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권 제22장 (22/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22장 시작된 운명(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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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목산(西天木山) 일천이백봉(一千二百 )  동북방(東北方). 그

  곳에는 마치 하늘을 꿰뚫을  듯한 일흔여섯 개의 칼날같은 봉우리

  가 둥그렇게 원진(圓陣)을 이루며 솟아 있었다.

  그 가운데는 백이십여만 평의  분지가 천험의 요새를 이루며 광대

  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 분지에는  일천여 개의 고루거각(高褸巨

  閣)이 마치 웅대한 성(城)인 양 우뚝 솟아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군마천(君魔天).

  당세(黨勢)를 주름잡는 일백 명의 초강거마(超强巨魔)와 기라성같

  은 일만(一萬)의 초절정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혁련소천이 군마천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감천곡에게서 구천십지만마전의  내부 구조와 모든

  고수들의 명단 및 특징 등을 자세히 설명 들었다.

  그 내용은 천하의 혁련소천조차 기가 질릴 만큼 너무나 엄청난 것

  이었다.

  그리고 감천곡은 자신의 독문 무공(獨門武功) 두 가지를 혁련소천

  에게 전수했다.

  구철마수(九鐵魔手)!

  사자철권(獅子鐵拳)!

  감천곡은 그 두 가지 무공의 유래를 이렇게 덧붙여 설명했다.

  ― 팔백 년 전 제 일대 군마천주 번대해께서 남해 철신도(鐵神島)

  의 만년철동(萬年鐵洞)에서 천년온지를  먹고 만년철동 속을 흐르

  는 철마기류(鐵魔氣流)를 흡수, 장장 사십 년간 철의 기운을 연구

  한 끝에 창안된 광세절학(曠世絶學)이다.

  구철마수(九鐵魔手).

  군마천의 천주(天主)에게만 전해지는 비전기공(秘傳奇功)!

  단전에 철(鐵)의 기운을  흡수, 그 힘(刀)을 오지(五指)로 쏟아내

  는 것으로써,  제 일식(第一式)  철륜풍(鐵輪風)에서 마지막 구식

  (九式) 철탄극(鐵彈極)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살인 위주의 패도지

  학(覇道之學)이다.

  특히 철장살음(鐵掌殺音)!

  구천마수의 초식이 전개되면서  발생되는 가공한 쇳소리는 웬만한

  고수라면 듣기만 해도 칠공에서  핏줄기를 내뿜고 절명케 되는 죽

  음(死)의 소리이다.

  사자철권(獅子鐵拳).

  천하에 이보다 패도적이고 위력적인 권공(拳功)은 없다.

  일단 시전되면 능히 산을  허물고 바다를 뒤엎을 듯한 권강(拳 )

  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것에 맞고 살아 남을 생명체는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이것에 격중된 사람의 몸에는 티끌만큼의 흔적도 없다.

  생각해 보라!

  피떡처럼 짓뭉개진 고깃덩어리에서 무슨 흔적을 찾아낸단 말인가?

  박살내지 못할 것이 없는 천하 으뜸의 권공(拳功)!

  그것이 바로 사자철권이었다.

  ― 천추무상별부의 무공이 아무리 많아도 나의 무공과 비슷하거나

  능가하는 것은 결코 세 개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혁련소천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감천곡의 자존심이었

  다. 헌데 감천곡은 이런 말을 함으로써 혁련소천에게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다.

  ― 현재 구철마수와 사자철권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내

  에 잠재된  철의 기운, 즉 철마기(鐵魔氣)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 만약 철신도(鐵神島)를 찾아 만년철동 속에 흐르는 천마기류의

  기운을 단전에 모을  수만 있다면 능히 천하제일공(天下第一功)으

  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

  굵고 탐스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지금, 서천목산 전체는

  온통 은백(銀百)의 설경(雪景)을 이루고 있었다.

  군마천의 뒷산의 한 소롯길에 한 인영이 눈을 맞으며 거닐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거닐은 듯 그의 머리와 어깨에는 함박눈이

  제법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심사가 어지러운지 그가 밟고  지나온 이십여 평 남짓한 공지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문득 혁련소천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목화송이같은

  눈송이가 잿빛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굵은 눈송이  하나가 그의 눈 속에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얼마전 제갈천뇌와 은밀히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그는 물었었다.

  ― 군마천 내에서 감천곡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고수는 누구요?

  ― 군마천은 모두 일전(一殿), 이각(二閣), 팔당(八堂), 삼십육세

  가(三十六世家)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강한 고수를 꼽

  으라면 일전(一殿) 즉 백신전(百神殿)의 전주 백신제종(百神制宗)

  사도광(司徒光)이 될 것입니다.

  ......

  ― 허나 이각(二閣)의 각주(閣主) 천패도(天覇刀) 부철룡(扶鐵龍)

  이나 쌍지빙탄(雙指氷彈) 도위강도  절대 백신제종의 하수는 아닙

  니다.

