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20장 살인(殺人)...... 그 첫번째!
━━━━━━━━━━━━━━━━━━━━━━━━━━━━━━━━━━━
십일월(十一月) 초여드레(八日).
이 날은 혁련소천이 장군부에 든 지 꼭 다섯 달이 되는 날이었고,
감천곡은 두 달이 채워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감천곡이 혁련소천과 더불어 장군부를 떠난 것도 바로 이 날이었다.
뿌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질풍처럼 질주해 가는 일진의 기마대,
그들의 가운데에는 흑단목으로 된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쾌속하게
치달려 가고 있었다.
마차에 걸려 찢어질 듯 펄럭이는 하나의 깃발엔 <군마천위(君魔天
威) 만웅앙복(萬雄仰伏)>이란 글귀가 쓰여져 있다.
바로 감천곡이 타고 왔던 그 마차였다.
마차와 삼백여 기의 인마(人馬)떼는 무서운 속도로 천궁산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장군부의 정문 앞에는 영호대인을 위시한 석대선생 등 많은 사람
들이 모여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차가 시야에서 벗어난 지 이미 일각이 지났지만 영호대인은 웬
일인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저 물같이 잔잔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이윽고 영호대인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곤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 말뿐, 영호대인은 서서히 대문 안으로 멀어져 갔다.
그가 들어가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은 석대선생 그 혼자뿐이었다.
석대선생은 마차가 사라져 간 방향을 쳐다보며 굳은 듯이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꽉 다물렸던 입술이 떼어지며 한 줄기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감천곡...... 너는 실수했다. 네 능력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인간을 거둔 셈이지......."
문득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 괴이한 광채가 피어올랐다.
"앞날이 보인다. 구천십지만마전...... 머지 않아 미증유의 대폭
풍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석대선생은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순간 베면 푸른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푸른 하늘이 그의 동공을 가득 메워 왔다.
헌데 무의식 중인가?
"무량수불......."
느닷없이 한 소리 도호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불쑥 새어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소리는 그 자신조차 알아듣기 힘들 만큼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석대선생은 은빛 수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직이 웃었다.
"허허...... 아직도 도호를 잊지는 않았군."
도호만큼이나 미약한 중얼거림이었다.
석대선생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대문 근처의 수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시선을 바로 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너무 강해...... 그것이 흠이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석대선생은 대문 안으로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이때 수림 속의 바위 뒤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마의에 목검(木劍) 한 자루를 품에 안고 있는 영호검제 바로 그였다.
영호검제는 대문 안으로 멀어져가는 석대선생을 응시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너무 강하다고? 흐흐흐...... 물론 강하면 부러지기도 쉽겠지.
허나 강이 극(極)에 이르면 절대 부러지지 않는 법이야, 석대선생!"
그는 끝말에 가장 확실한 억양을 주었다.
"셋째 아우, 너는 만마전...... 나 영호검제는 너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어!"
순간 영호검제의 눈빛이 섬뜩하리만큼 차갑게 굳어졌다.
"흐흐흣...... 머지않아 진정한 마종(魔宗)이 누군지 가려진다!"
차가운 괴소와 함께 영호검제의 몸이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두두두두...... 두두두......
타오르는 석양 속에서 일진의 기마대가 질풍처럼 치닫고 있었다.
바로 장군부를 떠나온 군마천의 고수들이었다.
마차 안엔 네 명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감천곡과 혁련소천, 무형천궁 공손무외와 또 다른 한 명이었다.
그 또 다른 한 명은 일신에는 피보다 붉은 홍의를 걸치고 있었고,
유난히 긴팔에 등이 낙타처럼 툭 불거진 꼽추 노인이었다.
헌데 그 노인의 얼굴을 어찌 인간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벌레가 기어가듯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상처로 뒤덮인 얼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디가 눈이고 코인지 도무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참하게 짓뭉개진, 진정 꿈에 볼까 두려운 끔찍스러운
모습이었다.
홍포구마성 반태서―!
사천(四川)에서 이 이름은 곧 죽음으로 통한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고 또한 한 치의 오
차도 허용치 않는 치밀하고도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
팔십 년 전, 당시 사천제일(四川第一)의 귀공자로 일컬어지던 그
는 불과 이십육 세의 나이로 홍의교의 교주(敎主) 자리에 올라섰다.
그후 십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준수했던 용모를 스스로 무참하게
망가뜨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사천제일뇌(四川第一腦)!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이성만 찾되 절대적으로 감정을 배제하는 냉
혹하고 치밀한 성격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별호였다.
