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27장 천하(天下)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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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두 달이 물처럼 흘렀다.
한 해가 지나고 혁련소천에게 한 살의 나이가 더해진 신년(新年)
의 정월(正月), 군마천은 여전히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허나 그런 침묵 속에서도 폭풍같은 하나의 흐름이 있음을 세인들
은 알지 못했다.
단옥교...... 구천십지제일신마 단우비가 가장 총해하는 증손녀,
그녀를 노리는 검은 마수(魔手)는 소리없이 뻗쳐나가고 있었던 것
이다. 바로 그 무렵, 군마천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또 하나의 변
화가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었으니......
②
칠십 년 전 어느날 엄청난 방문(房門)이 천하에 나붙었다.
<전 중원에 고(告)한다.
건풍삼년을 기해 전 무림인은 서천목산 삼천 리 이내에서는 누구
라도 자의(紫衣)를 착용치 말 것을 명(命)한다.
또한 중원 전역의 모든 문파는 자파의 영기(靈旗)나 영패(靈牌)
등이 자색으로 표기됨을 절대 엄금한다.
이에 거역하는 자는 무조건 척살할 것이고 문파는 그 수령(首領)
의 목숨으로 그 죄를 묻겠다.
구천십지만마전 자소천주 자양노군(紫陽老君) 빙허잠(憑虛潛).>
이른바 자소천에 의해 전 무림에 자색 사용의 금지령이 선포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칠 일(七日) 후.
서천목산 삼천 리 이내의 모든 포목상에서 자색천의 씨가 마른 것
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고, 전 무림의 문파에서도 자색으로 표기된
물건은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자양노군 빙허잠.
제 팔대(第八代) 자소천주인 그는 강자(强者)는 미치도록 좋아하
되 약자(弱者)는 철저히 경멸하는 그런 성격의 인물이었다.
비록 적이라고 해도 강하기만 하면 그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강자를 멋지게 죽이는 일에 삶의 보람과 희열을 찾는
인물이 바로 그다.
또한 그는 타인을 모방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배척한다.
입는 옷에서 생활태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광적으로 신선하고
독특한 것을 좋아한다.
천하에 내려진 자색사용금지령도 바로 그런 성격이 빚어낸 결과였
다.
뿐인가?
천하에서 의심 많기로 둘째가지 않는 인물이 또한 그다.
그는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심지어 자신을 낳아준 부모조차 친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
하는 위인이다.
아무리 완벽한 것도 그의 앞에서는 완벽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라고 생각하
는 그. 때문에 그는 만사에 의혹을 갖고 그 의혹에 따라 모든 결
점을 철저히 보완시킨다.
이렇듯 괴팍하고 복잡한 성격의 인물, 그는 바로 자소천의 주인
자양노군 빙허잠이었다.
③
"군마천주 감천곡이 영호풍이란 애송이를 차기천주로 내정했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내막이 숨겨져 있다."
얼핏 보아 마흔을 넘지 않은 듯한 중년인의 모습, 매우 준수한 얼
굴에 짧은 수염이나 눈썹, 두 눈 등이 온통 자색 일색(一色)이었
다.
누구인가?
자양노군 빙허잠 ― 바로 그였다.
그의 면전에는 다섯 명의 자의노인이 일렬로 시립해 있었다.
"영호풍이 정말 책버러지라면 그의 자질이 제아무리 특출하고 감
천곡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영호풍을 삼십 년 이내에
는 감천곡 정도로도 키울 수 없다."
무거운 침묵이 실내를 짓누르는 가운데 빙허잠의 음성이 침중하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감천곡은 바보가 아니다. 또한 군마천주의 자리는 결코 약자가
오를 수 없는 자리다. 그것을 아는 감천곡이 일개 책버러지를 후
계자로 내정했다고?"
만사를 일단 의혹의 눈으로 보는 특유의 성격이 발동된 것이었다.
"종정세가의 종정향과 공야세가의 공야진붕이 파혼을 당했고 종정
향은 석 달 동안이나 종정세가로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그의 입언저리가 차가운 조소로 물들었다.
"뿐만 아니다. 석 달 전 천요비자가 돌연 보름 동안이나 행방이
묘연해진 때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뭔가 있다."
단정짓듯 말하더니 그는 가장 왼쪽의 자의노인에게 시선을 던졌
다.
"가경(佳境)!"
"......?"
"어떻게 생각하느냐?"
"......."
흑사신(黑邪神) 가경!
