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권 제21장 (21/112)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21장 야릇한 여심(女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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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광사에서 멀지 않은 한 야트막한 언덕 위, 수령(樹齡)을 짐작키

  어려운 한 그루 거목(巨木)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었다.

  그 거목 옆에는 한  여인(女人)이 미풍에 옷자락을 가볍게 살랑이

  며 서 있었다.

  헌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미(美)가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인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티끌만큼의 흠집도 찾아낼 수 없는 십전완

  미(十全完美)의 실로 인세(人世)에 다시 있기 힘든 미녀(美女) 중의 미녀!

  옥산랑...... 바로 그녀였다.

  붉디붉은 휘장처럼 드리워진 서천(西天)을 바라보며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서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을 고스란히 받고 서 있기 때문인가?

  이 순간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때 옥산랑의 등 뒤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일었다.

  옥산랑의 얼굴에 언뜻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발자국 소리는 그녀의 바로 등 뒤에 와서 멎었다.

  곧이어 한 줄기 부드러운 음성이 옥산랑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아름답소. 붉은  노을 속의 소저는  그림에서만 보았던 선녀처럼 너무도 아름답소."

  옥산랑은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시선에 노을 빛을  등진 준수한 혁련소천의 웃음띤 얼굴이

  들어왔다.

  한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키며 야릇한 눈빛이 교환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기껏해야 한 자 남짓, 상대방의 숨소리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어느 사이 옥산랑의 눈가에 가벼운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 동안 말솜씨가 많이 느셨군요."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모양이오. 미녀만 보면 생각지도 안았던 말이

  술술 흘러나오는 걸 보니......."

  옥산랑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질투가 나는군요. 천하에 쌓인 것이 미녀이니...... 당신의 입술

  에서는 잠시도 침이 마를 때가 없겠군요."

  혁련소천은 짐짓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천하에 미녀는 많겠지만 내가 칭찬할 정도의 미녀는 별로 없을 것이오."

  옥산랑은 방긋 웃었다.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군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니까."

  옥산랑은 피식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오늘 당신이 그냥 갈 줄 알았어요."

  혁련소천은 문득 기소를 발했다.

  "후후후...... 아름다운 약혼녀와의 약속을 잊고 어찌 그냥 갈 수 있겠소."

  그 말에 옥산랑은 입술을 가볍게 삐죽거렸다.

  "피...... 비록 양가가  합의는 했을지언정 나에게 있어 약혼이란

  아무런 의미나 구속도 될 수 없어요."

  순간 혁련소천은 눈을 크게 뜨며 의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 파혼 선언이오?"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옥산랑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문득 발그레한 홍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천하에서 나 옥산랑의 남편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에요."

  그것은 너무도 솔직한 연보랏빛 사랑의 고백이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미소했다.

  "광오한 말이군. 허나...... 맞기는 맞는 말이오."

  옥산랑은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생긋 웃었다.

  반짝 드러나는 치아! 웃음과 어울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때 문득 혁련소천의 양손이 옥산랑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휘어 감았다.

  난생 처음 남자의 손길을 접했기 때문인가?

  옥산랑의 눈빛이 일순 초점을 잃고 심하게 흔들렸다.

  허나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옥산랑은 목덜미까지 새빨갛

  게 붉히며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화편처럼 붉고 육감적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달짝지근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화려한 유혹이었다.

  유난히 길게 자란  그녀의 속눈썹은 어떤 미지의  흥분을 담은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가?

  그 토록 어떤 기대와  설레임을 억누르며 기다렸건만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옥산랑은 의아한 마음에 살포시 눈을 떴다.

  혁련소천은 야릇한 미소를 띤 채 응시하고 있을 뿐 도무지 움직일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옥산랑은 마치 찬물을 덮어쓴 기분이었다.

  "다...... 당신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그녀의 전신을 태풍처럼 휘감아왔다.

  "이 손...... 당장 풀어요!"

  허나 혁련소천의 두 손은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완벽한 아름다움이야. 산랑...... 당신은 너무 예뻐......."

  "흥! 놔요. 이젠 늦었...... 읍!"

  순간 꽃잎같은 입술 위로 뜨거운 또 하나의 입술이 덮어졌다.

  "으음...... 읍......!"

  본능이었으리라. 짧은 순간이나마 옥산랑이 거부의 몸짓을 보인 것은.

  혁련소천은 천기개천  사사무에 의해 인간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

  열 가지 관문을 거친 적이 있다.

  그 중 가장 쉬운 듯  하면서도 견디기 어려웠던 관문이 바로 색관(色關)이었다.

  혁련소천의 입맞춤 솜씨는 능란하기 짝이 없었다.

  뜨겁고 달작지근한 그것은 또 다른 공간을 마음껏 뛰놀며 춤을 추고 있었으니......

  "으음...... 음......."

  옥산랑같은 초보자가 완전히 입술의  포로로 변한 것은 어쩌면 당

  연한 일이었다.

  황홀함이여...... 감미로움이여......

  "산랑."

  "응......?"

  거목에 기대선 두 남녀, 여인은 아직도 꿈을 꾸듯 몽롱하고 황홀한 표정이었다.

  혁련소천은 옥산랑의 뺨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 약속하리라."

  "무슨......?"

  "누가 뭐래도 정실 자리는 그대 것이오."

  옥산랑은 배시시 웃으며 아무 생각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말을 듣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처럼.

  허나 그녀는 그 순간 깨닫지 못했다.

  ― 정실은 네 것이나 처첩(凄妾)은 얼마든지 두겠다―

  혁련소천의 말속에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음을.

  어쨌든 타오르는 오늘의 석양은 유난히 붉고 아름다웠다.

  여기 마도(魔道)의 영원한  불멸혼(不滅魂)을 기원하며 세워진 악

  마(惡魔)의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지난 팔백 년 동안 마도 출신의 모든 고수들은 그 앞에 피로써 충

  성을 맹세해야 했고, 모든  고수들은 그들의 무학 중 가장 뛰어난

  하나를 그 아전에 바쳐야만 했다.

  그 마도 고수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조차 없었고 또한 그들이 바

  친 절예(絶藝)는 하나의 산(山)을 이루었다.

  마도의 전(全) 고수들이 속해 있고, 마도무학의 절예가 산처럼 쌓

  여 있는 이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마전!

  <구천십지만마전(九天十地萬魔殿).>

  아홉 하늘(九天)과 열 개의  땅(十地)을 통틀어 이 세상에 존재하

  는 지상최강(地上最强)이자 절대무이(絶代無二)의 대성전!

  서천목산(西天木山)  일천이백봉(一千二百 )을  종횡으로 에워싸

  고, 그 가운데 오천여만 평의 지상 위에 위용 당당히 세워진 하늘

  아래 가장 큰 대전......!

  그곳이 바로 구천십지만마전이다.

  가을이 터질  듯 여물어 있던 만추(晩秋)의  어느 날, 혁련소천은

  드디어 감천곡과 더불어 구천십지만마전에 도착했다.

  십일월(十一月) 십오일(十五日), 탐스런  만월(滿月)이 휘영청 떠오른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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