마차 안에는 오랫동안 기이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장군부를 떠난 이후 그들 중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감천곡이 침중한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반노제, 자네는 이번 계획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홍포구마성 반태서에게 묻는 말이었다.
반태서는 눈알을 한 차례 빠르게 굴린 후 냉혹한 어조로 대꾸했다.
"만마전의 열아홉 단체는 그 실력이 모두 백중지세요. 또한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을 터인즉......."
"결론은?"
"실로 어려운 일이오."
반태서는 문득 싸늘한 눈빛을 혁련소천의 얼굴에 꽂았다.
"문제는...... 오직 영호공자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소이다."
그 말에 감천곡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점은 안심하게. 영호공자의 능력은 나 감천곡이 이미 인정하고 있으니까."
반태서는 혁련소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세 가지 편법 중 한 가지만 성공했을 뿐이오. 나머지
두 가지가 모두 끝난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감천곡은 나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역시 홍포구마성다운 말이야."
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이 순간 혁련소천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편법...... 또 어떠한 것들일까?'
그는 일종의 호기심마저 느꼈다.
헌데 그때 느닷없이 한 줄기 전음이 혁련소천의 귓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단지마입니다.)
혁련소천은 내심 흠칫했으나 표정에는 티끌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귀찮은 일이 생겼습니다.)
(.......)
(자소천의 서열 육위고수(六位高手)인 철환(鐵丸) 소남붕(蘇南朋)
이 대종사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
(문제는 놈의 무공이 아니라 놈이 영호풍의 진면목을 아는 유일한 놈이라는 것입니다.)
(.......)
(일곱 째의 말에 의하면 놈은 오 년 전 천간산에서 영호풍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혁련소천의 표정은 시종 담담했다.
한단지마의 전음이 침중하게 이어졌다.
(대종사님의 명령을 바랍니다.)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불쑥 물었다.
(소담붕은 누가 쫓고 있소?)
그렇게 묻는 그의 입은 여전히 꽉 다물린 상태였다.
심기어전(心氣語傳).
최소한 이백 년 공력 없이는 시전이 불가능한 전음술의 최고봉(最
高峰)이 너무도 쉽게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한단지마는 즉시 대답했다.
(삼생다라(三生多羅)가 뒤쫓고 있습니다. 그들 삼 인의 능력이면 소담붕 정도는 충분히.....)
(추격을 중지하라 전하시오.)
(......!)
(내가 직접 처리하겠소.)
(알겠습니다!)
(어서 가시오. 마차의 밑바닥이라 오래 있기가 불편할 테니까.......)
(흐흐흐...... 역시 대종사님은......!)
그 말을 끝으로 한단지마의 전음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당혹한 기색을 떠올리며 감천곡을 쳐다보았다.
"노인장."
"......?"
"잠시 마차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감천곡의 눈에 의혹이 솟았다.
"무엇 때문에......?"
혁련소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일은 완벽하게 끝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헌데?"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한 가지 남았습니다."
"......?"
"대광사에서 옥산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천곡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 공손무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허허...... 자고로 청춘은 즐거운 법. 영호공자, 그런 문제라면
조금도 망설일 필요가 없다네."
그러자 감천곡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갔다 오게. 허나 너무 늦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곧이어 마차가 멈추고 혁련소천이 밖으로 나갔다.
이때 문득 반태서가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뭐가 말인가?"
감천곡의 반문에 반태서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무 것도 아니오."
감천곡은 그 순간 보았다.
반태서의 눈빛이 기이할 정도로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산신묘(山神廟).
말이 좋아 산신 묘지 흉가(凶家)도 이런 흉가가 없었다.
허물어진 담과 깨어진 기와, 거의 어른 키만큼이나 자라난 무성한
잡초가 어우러져 금세라도 뭔가 뛰쳐나올 듯 황량하고도 음산한
정경이었다.
불어 대는 이 바람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차고 매서운지......
이때 잡초 스치는 스산한 음향이 일며 열 줄기 인영이 산신묘 안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친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인상은 한결같
이 음산하고 사악(邪惡)했다.
그들의 맨 앞엔 푸르죽죽한 안색에 은은한 자광이 감도는 눈을 가
진 육순 가량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왼손에 검은 쇠구슬 두 개를 습관처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철환(鐵丸) 소남붕!
자소천의 서열 구위(九位)에 올라 있는 고수, 그의 손에서 발출되
는 서른여섯 개의 철환은 아직까지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무적 병기로 평가된다.
