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권 제28장 (28/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28장 불 속을 날으는 독수리와 지옥(地獄)의 화기(火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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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장손세가(長孫世家).

  군마천 삼십육세가 중 하나이나 인원은 고작 삼십여 명뿐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화약(火藥) 제조였다.

  구천십지만마전에서 사용되는 모든 화약이 바로 이 장손세가의 특

  수비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독수화응(毒手火應) 장손중박(長孫中博)!

  그는 바로 불 속을 나는 죽음의 독수리로 일컬어지는 현 장손세가

  의 가주(家主)이다.

  금년 나이 삼십이  세로서 그는 여섯 살 때  화약을 잘못 만져 두

  다리를 몽땅 잃었고, 스물네  살 때에는 그의 아들이 화약을 건드

  려 부인과 자식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얼굴마저 잃어야 했던 불

  운(不運)의 인물이었다.

  독수화응 장손중박, 그는 후원(後園)의 사륜거(四輪車)에 앉은 채

  한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햇살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얼굴은 마치 고깃덩어리 하나를

  잘 다져 놓은 듯한 그야말로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오관 중 제대로 붙은 것은 불꽃같이 빛나는 두 눈뿐이었으니

  그 모습이 얼마만큼 참혹한지는 가히 짐작할 만했다.

  뿐인가?

  사륜거에 걸터앉은 그의 하반신엔 길다란 장포자락만 공허하게 펄

  럭이며, 양 손은  다 합쳐봐야 겨우 손가락  세 개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지금 장손중박의  앞에는 극(極)의 대조를  보이는 헌앙한 미소년

  (美少年)이 대좌해 있었다.

  혁련소천 ― 그것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지난 두 달 동안 혁련소천은 장손중박을 열 번 정도 방문했다.

  외부와의 접촉을 극력히 기피해 왔던 장손중박도 어쩐지 혁련소천

  에게만은 깊은 관심을 보이며 친숙하게 대해 주었다.

  그것은 혁련소천의 뛰어난  외모나 방대한 지식, 장차 군마천주가

  될 존귀한 신분때문이 아니었다.

  장손중박이 혁련소천과 친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첫 대면에서 혁련소천은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는 점.

  그것은 외부와 단절해 살던 장손중박에게 커다란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두 번째, 장손중박은  혁련소천의 불꽃같은 야망에 대번 공감대를

  형성하며 의기가 투합되었다.

  세 번째는, 불(火)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 주는 혁련소천의 마음이

  그 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천주께서 매번  방문해 주심에 이 장손중박은  진정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치 쇠를 깎는 듯이 지극히 날카롭고 듣기 거북한 음성이었다.

  어릴 때의 사고로 성대를 다친 탓이었다.

  허나 그의  어조는 지극히 정중했고 태도는  공손, 겸허하여 아랫

  사람으로서의 자세를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소천주라는 신분이  능히 이각(二閣), 팔당(八黨), 삼십육

  세가의 위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혁련소천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시오, 장손가주. 자꾸 그렇게 말하시면 이곳을 향하

  는 내 발걸음이 자꾸 무거워질 것 같소이다."

  장손중박은 안면을 씰룩이며 헛웃음을 날렸다.

  "허허허...... 정히 그러시다면  앞으로는 제 입을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일신에 백의(白衣)를 걸친  한 여인이 그들 사이로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녀는 과일이 듬뿍 담긴 쟁반 하나를 받쳐들고 있었다.

  혁련소천과 장손중박은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 그녀에게 눈길을 던졌다.

  나이는 대략 이십오륙 세  가량 쯤 되어 보일까. 학(鶴)처럼 고고

  한 분위기를 풍기는 절세미모의 여인이었다.

  특히 깊은 우수에  잠긴 듯한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은 다시 한 번

  더 쳐다볼 정도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여인은 두 사람 사이의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 놓고 아무 말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 갔다.

  멀어져 가는 여인을 쳐다보며 혁련소천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언제 보아도 온(溫)소저는 아름답기 그지없소이다."

  장손중박의 미간에 언뜻 짙은 그늘이 깔렸다.

  그는 과일 하나를 집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불행한 여인이지요."

  "......!"

  "십이 년 전 서주(西主)에서 노예 시장에 팔려나온 소녀였는데 죽

  은 부인의 몸종으로 쓰기 위해 제가 샀었습니다."

