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30장 구천십지제일신마(九天十地第一神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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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흔히 비할 데 없이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 등을 표현할 때 황궁(皇
宮)에 비유하길 서슴치 않는다.
허나 이번엔 경우가 틀려도 보통 틀린 게 아니다.
서천목산 중앙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오백여 봉우리와 그
가운데 광야(廣野)처럼 펼쳐진 삼천여만 평의 분지를....
꽉꽉 메우고 들어선 대소전각(大小殿閣)만도 줄잡아 일만(一萬)이
며 그곳에 거주하는 인원은 물경 이십이만(二十二萬)을 헤아리고 있었다.
일문(一門)의 종주급 고수만도 일천여 명, 당세를 주름잡는 초일
급고수 육만(六萬)여 명과 그의 식솔들이 이 한곳에 구름처럼 모
여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의 황궁에 몇 개를 더한들 어찌 이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하늘 아래 둘도 없으며, 이 땅덩어리가 만들어 낸 가장 엄청난 미증유의 세력!
만마전(萬魔殿)― !
구천십지만마전의 핵심세력인 바로 그곳이기에 이토록 엄청날 수 있는 것이다.
②
<존궁(尊宮).>
만마전 최중심부에 위치한 높이 칠 층(七層)의 엄청난 전각이며
넓이는 수백 채의 전각을 합쳐도 이보다 크고 넓을 수는 없다.
방(房)만 해도 구천 간(九千間)이 있다고 했던가?
오죽하면 존궁에 관해 강호는 이런 말까지 하고 있었다.
― 존궁의 방을 모두 구경하려면 꼬박 일 년이 걸린다. 또 누군가
그곳에 숨으면 백 명 이하의 인원으로는 십 년이 걸려도 찾지 못한다.
― 존궁 복도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서천목산을 종횡으로 연결한
길이보다 길 것이다.
다소 과장이 있을지 모르나 일단 그곳에 들어가보지 않고는 섣불
리 단언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존궁(尊宮)!
바로 이곳이 구천십지제일신마 단우비의 거처이다.
말 그대로 하늘같은 위대한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존궁 내에 거처하는 고수만도 물경 삼천(三千)이며 또한 단우비의
주위에는 언제나 천은마성(天殷魔星)이라 불리우는 백팔 명(百八
命)의 수하들이 그림자처럼 맴돌고 있었다.
천은마성!
구천과 십지어는 주인들도 이들의 정체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아
무 것도 없었다.
철저히 신비에 가려져 있으며, 그림자 없는 죽음의 은자(隱者)들
로 불리우는 그들.
허나 그런 천은마성 외에도 존궁은 수겹으로 에워싸며 호위하고
있는 또다른 단체들이 있었다.
금륜제(金輪除).
모두 칠십이 인(七十二人)으로 구성된 초강고수(超强高手)들의 집
단.
혈천도수대(血天刀手隊).
오직 피(血)밖에 모른다는 혈귀(血鬼)들의 조직.
마풍단(魔風團).
악마의 바람을 일으킨다는 악귀(惡鬼)들이 이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흑룡각간(黑龍角干).
그들이 들고 다니는 소뿔로 된 기형도(奇形刀)는 하늘마저 쪼겐다
고 전해진다.
그 밖에도,
천괴담환(天魁曇環).
단혈건(丹血巾).
등등의 조직이나 단체들이 밤낮없이 존궁을 철통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만약 약간의 흑심(黑心)이라도 품은 자가 어설프게 접근했다간 아
예 뼈도 추리지 못할 판국이었다.
구천십지만마전을 통틀어 아니, 이 지상(地上)에서 단연 첫손꼽을
가장 무서운 전각, 그곳이 곧 존궁이었다.
③
― 영호공자. 단우비 전주는 전 중원을 통틀어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무림(武林)의 신(神)이다.
― 구천십지만마전 휘하 백팔십만 고수(白八十萬高手)를 비롯해서
구주팔황삼산오악사해오호(九州八荒三山五嶽四海五湖)를 모조리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역대 제일신마 중 가장 특출한 거인(巨人)이다.
― 군마천서가 만마전에 전달되지 않았다면 이는 분명히 누군가의
음모가 개입되었다. 조심해야 한다.
― 단우비 전주는 어쩌면 자네를 어떤 방법으로든 시험해 볼지 모
른다.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향후 군마천의 흥망이 자네 하나에
걸려 있음을 명심하고.
존궁을 향하고 있는 혁련소천의 머리 속에는 많은 생각이 주마등
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많고 많은 생각들 중 기둥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
'왜? 단우비는 어째서 나를 불렀는가?'
