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2권 제25장 음모(陰謀) 속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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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주안상에는 그야말로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했다.
혁련소천은 푸짐하게 차려진 주안상을 앞에 놓고 봉황(鳳凰)이 수
놓인 화려한 비단금침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의 면전에는 일신에 연자색 유의(維衣)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이
날아갈 듯이 대례를 올리고 있었다.
"천첩 종정향, 소천주님께 인사드리옵니다."
체념이 빚어낸 결과인가. 섬연한 몸가짐과 구슬을 굴리는 듯한 옥
음이 그렇게 아름답고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허나 혁련소천은 어쩐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절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문득 탁자 위의 과일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덥썩 한입 베어 무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혁련소천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 목소리로 투덜
거렸다.
"벌어먹을...... 무슨 놈의 과일이 이렇게 신가?"
거침없이 터져 나온 그의 욕설에 막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주안상
앞에 다가 앉던 종정향의 아미가 보일 듯 말 듯 휘어졌다.
'저렇게 수치스러운 욕설을 함부로 내뱉다니.......'
욕 한 번 듣지도 해보지도 않았던 그녀에게 혁련소천의 한 마디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허나 종정향은 애써 내색치 않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그 과일은 묘강 특산품으로써 무척 달콤한......."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움찔 입을 다물었다.
혁련소천이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달콤하다고 해서 나에게까지 달콤함을 강요하지 마라.
나는 무조건 시다!"
그러고는 그는 입 안 가득 물고 있던 과일을 탁자 위에 모조리 내
뱉았다.
"못 믿겠으면 그것을 먹어봐라!"
종정향은 안색이 변했다.
입 속에서 실컷 우물거리던 물질을 뱉아 놓고 그걸 먹으라
니.......
참기 어려운 모멸감에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
다.
혁련소천은 냉소했다.
"흥! 왜 못 먹겠느냐? 그렇게 달콤하다면서......."
수치와 모멸감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되어 목줄기를 타고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뿌옇게 흐려지는 두 눈에 하필이면 공야진붕의 준수하고 기품어린
모습이 환상처럼 떠오른단 말인가?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
다.
'안돼! 울면 안 되는 거야.......'
그녀는 끝내 눈물을 내비치지 않는 놀라운 인내력을 보여 주었다.
이때 돌연 혁련소천의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와하핫핫핫......."
그러나 그는 이내 광소를 멎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무척 깊은 수양이군. 아주 많은 가르침을 받은 모양이야."
"......."
"쯧쯧......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감천곡 그 영감도 주책이
지...... 어쩌자고 하필이면 저런 쑥맥을 쯧쯧......."
종정향은 안색이 급변하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감천주를 영감...... 주책이 없다고......?'
그녀로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혁련소천은 문득 손가락 하나를 장난스럽게 까닥였다.
"이리 오너라."
종정향은 움찔 했다.
"이리 오라고 말했다."
종정향은 일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허나 그러는 순간에도 그녀의 몸은 조금씩 혁련소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한순간 혁련소천은 종정향의 턱을 거칠게 치켜들었다.
일순 종정향의 전신에 잔물결같은 경련이 일었다.
'치...... 침착해야 돼.......'
그런 부르짓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터졌다.
허나 어쩌란 말인가?
주책없이 자꾸만 떨려오는 이 마음을...... 이 몸을.......
혁련소천은 문득 희미하게 미소했다.
"아름다운 얼굴이야. 이 정도면 십만 명 중에서 한 명 골라내기도 힘들겠어."
"......!"
"허나 그대는 너무 순진하다. 물론 그 순진성이 때로는 악(惡)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종정향은 겁먹은 표정으로 황망히 대답했다.
"천첩의 우둔함을 용서......."
"후후...... 물론 그렇겠지. 허나 내가 설명을 해주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다 문득 혁련소천은 갑자기 생각난 듯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
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쑥맥이군. 천하의 미녀를 앞에 두고 헛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니......."
이어 그는 종정향을 향해 불쑥 한 마디 내던졌다.
"벗어라!"
"예?"
"모조리 벗어라. 몸매도 얼굴에 못지 않은지 보고 싶구나."
종정향은 가슴이 철렁했다.
'드...... 드디어.......'
그 순간 공야진붕의 모습이 재차 뇌리를 스쳐갔다.
'진붕...... 이젠 끝이에요!'
종정향은 핏기없는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막다른 골목...... 이미 올 때까지 온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종정향은 마음을 모질게 굳히며 천천히 상의의 옷고름을 풀었다.