문득 철환 소남붕은 곤혹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분명 영호풍의 모습이 그렇게까지 훌륭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 년 동안 그렇게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그의 눈빛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깊숙이 가라앉았다.
"뭔가 이상해...... 내가 본 영호풍은 비록 기재이기는 하나 감천
곡의 마음까지 단번에 사로잡을 정도는 아니었어......!"
중얼거림이 끝나는 그 순간,
"킬킬킬...... 별놈 다 보겠군. 이상하게 생긴 놈이 이상하게 웃긴단 말이야."
느닷없이 산신묘 밖에서 괴이한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놈이냐?"
살기 돋친 냉갈과 함께 소남붕의 왼쪽 손이 벼락같이 번뜩였다.
슈― 욱!
순간 파공음과 함께 한 개의 철환이 뇌전처럼 벽을 뚫고 쏘아 갔다.
"아이쿠! 인간 살려......!"
꽝―!
짤막한 폭음과 숨넘어가는 듯한 다급성이 동시에 터졌다.
그 순간 소남붕과 아홉 명의 자의인은 어느새 소리가 터져 나온
곳에 나타나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전신에 땟국물이 기름기처럼 번들거리는 거지차림
의 소년이 바닥에 퍼져앉아 울상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박살난 밥그릇을 바라보
고 있었다.
이때 소년은 소남붕을 보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벌떡 일어섰다.
"이 영감탱이야! 도대체 나하고 전생에 무슨 철천지 원한이 있다
고 내 밥그릇을 요꼴로 만들었느냐?"
다짜고짜 내뱉는 반말은 문제가 아니었다.
소년은 마치 소남붕의 콧구멍을 찌르기라도 할 듯 정신없이 삿대
질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소남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기억에 이토록 남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남붕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떠올랐다.
"네놈...... 지금 누구한테 뭐라고 씨부렁...... 억!"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하마터면 소년의 손가락이 콧구멍을 찌를 뻔했던 것이다.
"이 영감탱이야! 내 죄라면 요 짐승보고 이상하다고 말한 죄 밖에
없다. 헌데 무슨 이유로 남의 밥그릇은 깨뜨렸냔 말이다!"
소남붕은 또 한 번 멍청해지고 말았다.
소년의 발 밑에 쥐처럼 작고 눈이 새파란 흰색 털의 묘한 짐승 한
마리가 깨진 밥그릇을 열심히 핥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고개를 아래로 홱 꺾었다.
"야! 이 심통 많은 놈아! 나는 밥그릇이 깨져 죽을 지경인데 네놈
은 뭐가 좋다고 처먹기만 하냐?"
그러면서 그는 짐승을 발길로 냅다 걷어찼다.
"끼아아... 악!"
짐승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쏟살같이 숲쪽으로 달아
났다.
"통째 구워 먹어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
소년은 거친 숨을 토하며 씩씩거리더니 이내 소남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소남붕이 흠칫한 순간 소년은 그의 멱살을 냅다 움켜쥐며 이빨을 우두둑 갈았다.
"이 영감탱이야! 이 밥그릇으로 말하자면 지난 십구 년 동안 나를
먹여 살렸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장장 백 년은 더 먹여 살릴 생명
줄로써 값을 따질 수도 없는 것이다!"
"......!"
"물어내라! 물어내―!"
길길이 날뛰며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년의 모습은 진정 가관이었다.
뿐인가? 소남붕의 얼굴에는 이미 구린내를 풍기는 침방울이 수도
없이 튀어 있었으니......
자의인들은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미친 놈! 어디 붙잡을 게 없어 염라대왕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
'삶에 염증을 느낀 놈이라면 임자는 제대로 찾은 셈이야!'
그들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남붕의 참고 참았던 분통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이 새끼!"
그는 한 소리 대갈을 터뜨리며 소년의 복부를 사정없이 내질렀다.
퍼억―!
"어구구구......!"
소년은 죽는다고 비명을 내지르며 멀찌감치 나가 떨어졌다.
허나 다음 순간 소년은 벌떡 일어서더니 배를 움켜쥐고 더욱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궁둥이야! 인간 살려라! 이 영감탱이가
남의 쪽박 깨고 인간까지 죽인다! 아이고......!"
눈을 반쯤 까뒤집고 게거품까지 부글부글 뿜어내는 폼이 영판 아귀모습 그대로였다.
이때 문득 소남붕의 눈에 번쩍 기광이 솟구쳤다.
'나의 발길질을 맞고도 저렇게 멀쩡하게 일어서다니......!'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살기찬 음성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숨은 고수였군!"