자소천의 서열 오 위(五位)에 올라 있는 그, 까무잡잡한 피부에
반들반들한 대머리로서 눈꺼풀이 아래로 축 쳐져있어 어쩐지 우둔
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가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혹시 감천곡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닐까요?"
하나마나한 대답이 아닌가?
빙허잠의 입언저리가 크게 실룩거렸다.
"어린애같은 대답을 하는군."
"......."
가경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빙허잠은 혀를 찼다.
"쯧쯧... 하기사 네가 그것을 안다면 지금쯤 네가 내 자리에 앉아
있을 테지...."
그러면서 그는 가경의 옆에 있는 인물에게 시선을 옮겼다.
"석북위(石北偉)!"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군마천의 그 누구라도 단옥교에게 접
근하는 것을 저지토록 하라."
사심마성(蛇心魔星) 석북위, 그는 잔인하고 간교한 머리를 지닌
자소천 서열 이위(二位)의 고수였다.
그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알겠습니다, 천주(天主)!"
이때 돌연 가경이 불쑥 입을 떼었다.
"천주, 단옥교는 왜......."
빙허잠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는 모르는 게 네 머리를 위해 좋을 것이다."
"예?"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너는 영호풍에 대한 조사나 철저히 해
라. 소남붕처럼 뒈지지나 말고......."
순간 가경의 얼굴에 무서운 분노가 떠올랐다.
"소남붕의 죽음은 분명히 환락천(歡樂天) 놈들의......."
"바보같은......."
빙허잠은 대뜸 그의 말을 끓고 짜증스런 어조로 내뱉았다.
"가경......! 너는 왜 너의 무공이 본좌 다음이면서도 오위(五位)
의 서열에 올라있는지 아느냐?"
가경은 대머리를 긁적거리며 띄엄띄엄 말했다.
"그... 글쎄... 저도 그게 늘 궁금했으나 아직......."
빙허잠은 혀를 차며 탄식했다.
"쯧쯧...... 하긴 그것을 알고 있다면 서열 오위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지."
이어 그는 다시 석북위를 쳐다보았다.
"석북위! 군마천의 서열명단에 감천곡 다음으로 영호풍을 올려 놓아라."
"알겠습니다."
석북위의 대답이 끝나는 순간 가경이 또 끼어들었다.
"그...... 그는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새끼인데......."
빙허잠의 표정이 재차 험악해졌다.
허나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표정을 부드럽게 가다듬고 말했다.
"가경, 너는 지금 영호풍 정도는 거뜬히 이길 수 있겠지?"
가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단 일 초에 골통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빙허잠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 년 후에 그가 군마천주가 되어도 이길 수 있겠느냐?"
가경은 난색을 띠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문득 괴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그럴 때는 천주님의 머리도 꽤 돌아가는군요."
"음.......?"
"흐흐흐...... 생각해 보십시오. 백 년 후라면 저는 늙어서 죽어
땅 속에 묻혀 있을 텐데 어찌 그 놈과 대결할 수 있겠습니까?"
빙허잠의 인상이 홱 찌푸러졌다.
그는 측은한 눈길로 가경을 쳐다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원히 어렵군. 도저히 구제불능이야."
이어 그는 태사의 깊숙이 상체를 파묻으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감천곡이 용(龍)이라면 영호풍도 용이야. 비록 아직은 잠룡(潛
龍)이나 영원한 잠룡은 아닌 것이지......."
그는 몰랐다.
그 잠룡은 언제라도 자신의 숨통까지 끊을 수 있는 죽음의 용(龍)이라는 것을......
"나의 후대(後代)를 위해서는 감천곡보다 영호풍을 경계한다."
빙허잠은 눈을 감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가경을 쳐다보았다.
"가경!"
"......?"
"일 년 후를 내다보기 전에 십 년(十年)을 내다보고 십 년을 내다
보기 전에 백 년(百年) 후를 생각하도록 해라."
가경은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빙허잠이 지금 한 말은 가경에게 했다기
보다 빙허잠 자신을 향한 일종의 다짐이었기 때문이다.
"가경!"
"......!"
"소남붕의 사인을 철저히 규명하라. 시간는 일 년을 주겠다."
가경의 눈이 커졌다.
"그...... 그렇게 길게......."
"어렵다. 특히 네 머리로는...... 서두르지 말고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라."
가경은 자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자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제 없습니다."
빙허잠은 다시 석북위를 향해 말했다.