  장손중박은 과일을 만지작거리며 우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팔 년 전 부인이 죽은 이후 결혼도 하지 않고 또한 제 곁을 떠나

  지 않고 있답니다. 저로 인해 청춘이 썩는 셈이지요."

  혁련소천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아마...... 장손가주를 사랑하는 모양입니다만......."

  순간 장손중박의 눈에 언뜻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장손중박은 하늘을 응시하며 나직한 웃음을 발했다.

  "헛허허...... 사랑이라...... 소천주, 이 몸의 행색을 보시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겠소?"

  한겨울의 삭풍처럼 황량하고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그는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설혹...... 누군가 사랑한다 해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특히 온유상(溫柔常)은 더욱 더...... 제게 과분할 뿐 아니라 그

  녀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손중박은 문득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죽은 부인을 무척 사랑했습니

  다. 불구인 저를 위해 온갖 희생과 헌신을 다했던 여인입니다. 그

  래서 그런지 그녀가 죽은 지  팔 년이 지났어도 그녀는 언제나 제

  뇌리와 가슴 속을 꽉 메우고 있습니다."

  "......!"

  "온유상의...... 아니 다른 여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요."

  '거짓말!'

  혁련소천은 그의 눈빛에서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대는 온유상을  사랑하고 있어. 다만  신체적인 결함으로 애써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야.......'

  그것은 참으로 서글픈 사랑이었다.

  장손중박은 잠시 침묵하더니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오늘은 소천주께 한 가지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

  "저를 따라 오십시오."

  장손중박은 사륜거의 바퀴를 손으로 밀며 옆으로 비스듬히 방향을 틀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그는 제갈천뇌의 말을 거듭 되새겨 보았다.

  ― 독수화응 장손중박은  아주 대단한 귀재(鬼才)입니다. 허나 군

  마천이나 구천십지만마전  내에서 그의 진정한  능력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무공은 대단치  않으나 그의 용화술(用火

  術)과 화기제작법(火器制作法)은 실로  신기(神技)에 가까울 지경

  입니다.

  ― 그의 불(火)과  화약술은 남송(南宋)시대 남축융의 일맥(一脈)

  이나 그 기술은 축융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렇기 때문에 군마천 삼 인(三人)의  잠룡 중 한 명으로 그를 대종

  사께 천거하는 바입니다.

                                ②

  거대한 석실(石室). 짙은  유황(硫黃)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이곳

  에 이르자 장손중박의 음성이 차분하게 흐르고 있었다.

  "제가 구천십지만마전에 공급하는 화약은 일반적인 것들로써 유황

  과 초석, 목탄 등을 배합해서 만들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이 석실  안에는 구천십지만마전에 앞으로 십 년간

  사용이 가능한 화약이 약 팔백만 근 정도 비축이 되어 있습니다."

  혁련소천은 아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때 장손중박이 조그만 금갑(金匣) 하나를 집으며 말했다.

  혁련소천을 금갑을 응시했다.

  장손중박은 천천히 금갑의 뚜껑을 열었다.

  금갑 속에는 수십 개의 붉은 구슬이 가득 들어 있었다.

  "뇌정화신탄(雷精火神彈), 모두 오십 개입니다."

  그는 붉은 구슬 하나를 집어들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충격을 가하면 즉시  폭발합니다. 위력은 화약 일만 근과

  버금가며 웬만한 산(山) 하나는 통째로 날려 버리지요."

  혁련소천의 안색이 가볍게 변화했다.

  이어 그는 뇌정화신탄 한 개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콩알만한 크기이나 무게는 제법 묵직했다.

  혁련소천은 뇌정화신탄을 코끝에  가져가더니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묘강 특산인 철화석(鐵火石) 냄새가 나는군요."

  장손중박은 그 말에 절로 탄성을 발했다.

  "오! 과연 소천주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이어 그는 두 눈 가득 기쁨의 빛을 담고 이번에는 옥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것은 얼마 전 시험 삼아 만든 것입니다."

  혁련소천은 뇌정화신탄을 금갑 속에 집어 넣고 옥병을 응시했다.

  장손중박은 말했다.

  "이것의 이름은 마화신무액(魔火神霧液)이라 지었습니다."

  "음."