혁련소천이 만마전에 들어온 이후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만마전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혁련소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선 그 방대한 규모는 천하의 혁련소천도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차라리 하나의 왕국(王國)이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마전 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옷차림에서 행동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티끌만큼의 흐트
러짐도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혁련소천은 그러한 모습에서 감탄보다는 차라리 은근한 두려움과
질투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체 단우비는 어떠한 자이기에 이렇듯 엄청난 규모의 단체를 자
신의 뜻대로 움직인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 그는 어느새 존궁 앞에 당도해 있었다.
존궁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에 언뜻 숨길 수 없는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존궁(尊宮).>
좌우 양쪽 담장의 끝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뿐인가?
입구까지 이어진 일백팔 개의 계단은 모두 반들반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좌우 길이만도 족히 오십여 장은 됨짓했다.
또한 각 계단의 양쪽끝에는 백의무사들이 마치 석상처럼 쭉 도열
해 서 있었다.
한결같이 이마에 붉은 핏빛 두건을 둘렀고, 머리카락은 모두 뒤로
길게 드리운 모습들이었다.
'단혈건(丹血巾)...!'
내심 생각하며 걸음을 떼놓는 혁련소천의 뇌리에는 감천곡에게서
들었던 말이 섬전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 단혈건은 모두 삼백육십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존궁의 외부
수호를 담당하고 있다.
― 그들의 병기는 각자의 허리춤에 숨겨진 스무 자루의 단혈마비
(丹血魔匕)로 한 번 전개하면 절대 실수하는 법이 없다.
'단혈건의 수령은....'
혁련소천은 감천곡에게서 들은 일화(一話) 한 가지를 떠올랐다.
단혈천수(丹血天袖) 염독고( 獨孤).
단혈건의 수령이 자 죽음의 소맷자락으로 불리우는 그의 소매에
스치면 백련정강조차도 두 쪽으로 갈라진다.
삼십 년 전 ― 그는 자신의 소맷자락을 시험하기 위해 화산(火山)
소화봉(小華峯)에 세워진 만근비(萬斤碑)를 찾아 갔었다.
만근비는 높이 오 장에 둘레만도 족히 세 아름이 넘는 그야말로
거대한 석비였다.
허나 그러한 만근비도 염독고의 소맷자락 앞에서는 썩은 두부와
다를 바 없었다.
단 한 번에 여지없이 두 쪽으로 쪼개진 것이다.
염독고는 그날 화산을 떠나기 전 이렇게 탄식했다.
― 차라리 집구석에서 계란이나 쪼개고 있을 것을....
혁련소천은 어느새 계단의 바로 앞까지 다가서 있었다.
이때였다.
돌연 계단의 한 표면이 떠오르듯 착각을 일으키며 한 인영이 혁련
소천의 바로 눈 앞에 불쑥 나타났다.
혁련소천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흠칫 한 걸음 물러섰다.
나타난 인물은 분을 바른 듯한 흰 얼굴에 오관이 단정한 문사차림
의 중년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실같이 가느다란 눈에 일점의 광채를 담고 혁련소천의 전신
을 빠르게 훑어 보았다.
"공자께서 영호풍, 영호공자이시오?"
혁련소천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소이다만......."
"단혈천수 염독고라 하오. 전주님의 명을 받고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소."
뜻밖이었다.
깨끗하고 단아한 문사풍의 기도가 전신에 물처럼 흐르고 있는 눈
앞의 이 사람이 바로 죽음의 소맷자락이라 불리는 단혈천수 염독
고라는 것은.
허나 아는 사람은 안다.
그 고요한 기도 속에 언제라도 상대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쪽으로 쪼갤 수 있는 무서운 살기가 숨겨져 있음을....
"따라 들어오시오."
"음......."
혁련소천은 염독고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몇 계단이나 올라갔을까?
문득 혁련소천의 두 눈 깊숙이 신비스런 이채가 스쳐갔다.
'흠... 놀랍구나. 계단 하나하나에까지 기관을 설치해 놓았다니....'
한 계단씩 밟을 때마다 온몸을 바늘처럼 찔러오는 무서운 살기를 느끼는 그였다.
존궁 내부로 인도되어 들어가며 혁련소천은 연속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들어온 곳과 주위환경 등을 기억하려 했다.
헌데 어찌된 판인지 그는 그 어떤것도 머리 속에 온전히 담아둘
수가 없었다.
'훗날 내 스스로 똑같은 경로를 밟는다 해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
으리라!'
놀라운 말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존궁에 들어선 이후 그는 풀잎하나 돌멩이
하나도 그냥 간과할 수가 없었다.
그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진법의 묘리(妙理)가 숨어 있는가 하면,
흐르는 공기에서조차 죽음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혁련소천은 감천곡의 말을 연상하며 쓰디쓴 고소를 떠올렸다.
― 존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괴물이다. 스스로 엄청난 기관과 죽
음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키는 사람이 없어도 절대 들어갈
수 없다.