"석북위, 그대는 구천(九天)과 십지(十地)의 모든 움직임을 하나
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그저께...... 십만 냥을 주고 구입한 구룡옥배(九龍玉杯)는 부숴버리도록 하라."
석북위는 흠칫했다.
"구룡옥배를 말입니까?"
빙허잠은 냉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혈궁천(血穹天)의 순우천주(淳于天主)도 그와 똑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석북위는 언뜻 깨달은 바가 있어 지체없이 대답했다.
"실행토록 하겠습니다."
"천주, 그 귀한 것을 왜 부숴버립니까?"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렇게 물어볼 사람은 가경밖에 없었다.
빙허잠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가경을 쳐다보았다.
"가경!"
"......?"
"말이나 하지 말지. 그러면 중간은 간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느냐?"
가경은 대머리를 긁적긁적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빙허잠은 고소를 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저 머리로 어떻게 무공을 익혔는지 아무튼 가경은 이
시대가 탄생시킨 최대 불가사의 중 하나란 말이야."
그 말에 가경의 축 늘어진 눈꺼풀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바다에 산다는 불가사리 말입니까?"
④
하나의 술잔이 감천곡 오른손 안에서 산산조각으로 박살났다.
"빙허잠! 그 놈이 눈치를 챘다!"
이마의 핏줄기가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놈...... 여우새끼같은 놈. 그들을 가장 조심했는데도......."
그의 두 눈이 마치 횃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헌데 불끈 움켜쥔 그의 오른손 주먹에서 갑자기 허연 김이 피어오
르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박살난 술잔의 조각들이 모조리 기체로 화(化)해 버린
것이었다.
이때 반태서 특유의 냉혹한 음성이 감천곡의 고막을 울렸다.
"흥분하지 마시오. 아직은 우리의 계획이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오."
감천곡은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반노제, 자네는 모른다. 빙허잠이 어떤 놈인가를......."
"......!"
"놈은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한 일은 완전히 규명되기 전까지 절대
손을 떼지 않는다."
반태서는 차갑게 웃었다.
"지나친 걱정이오. 단언컨대 이번 일에는 일말의 허점도 드러낸 적이 없소."
감천곡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놈이 어떻게 눈치를 챘단 말인가?"
반태서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놈이 눈치챈 것은 아무 것도 없소. 놈이 알고 있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표면적인 상황일 뿐이오."
"......!"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남이 했을 때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게 되는 법이오."
순간 감천곡의 굳어 있던 얼굴에 어떤 희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반태서는 단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틀림없소. 빙허잠 그도 분명히 단옥교를 노리고 있었을 거요."
"......!"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먼저 우리 일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
오. 허나 그는 어쩌면 자신이 눈치챈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의혹
을 품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어떡하면 좋겠나?"
반태서는 차분히 말했다.
"그는 우리의 움직임을 기다릴 것이오."
"......!"
"만약 우리가 그것을 역이용하려면 당분간 모든 움직임을 중지해야 하오."
"중지한다......."
"상대가 기다리면 더 기다리고 상대가 움직이려 할 때 우리가 더
욱 빨리 움직이면 되는 것이오. 우리에겐 그럴 수 있는 시간과 능
력이 있소."
확신과 자신에 찬 음성이었다.
감천곡은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노부는 더 기다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네."
반태서는 마치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지체없이 생각을 털어 놓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편법은 뒤로 미루고 세 번째 편법을 먼저 시작하여야 하오."
감천곡의 눈이 번쩍 빛났다.
"순서를 바꾸자고?"
반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신도의 만년철동 속에 흐르는 철마기류를 찾아 감노형의 구철
마수와 사자철권의 최정수를 영호공자에게 터득시켜주는 것이오."
감천곡의 미간에 문득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렵네. 막강한 내공의 뒷받침 없이는 철마기류의 정화를 극한까
지 단전에 모을 수가 없어."
반태서는 조용히 말했다.
"아무튼 최종결정은 감노형이 내리시오. 소제는 결정권이 없으니까."
감천곡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감천곡이 생각을 끝내고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반시진이나 지나
서였다.
"좋아. 원래의 계획을 일 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순서를 뒤바꿔
감행한다. 영호공자, 그를 철신도로 보낼 것을 결정한다!"
사방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듯한 시뻘건 불이 그의 호안(虎眼) 가
득 일렁이고 있었다.
― 철신도로 보낸다!
편법(便法)― 그 세 번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