동시에 또 하나의 철환이 유성처럼 허공을 갈랐다.
"아이쿠!"
돌연 소년은 철환을 맞기도 전에 바닥을 뒹굴며 다 죽어가는 비명을 내질렀다.
철환은 소년이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다음 순간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퉁기듯 몸을 일으켜 옆쪽에 있
는 바위 위에 폴짝 올라섰다.
이어 소년은 싯누런 이빨을 시원스레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헤헤헷...... 늙은 놈! 생각 같아선 당장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
고 싶다만 우리 어른이 오셨으니 나는 이만 가 보시겠다."
말이 끝나면서 소년의 신형은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소남붕의 눈에 시뻘건 불길이 화락 치솟았다.
"이, 이놈! 서라!"
소남붕이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돌연 조용한 음성이 그의 등뒤에서 일었다.
"그대가 철환 소남붕인가?"
흠칫 놀란 소남붕은 지체없이 몸을 홱 돌렸다.
그의 뒤에는 준수한 외모의 혁련소천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소남붕은 말할 것도 없고 자의인들 중에서도 혁련소천이 언제 어
디서 나타났는지 알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수다......!'
소남붕은 대뜸 직감하며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너는...... 누구냐?"
혁련소천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그대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소남붕의 눈에 번쩍 괴강이 스쳤다.
"이제 보니 너는......?"
"영호풍."
소남붕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으며 음침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영호풍이 아니다. 영호풍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혁련소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내가 왔다. 바로 그대를 죽이기 위해서."
소남붕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 죽이기 위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예리한 비수가 목에 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허나 소남붕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괴소를 발했다.
"흐흐흐...... 이상한 일이군. 네놈은 대체 누구이기에 영호풍으
로 위장해서 군마천에 잠입하려는 것이냐?"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했다.
"이유는 알 것 없어. 단지 너는 죽어 주기만 하면 될 뿐이야."
살인 예고!
허나 그 음성은 너무도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소남붕의 안면이 괴이하게 씰룩거렸다.
"흐흐흣...... 네놈은 나 소남붕을 허수아비로 착각한 모양이구나."
"사실이 그러니까."
"미친 놈!"
순간 한꺼번에 대여섯 개의 철환이 소남붕의 손에서 벼락치듯 폭사되었다.
"바보.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혁련소천은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오른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쏘아 오던 대여섯 개의 철환은 자연스럽게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소남붕은 대경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후후후...... 놀란 모양이군."
혁련소천은 기소를 흘리며 오른손을 슬쩍 폈다.
순간 한 웅큼의 검은 쇳가루가 우스스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 철환이 쇳가루로......?'
소남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뒈져랏!"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소남붕은 발악적으로 양 소매를 앞으로 떨쳐 냈다.
순간 검은 파도와 같은 철환들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혁련소천
의 전신을 폭우처럼 덮어 갔다.
소남붕이 자랑하는 최후의 절명초식(絶命招式)이 전개된 것이다.
"부질없는 것."
냉소적인 한 마디가 들려나오는 순간 혁련소천의 신형이 곧장 앞으로 쏘아졌다.
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가?
피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검은 비(雨)처럼 쏘아 오는 철환 속으로 몸을 날리다니.
아니다 다를까?
퍼퍽― 퍼퍼퍽!
서른여섯 개의 철환은 혁련소천의 전신에 바늘 끝처럼 고스란히 쑤셔 박혔다.
순간 소남붕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흐흐흐...... 미친......."
허나 그의 말은 나오다가 말았고 희색은 나타날 때보다 수 배의 빠르기로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피떡이 되어 나가 떨어질 줄 알았던 혁련소천이 그대로 쏘
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환상이었던가?
소남붕은 활짝 펼쳐진 혁련소천의 장심에서 또하나의 손이 불쑥
뻗어 나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슈아아앙―!
그 손은 마치 혈옥(血玉)을 깎아 만든 듯 지극히 정교하고 아름다
운 핏빛의 손이었다.
슈― 욱!
"으윽......!"
한순간 소남붕은 심장 부위가 불에 데인 듯 화끈해짐을 느꼈다.
핏빛 혈옥수(血玉手)가 그의 가슴을 앞뒤로 관통해 버린 것이다.
시뻘건 핏물이 이내 기세 좋게 가슴의 앞뒤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소남붕은 비명 대신 불신과 경악에 찬 음성을 힘겹게 내뱉을 뿐이었다.
"이...... 이것은...... 전설...... 마황궁(魔皇宮)의...... 미리혈옥수(彌離血玉手)......!"