― 만약 사람이 들어가면 모든 기관이 자동으로 작동, 계속 통로
의 위치를 변경함으로써 그를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 넣는다. 명심
해라. 존궁 자체의 육백사십(六百四十) 통로는 침입자가 있는 경
우 자동으로 육백사십로(六百四十路)의 변화를 일으킴을.
감천곡은 또 한 마디 덧붙여 말했었다.
― 존궁을 만든 사람은 팔백 년 전 천하제일의 장공(匠工)으로 불
리웠던 교수천공(巧手天工) 전황(錢荒)이란 사람이다. 그는 고금
제일의 장공으로 그가 죽은 이후 존궁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다.
문득 혁련소천의 뇌리에 한 인물이 섬전처럼 스쳐갔다.
'적용사문! 만약 그가 여기에 도전을 한다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혁련소천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허나, 진정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었으니......
단혈천수 염독고는 얼마쯤 가다가 또다른 인물에게 혁련소천을 인
계하고는 유유히 왔던 길로 되돌아 갔다.
흑룡혈각(黑龍血角) 모백관(毛白冠).
두번째 안내를 맡은 인물, 이 자는 흑룡각간의 수령이었다.
묘강 특산 흑마혈각서(黑魔血角犀)라는 물소의 뿔로 만든 도(刀)
를 사용하며 그 위력은 지극히 패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흑룡혈각 모백관은 싸움에 있어 절대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는다.
그의 도(刀)는 반드시 상대의 심장과 목만 노리며 이때까지 한 번
도 실패한 적이 없다. 모백관의 더욱 더 무서운 것은 대혈각(大血
角)으로 불리우는 열두 개의 원추형 암기이다. 물소뿔로 만들었다
는 그것은 상대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쫓아 다니는 죽음의 암기이다.
흑룡혈각 모백관은 다음번 인물에게 혁련소천을 인계할 때까지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았다.
혈리도수(血狸刀手) 북리추(北里推).
혁련소천의 세 번째 안내를 맡은 그는 혈천도수대(血天刀手隊)의
수령이었다.
존궁에서 가장 잔인한 인물로 평가되는 그.
과거 대막 혈리방(血狸 )의 방주로서 사막의 제왕(帝王)이라고까
지 불리웠던 인물이었다.
얼굴에는 흉측한 이리탈을 덮어썼고, 핏빛의 손톱을 근 한 자가량
기른 끔찍한 모습이었다.
허나, 그 손톱으로 과거 그는 일천 명의 심장을 뽑아냈다고 한다.
이십 년 전 단우비를 찾아와 충성을 맹세한 후 하루도 존궁을 떠
나본 적이 없다는 인물이었다.
어느 한 정실 앞에 이르자 혈리도수 북리추는 이윽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다 온 셈인가?'
혁련소천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최소한 육십사관문(六十四關門)을 나도 모르
게 넘었고 그 중 삼십육관문이 변화하여 통로를 바꾸었다. 진
정... 무서운 곳이다....'
허나 그 모든 변화를 걸으면서 하나도 놓치지 않은 혁련소천의 이
목은 어찌 무섭다 하지 않을 텐가?
혁련소천은 문득 정실의 문을 응시했다.
'이곳이 단우비의 거처인가?'
이 순간 혈리도수 북리추는 그 자리에 지극히 조심스럽게 부복했다.
그리곤 머리를 바닥에 대며 나직한 음성을 발했다.
"지엄하신 만마전의 제일신마께 아뢰옵니다."
안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북리추는 움찔하더니 약간 높은 음성을 다시 발했다.
"하명하신 대로 군마천의 영호공자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문득 북리추의 전신에 잔떨림같은 경련이 일어났다.
"하명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갈증을 느꼈는가?
말이 이어지다 말고 중간에서 쇳소리를 내고 끝을 맺었다.
"북리추."
이때 조용하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 정실에서 흘러 나왔다.
북리추는 머리를 더욱 조아리며 황망히 대답했다.
"부... 북리추, 여기 대령하였사옵니다...."
"수고했다, 돌아가 보아라."
순간 북리추는 이마가 터지도록 바닥에 찧었다.
"조...... 존명을 받드옵니다......."
이어 그는 무릎걸음으로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뒤로 물러나갔다.
고양이 앞의 쥐!
한때 사막의 제황으로 군림했던 혈리도수 북리추가 보여주는 모습
이었다.
'수고했다는 한 마디에 존명을 받는다고?'
우습지 않은가?
허나 혁련소천은 웃음 대신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단우비...... 단우비......!'
거듭 그의 이름을 되뇌이는 동안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들어오너라. 영호풍!"
이때 한 소리 부름이 혁련소천을 퍼뜩 정신 들게 만들었다.
혁련소천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드디어...... 시작인가?'
웬일인가?
갑작스레 심장이 뛰고 움켜쥔 주먹에 진땀이 촉촉히 배어 나오는 것은!