순간 상의는 금세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곧이어 눈부시게 희고 고
운 목덜미의 우아한 선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됐다!"
"......."
"입어라."
"네?"
"벗지 말란 말이다."
종정향은 의혹 어린 눈길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허나 그러는 순간에도 그녀의 두 손은 본능적으로 옷고름을 동여매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마주보며 문득 괴소를 발했다.
"후후...... 내가 변덕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종정향은 급히 머리를 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거짓말!"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뒷짐을 지며 야릇한 눈빛으로 종정향을 응시했다.
"그대는 내가 여자를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혁련소천은 그녀의 주위를 천천히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열두 살 때 동정(童情)을 버렸다. 한 기루(妓樓)에서......."
"......!"
"후후후...... 당시 내 상대는 동기(童妓)였는데 무척 예뻤지. 나
이가 아마 열다섯이라 했던가? 처녀였지만 아주 기술이 훌륭했어."
이상한 과거가 밝혀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문득 종정향의 옆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묻겠다."
"무슨......."
"너는 남자를 어느 정도의 시간이면 녹초로 만들 수 있느냐?"
종정향의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녀는 느닷없는 질문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그건......."
"한 시진? 아니면 두......?"
"......!"
"손의 기술이 좋으냐? 혀의 기술이 뛰어난가?"
'그, 그만......!'
집요한 질문공세에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헌데 그 다음에 혁련소천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종정향의 몸
을 돌처럼 굳게 만들었다.
"공야진붕을 생각하느냐?"
"......!"
"공야진붕을 무척 사랑했다고 들었지."
종정향의 전신에 파도치듯 경련이 일었다.
혁련소천은 여전히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야릇한 기소를 발했다.
"흐흐흐...... 공야진붕, 그 자는 쓸모 없는 책벌레에 불과할 뿐이야."
순간 종정향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홱 꽂혔다.
"그를 비웃지 마세요. 그는 진정한 군자예요. 최소한 당신보다는 백 배는 뛰어......."
억눌렸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탓이리라!
말대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녀의 입에서 봇물 터지듯 말의
홍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말이 끝날 즈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무서운 실수를 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두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았다.
"처...... 천첩이 실언을......."
"와하핫핫핫......."
순간 혁련소천은 몸까지 흔들며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종정향은 그 웃음을 들으며 언뜻 죽음을 떠올렸다.
'아아! 절망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그녀는 갑자기 그 자리에 더 서 있기가 힘들 만큼 온몸의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때 혁련소천은 광소를 멈추고 손 끝으로 종정향의 코끝을 가리켰다.
"그대는 이 세상을 너무 모른다."
"......?"
"공야진붕이 군자라고? 그대는 그가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인 줄 알고 있겠지?"
"무...... 무슨......."
"말해줄까? 공야진붕 그 자는 사실 무척 음흉한 인물이다. 무공
또한 대단한 경지까지 도달한 인물이고."
의외로 종정향은 그런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 자는 지금 무슨 목적으로 진붕을 모략하는 것일까?'
오히려 혁련소천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그녀였다.
문득 혁련소천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흘렀다.
"그대가 공야진붕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중추절 호남성 천불사(千佛寺)에서 였다."
종정향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그것을 어떻게......."
"후후...... 공야진붕은 바로 그날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인 양
의도적으로 그대에게 접근했다. 그의 기품과 용모, 유창한 언변에
그대는 빠져들었고 곧 사랑을 느꼈지."
"......!"
"특히 그가 공야세가의 소가주임을 안 순간 그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지."
종정향은 문득 겁이 덜컥 났다.
'도대체 저 자는 나의 일을 어찌 저렇게 손바닥 들여다 보듯 잘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혁련소천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후 석달 동안 그대와 공야진붕은 호남성을 두루 여행하며 사랑
을 키웠다. 허나 공야진붕은 그대에게 손끝 하나 건드린 적이 없다."
그 말에 종정향은 자랑스런 표정을 지으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군자였으니까요."
음성은 나직했으나 혁련소천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분명했다.
혁련소천은 웃었다.
"후후후...... 군자? 천만에...... 그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은 것
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
"그 첫째는 그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그가 익힌
무공이 동자공(童子功)의 일종이었기에 동정을 깨뜨리면 안 됐기 때문이다."
"거...... 짓말."
역시 나직한 중얼거림이었으나 거기에는 강한 자부심이 실려 있었다.
혁련소천은 능글능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후후후...... 공야진붕은 군마천에 들어와서도 그대를 무척 잘
대해 주었다. 그대가 완전히 사랑의 포로로 변한 것도 무리는 아
니었지."