  "이것을 한 방울만 땅에  뿌리면 아주 넓고 빠르게 지면에 확산되

  어 공기 중에 퍼져  오릅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일각 후엔 스스

  로 불이 붙습니다."

  "......!"

  "위력은 지상  십 장 이내의  물체를 모조리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혁련소천은 크게 놀랐다.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그도 이토록 괴이한 것은 처음 듣고 보았기 때문이다.

  혁련소천은 물었다.

  "이 한 병으로 어느 정도의 지면에 뿌릴 수 있소?"

  장손중박은 옥병을 힐끗 쳐다보더니 서슴없이 대답했다.

  "최소한 방원 백 장 이내는 모조리 재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백 장......!"

  혁련소천의 안색이 거듭 변했다.

  '실로 엄청난 것이로다......!'

  이때 장손중박은 마화신무액이 든  옥병을 내려놓고 또 하나의 옥갑을 집어 들었다.

  옥갑 속에는 실낱같이 가느다란 선(線)이 검은 빛을 띠고 실타래처럼 둘둘 감겨 있었다.

  "이것의 이름은 천화사(天火絲)라고 합니다."

  혁련소천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것은 어디에 쓰는 것이오?"

  "한 번 보십시오."

  장손중박은 소매춤에서 작은 금빛 소도(小刀) 하나를 꺼내더니 천화사를 약간 끊었다.

  이어 그는 금빛 소도의 중간에 천화사를 한 바퀴 감았다.

  장손중박은 금빛 소도를 혁련소천에게 내밀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천화사를 살짝 건드려 보십시오. 단 빨리 손을 떼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

  혁련소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손가락끝으로 천화사를 살짝 건드렸다.

  "억!"

  순간 혁련소천은 대경하여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끝이 닿기  무섭게 천화사는 무서운 열을  내며 하얀 백광(白光)을 뿜어 냈다.

  동시에 금빛 소도는 반동강으로 끊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대체 이것은......?"

  혁련소천은 눈을 크게 뜨고 장손중박을 쳐다보았다.

  장손중박은 소도를 내던지며 나직이 웃었다.

  "허허허...... 천화사는 사람의 살결과 접촉하면 그 즉시 발화(發

  火)되어 무엇이든 끊어 버립니다."

  "오......!"

  "허나 인체에 접촉하지 않는 한 불 속에 넣어도 절대 불이 붙지 않아요."

  "허......!"

  혁련소천은 거듭 탄성을 발했다.

  뇌정화신탄(雷精火神彈)!

  마화신무액(魔火神霧液)!

  천화사(天火絲)!

  그 중 혁련소천조차도 소홀히 여길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 하나가  은밀하고도 폭발적인  위력을 지닌 희세화기(希世火器)들인 것이었다.

  이때 정작 놀라운 말이 장손중박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허나 이런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장난감에 불과할 뿐입니다."

  ― 쓸모 없는 장난감!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할 만큼  쓸모 있는 장난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저를 따라 오십시오."

  장손중박은 사륜거를 굴리며 한쪽 벽 앞에 다가갔다.

  혁련소천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장손중박은 손을 뻗어 벽의 어느 부분을 슬쩍 눌렀다.

  순간 육중한 굉음과  함께 십여 장 높이의  석벽이 통째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순간 '앗!'하는  한 소리 경악성이 절로  혁련소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석벽 안엔 또 하나의 거대한 석실이 있었다.

  거기에는 시꺼먼 묵광(墨光)이  기름기처럼 번들거리는 거대한 쇳

  덩이가 들어 있지 않은가?

  일순 혁련소천의 얼굴은 온통 경악의 빛으로 뒤덮였다.

  "이, 이것이...... 화포(火砲)가 아니오?"

  장손중박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허나 이건 일반 화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음......!"

  "이름은  자모연환구중포(子母連環九中砲),  중앙의 모포(母砲)를

  중심으로 아홉 개의 자포(子砲)가 둥글게 에워싸고 있습니다."

  "......!"

  "이 자모연환구중포의 위력은 가히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엎을 정

  도입니다. 사정거리에만 걸리면 산(山)이고 성(城)이고 모조리 초

  토화됨을 면치 못합니다. 군사 일만(一萬) 정도는 단 반 시진이면

  모조리 전멸시킬 수 있지요."