  ― 강(强)함은 좋으나 너무 겉으로 드러나오. 드러나는 고수는 반

  드시 적에게 주의를 주는  법, 무공은 좀 떨어져도 드러나지 않는

  자는 없소?

  ―  군마천에는 삼  인(三人)의  잠룡(潛龍)이  있습니다. 짐작컨

  대...... 그들은  대종사께서 바라시는 그런  인물들일 것 같습니다.

  ― 그들의 이름은?

  혁련소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중 한 명이 적용사문(狄容史文)...... 군마천 천무봉(天舞峯)

  에 있는 적용세가(狄容世家)의 가주(家主)이다!'

  그는 다시 거닐기 시작했다.

  '적용사문...... 나이는 스물두  살 특기는 혈편마검(血鞭魔劍)을

  사용하지만 그의 무공수위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는 거듭 생각했다.

  '적용세가는 군마천의 소속이면서도  이미 사백 년 전부터 군마천

  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문득 그의 입가로 괴이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리고 적용사문,  그에게는 아름답고 순진한  여동생이 한 명있

  지. 이름이...... 적용희산이라고 했던가?'

  거센 바람이 불어 포근한 함박눈이 금세 거친 눈보라로 변했다.

  마치 머지않아 풍운(風雲)이 일 것을 예감하듯......!

  간결하면서 단아하게 꾸며진 이곳  정실에 두 명의 인물이 마주보

  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혁련소천과 일신에 학창의(鶴 衣)를 걸친 이십 이삼

  세 가량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단정히 앉아 있는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일신에서 풍

  기는 기우(氣宇)가 결코 범상치 않은 학자풍의 청년!

  그가 바로 적용세가의 가주인 적용사문이었다.

  적용사문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입을 떼었다.

  "뜻밖입니다. 영호공자께서 저의 집을 방문하실 줄은......."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본인이 귀공을 방문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적용사문은 눈에 이채를 담았다.

  "혹시 물어도 실례가 안 된다면......."

  "귀공께는 적용희산이라는 한 명의 아름다운 누이동생이 있다고 들었소."

  "......!"

  "본인은 그 적용소저를 보고 싶어 온 것이외다."

  "......!"

  적용사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허나 그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으며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조금 전의 그 말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음......."

  혁련소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보긴 제대로 보았구나!'

  혁련소천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원래 혁련소천은 적용사문을 처음  보는 순간 마치 심산을 노니는

  한 마리 백학(白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받았었다.

  적용사문의 전신에 흐르는 기도(氣度)는 그 토록 고고하고 수려한 것이었다.

  '이런 친구를 혼탁한 세계로 끌어들인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해짐을 금치 못했다.

  허나 어찌하랴? 이미 내친 걸음이고 시작된 굿거리인 것을.

  문득 혁련소천은 표정을 진지하게 가다듬고 말했다.

  "사실...... 본인이 적용세가를 찾은 이유는 바로 귀공의 도움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허나......."

  적용사문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실 테지만 적용세가는 이미  사백 년 전부터 군마천의 일에 관여치 않았습니다."

  "......!"

  "지금 이 적용세가에는 저와 누이동생 둘만 살고 있을 뿐, 도움을

  드릴 말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정중하면서도 상대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점잖은 거절이었다.

  헌데 혁련소천은 그 말에 의외로 쉽게 포기의 뜻을 내비쳤다.

  "귀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군요. 역시 없었던 말로 하겠습니다."

  "허허...... 이거 날도 궂은 데 애써 찾아오신 분을......."

  "오라버니, 술상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때 문 밖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적용사문은 반색하며 말했다.

  "오! 어서 들어오너라."

  그러자 곧장 문이 열리며 바닥을 밟는 사뿐한 발자국 소리가 일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

  순간 혁련소천의 얼굴에 적이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기껏해야 열일곱  살은 넘지 않은  소녀(少女)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일신에는 평범한 청의(靑衣),  구름결처럼 부드럽고 윤이 나는 흑

  발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허리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렸고, 화장

  기 하나 없는 얼굴이 그렇게 신선하고 청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심산유곡에 남몰래 핀 수선화의 아름다움이 이러할까?

  적용희산은 그렇듯 고고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였다.

  '역시 그 오빠에 그 동생이구나......!'

  혁련소천은 내심 감탄하며 적용사문에게 시선을 옮겼다.

  적용사문은 그윽한 눈길로 적용희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그런  그의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누이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자 적용사문...... 이대로 썩히기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다......!'

  혁련소천은 내심 중얼거리면서 제갈천뇌가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 적용사문은  십이 년 전  만박천옹(萬博天翁) 노자량의 문하로

  입문, 수학(修學)했습니다.

  ― 만박천옹...... 그는 이천  년 무림사상 가장 위대한 하도낙서

  (河圖洛書)의 대가(大家)로  평가되며, 그가  죽은 지금 기관진법

  (機關陣法)이나 토목건축(土木建築) 등의 분야에서 적용사문을 능

  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박천옹...... 천개기천 사사무 노야도 그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지......!'