"......!"
"기억해 보아라. 그는 그대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 구천십지만마전은 마(魔)의 단체라오. 천하를 위해서라도 언젠
가는 반드시 쓰러져야 하오.
'똑같다. 한 마디도 틀리지 않았어.......'
종정향은 경이의 시선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혁련소천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삼 개월 전 공야진붕이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삼십육세가 중 종정세가는 군마천 내부조직에 대해 가장 잘 파악
하고 있는 만큼 군마천의 약점을 알아내 달라고...... 맞았는가?"
"......!"
"그는 이렇게 말했었지."
― 군마천에도 무엇인가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것이오. 그것을 알아내 주시오!
"그런 것을 왜 알아야 하느냐는 그대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 천하의 정의(正義)를 위해서!
"매우 그럴 듯한 대답이었지."
"그것은 그의 진실이었어요."
혁련소천의 화술(話術)에 현혹되었음인지 종정향은 자못 대담하게 응수했다.
혁련소천은 기소를 흘렸다.
"진실? 후후...... 그럴까?"
그는 문득 안색을 차갑게 굳히고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그대를 진정 사랑했다면 감천주가 그대들 간의
파혼을 명령했을 때 한 번쯤은 극력반대를 했어야 했다. 허나 그
는 오히려 몸부림치는 그대를 설득하며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 천하를 위해서라면 몸 하나쯤은 얼마든지 바쳐도 무방하오. 소
천주가 될 자를 이용해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군마천의 비밀을
파악해 주시오!
혁련소천의 얼굴에 무서운 분노가 어렸다.
"천하에서 가장 못난 놈이 여인의 힘을 빌어 어떤 일을 성사시키
고자 하는 놈이다. 바로 그 놈처럼......."
순간 종정향은 귀를 틀어막으며 신음같은 음성을 내뱉았다.
"그만! 더 듣지 않겠어요......."
허나 혁련소천은 논리정연한 어조로 계속 몰아붙였다.
"공야진붕, 그 자의 왼손을 보면 손톱이 유난히 희고 미간에 가끔
붉은 선이 나타난다. 그것은 그가 일종의 사공(邪功)을 연성했다는 흔적이다."
"......."
"철저한 음모였다. 그는 애초부터 외부의 어떤 무서운 단체의 일
원이었고 그대에게 접근했던 것도 그대를 이용할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정향의 안색은 이미 핏기 한점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귀를 틀어막은 채 애원하듯 말했다.
"더 이상 진붕을 모략하지 마세요. 그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혁련소천은 씩 웃었다.
"후후...... 귀를 막고도 듣긴 다 듣는 모양이군. 그것은 곧 그대
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지."
종정향은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쳤다.
"몰라요.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허나 진붕과 저는 서로를 죽도
록 사랑했어요. 그것만은 진실이었어요."
"진실? 후후...... 이 세상에서 진실이란 무척 희귀해졌어. 가식
과 거짓이 난무하는 게 현실이란 말이다."
"궤변이에요."
"어쩌면 궤변일지도 모르지. 허나 세상은 또 궤변으로 뭉쳐진 것일지도 모른다."
"......!"
"궤변의 합리화를 위한 궤변이라고 말하고 싶으냐?"
종정향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머리 속에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
기 때문이었다.
이때 혁련소천은 문득 품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냈다.
이어 종정향의 눈 앞에 쫙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읽어보아라."
"보지 않겠어요."
대답은 그렇게 했다.
허나 서찰의 내용는 보기 싫어도 그녀의 동공 속에 일목요연하게
비쳐지고 있었다.
<감천곡을 천산으로 유인해서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로 죽일
것이다.
너는 종정향과의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되 동자공(童子功)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군마천은 구천십지만마전을 붕괴시키기 위한 첫번째 목표, 잠마
(潛魔)의 한(恨)은 반드시 푼다.>
종정향의 몸은 보기 딱하도록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후후...... 바로 이 서찰로 인해 나는 지금 내가 됐지."
혁련소천은 애매모호한 말을 중얼거리며 서찰을 품 속에 집어넣었
다.
이어 그는 소매춤에서 또 하나의 서찰을 꺼내 종정향의 코 앞에
내밀었다.
"이것도 보여줄까?"
종정향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서찰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힘겹게
내밀어가고 있었다.
오오! 하늘이시여.......
도대체 나는 어찌하라고.......
사랑.
연보랏빛 사랑에 먹물이 뿌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