오늘 매우 불쾌하오!"
그러면서 다짜고짜 몸을 돌려 걸음을 떼놓았다.
"소천주......!"
그 순간 적용사문의 입에서 황망한 부르짖음이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그래...... 칼자루는 어차피 내 손에 쥐어졌으니까.......'
혁련소천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우뚝 걸음을 멈춰섰다.
이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짓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하시오."
적용사문은 문득 결연한 어조로 외치듯 말했다.
"무인불석사(武人不惜死)!"
― 무인(武人)은 절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돌아섰다.
순간 혁련소천의 두 눈이 번쩍 이채를 뿌렸다.
적용사문은 자신의 독문병기인 혈편을 꺼내들고 타는 듯한 시선으
로 혁련소천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련소천은 검미를 찌푸리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적용사문은 그런 그를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잠시 후 시간이 흐른 후 혁련소천은 그 자리에 다시 앉으며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귀공,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기다렸다는 듯 적용사문은 즉시 입을 열었다.
"저의 누이 희산은 소천주님을 뵌 이후 애정의 늪에 빠져 시름시
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석 달째......."
"......."
"누이동생을 자랑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희산은...... 훌륭한
여자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적용사문은 고개를 떨구며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희산을 거두어 주십시오!"
"......!"
"정실은 원치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 아이의 행복뿐입니다."
"......."
"희산은 유일한 제 혈육......! 부모 없이 자라는 것이 안타까워
제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며 키웠습니다."
끓어오르는 격정 탓인가?
적용사문의 양 어깨가 눈에 띄게 경련하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음모와 온갖 추악한 일이 난무하는 이 만마전에
서...... 그 아이만은 물들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키웠습...... 니다."
확연히 떨리는, 물기가 촉촉히 젖어 있는 음성이었다.
'내가 너무 심했던 모양이구나.......'
혁련소천은 일말의 자책감을 느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귀공......."
"소천주......!"
적용사문은 문득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머리의 문사건을 벗어 버렸다.
그러자 윤기 감도는 흑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순간 경쾌한 금속성이 일며 혈편의 손잡이 끝에서 한 자 깊이의
묵검(墨劍)이 튀어 나왔다.
적용사문은 혁련소천을 똑바로 직시하며 한 자 한 자 힘실은 음성
을 내뱉았다.
"진정한 무사(武士)는 불사이군(不死二君)...... 죽을지언정 절대
두 명의 주군을 모시지 않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아무런 주저없이 묵검으로 치렁한 흑발을 싹뚝 잘라버렸다.
"귀공......!"
혁련소천은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아연 의아해졌다.
적용사문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과거...... 저는 저의 신의를 걸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만박
천옹 노자량 사부의 또다른 제자...... 즉 저의 친구와의 대결이
싫어 무림의 일에 절대 관여치 않겠다고......."
"......."
"허나...... 희산을 위해 신의를 깨고 저의 평생을 소천주께 걸겠소이다!"
혁련소천은 혈편마검을 잡은 적용사문의 손에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으음.......'
혁련소천은 적용사문의 기도(氣度)에 섬뜻한 느낌조차 받았다.
'하도낙서에 달통한 문인(文人)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당당한 무
인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구나!'
그는 내심 생각을 굴리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귀공......."
"받아주시오!"
"약속하겠소."
혁련소천은 적용사문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며 조용히 말했다.
"이후 결코 귀공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오."
"......!"
"사나이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리다. 적용소저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순간 적용사문의 전신에 와르르 격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고...... 고맙소이다!"
혁련소천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③
갈대꽃같은 구름사이로 한 조각 편월(片月)이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적용사문은 물기젖은 눈으로 물끄러미 야천(夜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적용사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나의 벗...... 영원한 나의 친구 위군(偉君)...... 어쩔 수 없었
다. 운명(運命)이 너와 나를 부딪치라고 시키고 있으니.......'
문득 두 방울의 눈물이 그의 창백한 뺨을 타고 묵묵히 흘러내렸다.
하나의 약속과 두 방울 눈물이 있었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