혁련소천은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긴 숨
을 들이마셨다.
'혁련소천, 침착하자! 너는 스스로 단우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
다고, 아니 그를 능가하겠노라 장담하지 않았는가?'
순간 불현듯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는 호기!
혁련소천은 짧은 순간을 빌어 급격히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
태산이 무너져도 눈하나 깜짝않을 초인적 정력(定力)의 그!
혁련소천은 천천히 문을 밀었다.
문은 아무런 소리없이 미끄러지듯 활짝 열렸다.
혁련소천은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눈(雪)같이 희고 솜털처럼 부드럽게 느껴지는 바닥의 모피가
동공 가득 쏘아져 들어왔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눈꺼풀을 치켜떴다.
순간 애써 냉정을 되찾았던 혁련소천의 눈빛이 일순 물결치듯 흔
들렸다.
만약 옷이 없었더라면 그의 몸이 무섭게 경련하는 것도 볼 수 있
었으리라.
그의 전면에는 바닥의 것과 같은 모피로 뒤덮인 거대한 태사의 하
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태사의의 앉아 있는 한 노인(老人), 그는 우람한 체구
를 화려한 곤룡포로 휘감은 채 조용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희다못해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 눈썹은 마치 서리라도 앉
은 듯 하얗게 세어 관자놀이까지 힘차게 뻗어 있었고, 그 아래 한
쌍의 눈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너무나도 깨끗했다.
허나 일면 너무나 맑아서인지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그의 성격이 강직함을 나타내는 듯 했고, 꽉 다
물린 얄팍한 입술은 언뜻 냉혹하고 비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했다.
턱밑으로는 은설같은 수염이 곱게 빗질되어 가슴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누구인가?
구천십지제일신마(九天十地第一神魔)― 단우비!
더 이상 위대할 수 없는 이 땅위 최고(最高)의 인간(人間)!
말 그대로 하늘이 되어 버린...... 바로 그였다.
헌데 놀랍게도 단우비의 얼굴에는 일곱 줄기의 상처가 나타나 있
지 않는가?
이마와 뺨, 턱, 목덜미 등에....
비록 가늘고 희미하였으나 혁련소천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단우비...... 그의 얼굴에 저런 상처가......?'
허나, 정작 혁련소천의 눈빛이 흔들리고 몸에 경련이 일어난 것은
그러한 모습 때문만이 아니었다.
단우비의 전신에서 노도처럼 뿜어나오는 숨막힐 듯한 기도(氣度)!
혁련소천이 누구 앞에서 이렇듯 위축되어 보기는 결단코 처음이었다.
단우비는 조용히 혁련소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나 혁련소천은 자신의 몸이 어떤 무형의 기운에 의해 뒤로 점점
밀려나는 느낌을 받았다.
'숨... 숨이 막힌다!'
그의 등줄기는 어느샌가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믿을 수 없다.... 한 인간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이렇게까지
무서울 수가!'
그는 점차 호흡하기조차 곤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헌데 이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혁련소천의 뇌리를 벼락치듯 강타했다.
'그렇다! 지금 단우비는 자신의 기도에 무형의 기운을 실어 발출
함으로써 나를 시험하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두뇌!
'약하면 의심을 받고 강하면 표적이 될 수 있다!'
생각을 빠르게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혁련소천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단우비의 기도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밀면 밀리고, 당기면 끌려가고.......
허나, 그의 표정에서 만큼은 티끌만큼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유약하되 영특하고 침착한 백면서생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었다.
어느 한순간, 단우비의 맑고 깨끗한 두 눈에 실낱같이 가느다란 이채가 스쳐갔다.
동시에 혁련소천은 전신을 짓누르던 질식할 듯한 기운이 말끔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혁련소천은 단우비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군마천 소속의 영호풍, 만마전 제일신마께 인사드립니다."
단우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허리를 펴며 공손히 말했다.
"구천과 십지의 주인이나 후계자는 만마전 제일신마의 면전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비례(非禮)를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꽉 다물렸던 단우비의 입술이 처음으로 떼어졌다.
"비례가 아니다. 그것은 만마전의 규율이니까......."
이어 그는 한 손을 가볍게 들어보이며 말했다.
"앉아라."
혁련소천의 얼굴에 문득 의혹이 내비쳤다.
"바닥에......."
허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양 허벅지에 푹신한 촉감이 와닿음을 느꼈다.
혁련소천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없다.
마치 공기가 뭉쳐서 의자로 변하기라도 한 듯, 하나의 푹신한 의
자가 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혁련소천은 의자에 앉으며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허나 그는 내색치 않고 단우비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하나는 이미 커질 대로 커 있는 하늘....
또 하나는 아직 크다할 수 없는 작은 하늘....
이것은 운명(運命)이 만들어 낸 두 하늘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