  혁련소천은 둔기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모연환구중포! ― 실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나 혁련소천이 놀

  라는 것은 비단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장손중박! 이런 귀재(鬼才)가 이런 곳에서 썩고 있었다니....'

  기억하기에 혁련소천이 누군가를  대상으로 이렇게까지 놀라고 감

  탄한 적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손중박은 자모연환구중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군마천이나 구천십지만마전 내에서  화약 외에 이런 물건을 만드

  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은 야릇한 눈빛을 번쩍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장손가주."

  "말씀하십시오, 소천주."

  장손중박은 차분히 대답하며 혁련소천을 마주 보았다.

  문득 혁련소천의 눈빛이 무섭도록 깊숙이 가라 앉았다.

  "말해 주시오."

  "......!"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최대비밀을 나에게 보여주는 이유를......."

  장손중박의 눈에 은은한 광채가 떠올랐다.

  "옛날...... 백아(伯牙)는 자신의 거문고 솜씨를 유일하게 알아주

  는 종자기(鐘子期)를 유일한 지기(知己)로 알았습니다."

  "......!"

  "나...... 장손중박이 감히  백아에 비할 수는 없으나 소천주께서

  는 종자기가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장손중박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자  자신이 생명보다 아끼던 거문고를 무참하

  게 부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는 스르르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소천주께서 이 장손중박이  필요없다고 여기신다면 이 석실의 모

  든 화기는 쓸모없는 쓰레기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혁련소천의 눈빛이 일순 파도치듯 흔들렸다.

  한 줄기 위대한 감동의 물결이 그의 가슴 속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유혹(誘惑)이었다.

  많고 많은 수하들을 얻었던 그가 아닌가.

  헌데 이 사나이의 유혹은 어찌 이렇듯 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

  혁련소천의 양 손이 손가락 세 개 뿐인 장손중박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장손가주."

  "......!"

  "나를...... 믿어 주겠소?"

  장손중박의 안면이  괴이하게 씰룩인 것은  웃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소천주."

  "......!"

  "장손중박은 이미 일 언(一言)을 던졌습니다. 비록 중천금은 되지

  못하더라도 비슷한 정도는 될 것입니다."

  말은 없었다.

  허나 장손중박은 자신의 손을  감싸쥔 혁련소천의 손에 불끈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혁련소천의 대답이었고 또한 지금

  그가 해야 할 말의 전부였다.

  수천, 수만 마디의 말을 담은 두 사람의 눈빛이 한동안 뜨겁게 뒤엉키고 있었다.

  후원의 처음 그 자리에서  장손중박은 멀어져 가는 혁련소천의 뒷

  모습을 취한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훌륭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서운 인물이다......!"

  그는 혁련소천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

  풀이했는지 모른다.

  "쿨룩...... 쿨룩......!"

  격정이 심했던 탓인가?

  장손중박은 목을 감싸쥐며 심한 기침을 터뜨렸다.

  "나으리, 이제 약을 드시고 쉬셔야 할 시간입니다."

  그 순간 맑고 차분한 음성이 사륜거의 뒤에서 흘러 나왔다.

  "음......."

  장손중박은 목언저리를 쓰다듬으며 등받이 깊숙이 상체를 기댔다.

  그는 뒤돌아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온유상, 바로 그녀가 사륜거 뒤에 나타나 있음을....

  장손중박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입을 떼었다.

  "유상."

  "여기 있사옵니다, 나으리."

  "너는 젊고...... 아름답다. 언제까지 이렇게 내 곁에서 썩고 있을 생각이냐?"

  온유상은 그 말에 그윽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으리께서 천첩이 싫다 하시면 떠나겠사옵니다."

  "유상, 나는 아직 화소를 잊지 못한다."

  화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부인의 이름이었다.

  온유상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더욱 화사한 미소를 떠올렸다.

  "천첩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사옵니다. 그저...... 지금처럼 이렇

  게 사는 것이 가장 기쁘고 즐거울 뿐입니다."

  "바보같은 녀석......!"

  장손중박은 그렇게 한 마디 불쑥 내뱉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나 장손중박은 보지 못했다.

  화사하게 웃으며 명랑한 음성을 흘려내던 온유상, 그런 그녀의 두

  눈에 반짝 이슬이 맺혀 있음을......!

  하늘은 금세라도 눈가루를 뿌려낼 듯이 짙게 흐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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