"진짜 바보는 아니었군."
어느새 혁련소천은 소남붕의 면전에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소남붕의 안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미...... 믿을 수...... 어찌 사람의 몸 속에서...... 그것이......."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었다.
"과거 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 몸 속에 여섯 개의 무기를 박아 넣었다."
"모...... 몸 속에?"
"그 첫번째가 미리혈옥수, 그리고......."
순간 혁련소천의 시선이 좌우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자의인들을 빠르게 훑어 지나갔다.
번― 쩍!
동시에 한 줄기 시뻘건 광채가 그의 오른쪽 소매에서 뻗쳐 나와
자의인들의 앞을 섬광처럼 스쳐 갔다.
파팍― 파파팍!
단지 스쳤을 뿐이건만 정확하게 아홉 개의 수급이 순식간에 핏물
에 휩싸인 채 허공 높이 떠올랐다.
자의인들 중 자신이 어떻게 무엇에 당해 죽어 가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심지어는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무기이다."
혁련소천은 소매를 걷어 오른쪽 팔뚝을 내밀었다.
그의 팔뚝에는 실같이 가느다란 핏빛 혈선(血線)이 나선형으로 칭
칭 감겨져 있었다.
순간 소남붕의 전신에 격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망혈사(死亡血絲)......?"
"뻗치면 백 장 이내의 생명체를 모조리 죽일 수 있다는 죽음의 마사(魔絲)이지."
"어...... 어찌...... 인간의...... 몸 속에...... 무기를......?"
소남붕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감천곡...... 무서운...... 인간을...... 만...... 마전으로......."
철환 소남붕, 그는 혁련소천에 의해 살해된 구천십지만마전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혁련소천은 소남붕의 시신을 향해 오른속을 확 펼쳤다.
슈아아― 앙!
미리혈옥수가 소남붕의 심장 부위에서 빠져나와 그의 장심으로 흔
적도 없이 사라졌다.
때를 같이 해서 혁련소천의 전신에 박혀 있던 서른여섯 개의 철환
이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 혁련소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신을 툭툭 털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영호풍의 진면목을 안 것이 죽을 죄였다."
"헤헤헤...... 소인의 배를 찬 것도 죄라면 죄이지요."
그때 짓궂은 괴소와 함께 한 인영이 혁련소천의 면전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훌쩍 사라졌던 거지 소년이었다.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되었느냐?"
소년은 히죽 웃었다.
"헷헷...... 삼생다라의 첫째인 이 천수다라(千手多羅)의 두 손이
천하에 무엇인들 훔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품에서 두툼한 서찰 한 뭉텅이를 꺼냈다.
만약 소남붕의 영혼이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외쳤으리라.
― 내 거다!
혁련소천은 물었다.
"읽어 보았느냐?"
"대충 읽어 본 즉, 모두 대종사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손은 썼느냐?"
"내용을 모조리 뒤바꿨습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소남붕의 품에 넣어 두어라."
"알겠습니다. 헌데 이들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혁련소천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번졌다.
"그대 막내아우의 능력이면 이 시체들을 환락천(歡樂天)의 놈들에
게 당한 것처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천수다라의 눈에 반짝 기광이 솟았다.
"환락...... 천입니까?"
"재미있지 않겠느냐? 환락천과 자소천이 반목하여 피터지게 싸운다면......."
그것은 분명 또 하나의 음모였다.
혁련소천이 소남붕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나타난 것도 미리 이 음
모를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혁련소천은 천수다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너희 삼 형제는 이번 일을 마치고 군산 제왕성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군산 제왕성―!
당금 무림에 그런 이름의 문파는 없었다.
천수다라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참......!"
"무엇이냐?"
"한단지마 육사숙을 만나시면 저희들을 그만 괴롭히라고 전해 주십시오."
"음......?"
"그 분은 땅만 있으면 아무 곳에서나 불쑥불쑥 나타나 저희들의
머리를 쥐어박는 바람에......."
말을 하다 말고 천수다라의 눈이 돌연 커졌다.
바로 코 앞에 서 있었던 혁련소천이 어느새 연기처럼 증발한 것이다.
천수다라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제기랄...... 괜히 혼자 씨부렁.......)
"제기랄 이란 말까지 한단지마에게 전해 주마."
이때 한 줄기 전음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아련히 들려 왔다.
천수다라는 대경하며 황급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는 코가 터지도록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울부짖듯 외쳤다.
"대종사님! 제발 그 말만은......!"
금릉성 외곽, 한 황량한 산신묘 앞에서 벌어졌던 사건이었다.