  ― 만박천웅, 조약돌  다섯 개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을 수 있

  고, 젓가락 한 짝이면 능히  천 명의 고수를 가둘 수 있는 위인이지.

  문득 혁련소천의 동공 두 눈  깊숙한 곳에 굳은 의지의 빛이 번쩍 스쳤다.

  '반드시...... 나의 한쪽 팔로 삼는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인물이다......!'

  이것은 적용사문의 운명이 타인에 의해 결정된 순간이었다.

  이때 적용희산이 혁련소천의 앞에 곱게 술상을 내려놓았다.

  고개는 다소곳이 숙였고 시선은 술상에 고정시킨 모습이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귀공의 누이는 하늘  아래 둘도 없을 미인이오. 본인

  은 솔직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미녀만 보면 생각치도 않았던 말이 술술 흘러 나온다는 혁련소천.

  허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적용사문은 담담히 미소하며 적용희산에게 말을 건넸다.

  "영호공자이시다. 인사드려라."

  그러자 적용희산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그녀는 혁련소천을 돌아보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적용희산이옵니다."

  혁련소천은 정중히 포권했다.

  "영호풍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혁련소천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소름끼치도록 푸른

  빛이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적용사문은 술병을  집어가고 있었는지라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허나 적용희산은 일순 동공이 칼 끝으로 찔리우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다만 고통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현기증을?'

  적용희산은 섬섬옥수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어찌 그녀가 알겠는가?

  혁련소천이 겪었던 인간한계에 대한 십관(十關)의 도전(挑戰)!

  그 중 하나가 색관(色關)이었고, 색관의 최후대법(最後大法)이 바

  로 미령심광(迷靈心光)이었음을......!

  천기개천 사사무는 바로 그 최후대법을 혁련소천에게 심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 소천, 너는 차후 미령심광(迷靈心光)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이 대법을 실시하면 어

떤 여인이라도 사련(邪戀)에 빠진다. 애정의 그물에 걸려 너 외에는 그 어떤 인물도 사랑하

지 않는다. 네가 받아주지 않으면...... 그 여인은 죽는다!

  아아...... 그랬던가?

  그런 것이 미령심광이었던가?

  천개기천 사사무는 또 한 마디 덧붙였다.

  ― 태양검제 용늙은이는 네가 마음에 들면 어떤 여인이라도 취하

  라 했으나 말짱 개소리다. 허나...... 네가 그 여인을 받아들일

  각오가 됐다면 시전해도 좋다. 단 그런 각오 없이는 절대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이때 명상에 잠겨 있던 혁련소천의 코 앞에 한 잔의 술이 내밀어졌다.

  "받으시겠소? 영호공자."

  혁련소천은 흠칫 정신을 되찾았다.

  이어 그는 씩 웃으며 술잔을 받아 들었다.

  받아들면서 그는 말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각오는 했소. 받아들이면 될거 아뇨?"

  적용사문은 느닷없는 그의 말에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알겠는가?

  혁련소천의 그 말은 곧 죽은 사람을 향해 다짐한 말임을.

  이로써 적용희산은 평생토록 신랑감 구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혁련소천과 적용사문은 그후 한 시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학문에 관한 것이었고, 대화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은 상대의 깊은 문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문에 관한한 천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그들, 제대로 적수를 만난 셈이었다.

  헌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잘나가다가도 하도낙서에 관한 말만 나

  오면 의식적으로 적용사문이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는 것이었다.

  혁련소천은 그때마다 의혹을 느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윽고 혁련소천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가봐야 되겠소.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던 모양이오."

  적용사문은 덩달아 몸을 일으키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모처럼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문을 향해 걸음을 떼놓았다.

  "공연히 시간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별 말씀을......."

  문 밖은 눈보라 때문인지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문득 의미심장한 눈길을 적용사문에게 돌렸다.

  "차후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좋겠소만......."

  적용사문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혁련소천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인생사란 누구도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법,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 주시오."

  "그렇게 하겠소이다."

  적용사문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허나,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였으니......

  혁련소천은 떠났다.

  적용사문은 멀리 떠나가는 혁련소천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훌륭한 자다...... 감천곡은 정말 대단한 후계자를 맞아 들였어......."

  문득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이 드러워졌다.

  "오 년 전...... 그 맹세만 아니라면 한 번쯤......."

  중얼거리다 말고 그는 제풀에 놀라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조어린 탄식을 내뿜었다.

  "후후...... 내가 무슨 생각을...... 다 부질없는 생각이야......."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순간 적용사문의 눈이 커졌다.

  적용희산이 문설주에  기대어 넋나간 듯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청순하게 빛나던 눈이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상

  태로 변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이가......?'

  적용사문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며 그녀를 가만히 불러 보았다.

  "희산아......."

  적용희산은 대답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적용사문은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조금 크게 불렀다.

  "희산아......!"

  그러자 적용희산은 여전히 하늘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오라버니......."

  "......?"

  "그 분...... 영호풍이라...... 했던가요?"

  적용사문은 일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이 아이가...... 사랑을......?'

  시작된 운명(運命)은 이미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서서히 성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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